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의 온기 -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인 당신에게 작가의 숨
윤고은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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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의 온기

 

  우연히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다가 EBS<윤고은의 EBS 북카페> 라는 프로그램을 듣게 되었다. 차분하고도 귓가에 착 감기는 목소리, 그리고 꽤 좋은 선곡들이 버무려져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엇보다 북카페답게 산책하듯 책을 읽어주는 것이 좋았다. 귀로 듣는 독서는 실로 달콤한 것이었다. DJ 윤고은님에 대해선 잘 몰랐다. EBS의 프로듀서일까? 정도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소설가였다. 서평을 신청하면서 아는 이름이 나와 반가웠는데, <빈틈의 온기>라는 책을 통해 여행자라는 소개를 덧붙여 더욱 호감이 생겼다.

 

  요즘은 더워서 걷기를 덜 하니 따지고 보면 내 유일한 출퇴근길은 지하철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7호선을 타고 다니는데, 사실 내가 좋아하는 호선은 따로 있다. 지하 깊숙하게 뚫린 7호선보다는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지상 전철이 좋다. 갑자기 지하철 노선도를 검색해본다. 이 모든 곳을 다 다녀보진 못했지만 내가 창밖을 놓치지 않고 보는 곳은 당산에서 합정으로 가는 2호선, 이촌에서 서빙고, 한남을 잇는 경의중앙선이다. 주로 한강 근처라는 특징이 있다. 작가는 책을 통해 지하철 출발역과 도착역 사이 빈틈의 온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다양하고 소소한 소재로 독자의 추억까지 이끌어내는, 그야말로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해방촌 박소아과>라는 에피소드에선 나도 나의 생물학적 고향을 떠올렸다. 난 원금순산부인과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은 강남 한복판 역삼역에 있었다. 그렇다. 난 강남 출신이다. 하하하. 그곳에서 오래 살진 않았지만. 어쨌든 2호선 역삼역을 지나 코엑스를 갈 때마다 나의 신생아시절을 떠올려본다. 물론 기억이 나진 않는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노약자석에 자리를 양보받았다. 그렇다. 지금 난 임산부다. 임산부석까지 만석인 아침 출근길엔 앉아서 가는걸 꿈도 꾸지 못했는데 오늘따라 좋은 분이 날 발견하곤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눈물나게 고마웠다. 지하철이 무대라면 내게 자리를 양보해준 사람은 천사라고 명명한 등장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저자는 누군가 떨어뜨린 종이 뭉치를 페이지 순서에 따라 줍고 있는,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줍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나라도 일단 가방 안으로 모든 것을 쓸어 담았을 텐데. ‘어떤 이들은 빠른 복구보다 정밀한 복구를 하는구나.’라고 큰 깨달음을 얻는 아침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이들이 관객이자 주인공으로 지하철이라는 무대를 오고간다. 그래서 관찰하는 것이 더욱 재미있는 것 같다.

 

  <열차가 아니라 필름>이란 에피소드에선 기다란 열차가 마치 필름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출근길이 아니라 여행길처럼, 선로 위가 아니라 필름 위를 흐르는 것처럼.’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하염없이 늘어진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몸을 싣고 가는 이것 안에 필름 속 사진처럼 박제되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러닝타임이 마냥 지루하진 않아 보인다.

 

  윤고은 작가님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집을 읽으며 세밀한 풍경화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는 누군가의 추천서처럼 나도 흑백의 일상을 이렇게 알록달록 색색깔로 물들이며 빈틈의 온기를 발견하고 싶어졌다. 그것 또한 제법 따뜻할 것이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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