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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탐하다 - 도시에 담긴 사람·시간·일상·자연의 풍경
임형남.노은주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1년 12월
평점 :
공간을 탐하다
무언가를 추억할 때는 오감을 동원한다. 어릴 적 살았던 동네 놀이터 미끄럼틀에 간혹 보이던 벌레 특유의 냄새, 노랗고 붉은 노을질 때까지 놀던 풍경, 움켜쥐면 빠져나가는 보드라운 모래같은 것이 기억난다. 그 공간을 떠올리면 그 시대 문화가 떠올라 매력적이다.
오늘 읽었던 책은 시대의 건축, 가장 오래남는 물질문명이라 할 수 있는 공간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울역과 국회의사당같은 도시의 공간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비 장소로 유명한 철원 노동당사와 같은 기억의 공간, 종각역에,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의 놀이공간과 데이트 장소로 자주 갔던 선유도 공원의 휴식공간까지 다양한 곳을 책 속에서 함께 여행했다.
지금은 노선이 조금 바뀌었지만 부천상동과 이대부고를 잇는 673번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널 때면 차창 밖으로 국회의사당이 보였다. 국회의원들이 모여있는 곳이지만 내겐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그 곳에서 전국대회 상을 받았던 기억이 더 진하게 배어있는 곳이었다. 예전에 티비에서 배우 이성재의 부친께서 76년도 여의도 국회의사당 현장의 총 책임자 소장으로 일하셨다는 인터뷰 기사가 생각난다. 다른 건물과는 달리 돔을 얹어 전쟁이 나면 거기서 마징가 제트나 태권브이가 나온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애초 설계안은 5층 규모의 모던한 스타일이었다고 하는데 돔을 얹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졸부의 거실에 들여놓은 번쩍거리는 가구처럼 형식의 아름다움이나 역사적 의미를 차치하고 외부에 얼마나 커보이고 권위적으로 보여야하는지가 우선되었다고 한다. 소통의 장이 아닌 불통의 장이 되어버린 이 곳은 태생부터 불통과 과시의 장이었다고 하니 아이러니하다.
책엔 철원 노동당사라는 공간도 소개해주었다. 중고등부 시절 교회에서 그곳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내부는 다 허물어지고 껍데기만 위풍당당하게 남아있어 나무에 매달려 있는 매미껍질같이 공허한’ 건물이라는 저자의 표현이 딱 맞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3집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를 여기서 찍었는데 비둘기가 날아가고 고무장갑을 끼며 통일을 노래하며 춤췄었다. 신선하고 파격적인 연출이었다. 마치 그 공간의 쓸쓸함은 사라지고 갈라진 세계가 터널처럼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전쟁의 참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건물이지만 의미있는 가사로 분단을 다시금 인식하게 한 공간이었다.
도시 재생의 성공적인 사례인 선유도공원도 인상깊다. 2002년 개장한 이곳은 정수장에서 용도가 폐기되고 아름다운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정수장 내부 물길을 그대로 살려 고대 유적지를 걷는듯한 기분도 든다. ‘낡은 콘크리트 기둥을 타고 덩굴식물이 주는 묘한 느낌’ 또한 신비롭다. 장소에 대한 이해와 문화적 안목을 기반으로 역사와 삶의 흔적을 지켜냈다.
이처럼 우리를 둘러싼 공간을 성찰하면 단순히 건물이라는 유물론적인 생각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 부부는 ‘가온’ 건축을 운영해 오며 가장 편안하고 인간다운 ‘집’ 에 대해 연구하는 건축가다. 책을 통해 집을 비롯한 공간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 기회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