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 - 나를 잃지 않고 나와 마주하는 경계의 감정
이창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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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

 

  내가 10살 때였다.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질문을 시키는데 답을 말하지 못하면 옷을 벗기겠다고 했다. 그리곤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반 아이들 앞에서 옷을 벗으라고 했다. 난 꼼짝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몇 분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흐르고 그냥 앉으라고 했는데 난 그날의 치욕과 수치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선생님은 쓰레기였다.

 

  오늘 읽은 서평도서를 보면서 수치의 그날이 떠올랐다. 수치와 부끄러움은 우리에게 낯붉힘을 일으키는 감정인데 주로 전자는 부정적 맥락에서 쓰이는 치욕, 굴욕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수치를 전방위적으로 연구해 이 책을 펴냈다. 넓이와 깊이를 모두 가진 감정, 수치의 스펙트럼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치는 두 얼굴을 가졌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의 내면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 유독한 감정임을 통찰하는 것, 또 하나는 자신과 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수치(부끄러움) 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책은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과학과 언어학의 도움을 빌어 수치를 살펴보는 것부터 에덴 신화를 분석하여 수치라는 타락 감정의 원형을 알아보는 것, 수치의 병리와 동양의 유교사상에서 다루는 수치, 마지막으로 우리문화에 미치는 수치의 대안에 대해 알아보았다.

 

  아까 언급한 대로 나의 초등학생 시절 에피소드의 감정은 정말 쪽팔리다로 표현할 수 있었다. 물론 선생님이 잘못한 것이지만 아이들 앞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존심이 짓밟히는 수모를 당한 느낌은 이 비속어로도 모자란 것 같다. 열받고 몸은 얼어붙었던 그 기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다. 책엔 우리 말과 글에 나타난 부끄러움의 구체적 언어 표현을 살펴보는 묘미도 있었다. 이를테면 최명희의 <혼불>에서 강모는 뒷목이 뜨끈해졌다. 그리고 온몸의 털이 거슬러서는 심한 수치감을 느꼈다.’ 와 같은 문장을 들 수 있다.

 

  에덴동산의 비유를 들자면 옷의 메타포는 은총, 옷이 벗겨져 알몸이 된 것은 타락이었다. , 알몸이란 상태는 수치라는 죄의 감정을 내포한다. 악의 극점이 수치다. 내면화된 수치와 이것을 은닉하려는 사회적 얼굴 사이의 갈등이 인간 심리의 중요한 문제임을 알려주었다.

  저자는 열등감이 수치의 우두머리라고 했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 나르시시즘, 리비도, 자존심과 같은 심리적 용어를 들어 준 것도 흥미로웠다. 특히 병든 수치심의 다양한 모습들 중 다섯가지 성격장애 증후군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그중에 공격적 행위로 수치심이 내면화된 사람의 모습은 안타까웠다. 폭력의 희생자가 역설적으로 가해자가 되는 빈번한 경우를 예로 들며 학습된 무기력자가 되어가는 것이 말이다.

 

  이 밖에도 사이코패스가 인간과 세상을 보는 방식이랄지 윤동주와 같이 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 대비되면서 수치의 감정을 자세히 알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 흡족했다. 아주 많은 주석이 달려있어 인문학 도서로 대학교양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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