빅맨 빅보이스 -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성악가, 개정판
토마스 크바스토프 지음, 김민수 옮김 / 일리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ARD 콩쿠르 일등을 한 뒤 동정어린 시선이 나를 따라다닌다. 이것은 배낭에 든 맷돌과도 같은 느낌이다. 콩쿠르 당시 세 번째 예심에서 탈락한 어떤 친구가 "네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 덕을 본 거야!"라고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늘날 그 친구는 이름모를 무대에서, 나는 카네기홀에서 노래하고 있다. 나는 그 친구의 불행을 조금은 이해한다. 음악 비즈니스세계는 험하고 치열하다. 성악가들도 일정 수준에 이르기 위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한다. 그 수준에 이르면 예술가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정받지 못하면 매우 고통스럽다.

장애인 프리미엄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누명은 잊은 지 오래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까. 장애는 의심의 여지 없이 나라는 인간의 일부이다. 관객들이 무대 위의 나를 인식하는데 영향을 준다. 좋은 친구인 소프라노 줄리안느 반제는 나의 장애문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토마스의 모습은 그의 노래에 자연스럽게 집중케 해 준다."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대 위에서 멋진 프록코트도 입지 못하며, 내 몸뚱이는 작고 보잘 것 없다. 뭔가 인상적인 제스처를 해야 할 때면 내게는 강렬함이 부족하다. 무대 조명 아래 보이는 것이라고는 땀에 젖은 내 얼굴뿐이며, 노래 부를 때 벌리는 커다란 입뿐이다. 하지만 성악가에게는 외모가 아니라 노래가 중요하다. 노틀담의 꼽추같이 생긴 성악가는 한 시즌 정도 호기심을 끌 수 있다. 진정 관객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것은 그 성악가의 예술성이다.

 

최근에 DG(도이체 그라모폰) 111 한정판에 들어 있는 CD들을 한장씩 꺼내서 들어보고 있는데, 들을 만한 CD를 찾던 중 토마스 크바스토프(Thomas Quasthoff)라는 성악가가 눈에 들어왔다. 앨범 자켓만으로는 별다른 특이점을 느끼지 못한 채 네이버에 혹시 참조할 만한 자료가 있는지 찾아보았더니 이 사람이 키가 130cm에 불과한 탈리도마이드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탈리도마이드는 1950년대에 독일 임산부들이 입덧 방지용으로 먹던 약인데 그 부작용으로 아기가 자궁 속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에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해 팔과 다리가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게 된다. 손가락 발가락도 온전히 다섯개가 나지 못한다. 이런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DG랑 전속계약까지 맺은 승승장구하는 음악가라니. 무언가 궁금증이 일어서, 몇년 전에 절판되어버린 이 책을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어렵게 찾아내서 수중에 넣었다. 다 읽고 나서는 크바스토프 본인보다는 크바스토프의 부모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본인의 천부적인 자질과 의지력만으로는 장애인이 아무런 꿈을 펼칠 수 없는 시대였다(불행히 오늘날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 누가 됐더라도 삶을 포기하고 자신을 망가뜨리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크바스토프의 부모는 아들이 희망을 갖고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눈물겹게 노력한다. 의사는 크바스토프가 걸을 수 없다고 단정했지만 부모는 의족으로 걷기와 의족을 벗고 침대에 눕기를 수없이 함께 반복한 끝에 크바스토프를 걷게 했다. 그 어느 학교에서도 장애아를 받아줄 수 없다고 해서 가게 된 특수학교는 정신이 말짱한 탈리도마이드 장애 아동들과 정신분열증 장애 아동들을 한 반에 두고 수업을 하는 곳이었기에, 부모는 끊임없이 전학의 기회를 엿보다가 어느 진보적인 교장이 취임한 일반학교에 크바스토프를 보내 비장애인과 동일한 내용의 수업을 듣도록 한다. 또한 성악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14세 때부터 본격적인 성악 교육을 받도록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노래는 들어보지도 않은 채 돌려보내는 수모를 겪은 것도 한두번이 아닐 터다. 부모는 크바스토프를 하노버대학 음대에 보내고 싶었는데, 음대에서는 성악 전공이라도 악기 1개는 다룰 수 있어야 입학을 허가할 수 있다고 하면서 크바스토프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부모는 크바스토프를 하노버대학 법대에 보낸다...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법대는 늘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 그 이후에 다행히 유수의 콩쿨에 입상해서 유명세를 떨치고, 미국에서도 데뷔를 하고, DG와 전속계약을 맺고, 사이먼 래틀의 은근하고 끈질긴 부추김으로 끝까지 꺼려했던 오페라 무대에서도 온전히 역할 하나를 맡아서 수행하고, 음악 대학의 교수가 되고 하는 승승장구하는 과정들, 그 중간의 어느 지점 - 카네기홀에서 노래를 부를 때쯤이었을까? - 에 부모는 아마도 이제는 이 아이를 세상에 두고 먼저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거고, 어머니는 약을 잘못 복용한 죄책감에서 조금은 벗어났겠지.. 아들의 중후한 목소리가 무대에 울려퍼지는 가운데, 눈을 감고 지나간 날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했을 크바스토프의 부모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책을 읽으면서 DG 111의 CD를 같이 들었는데 그 CD들보다는 아무래도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유튜브에서 듣는 편이 좀더 친숙했다. 땅을 뚫는 저음도 인상적이지만, 한음한음 정확하게 발음되는 독일어가 귀에 꽂힌다. (곡 사이사이의 관객들의 폭풍 기침도 ;;) 최근에 타계한 피셔디스카우의 것도 들어봤지만 난 크바스토프의 폭풍저음이 좀더 가슴에 와 닿는 것 같다. 언젠가 한번쯤은 공연을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올해 초에 건강이 안 좋아서 은퇴를 했다고 한다.. 안타깝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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