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가랑비메이커 단상집 1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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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 때, 거기를 말한들

 

펜은 칼보다 강하다. 꼭 언론의 힘이 무력보다 호소력이 강하다는 뜻을 넘어서서 글은 자신을 위로하는 것을 넘어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 가랑비메이커님의 글이 그랬다. 2015년 출간 직후부터 5년간 품절과 재입고를 거듭하며 동네책방 베스트, 스테디셀러로 등극한 이 책이 묵직한 개정증보판으로 다시 다가왔다. 그녀는 프리라이터이자 출판사 문장과장면들의 디렉터이다. 그녀의 소개를 보니 책장과 극장 사이에 머물기 좋아하는 것, 이따금 사진을 찍는 것, 다양한 사람들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라이빗한 모임을 갖는 것 모두 마음에 들었다. 책의 재질도 마음에 들었다. 단상집이라 하니 부담 없이 읽고 싶다가도 마음을 후비는 문장 하나 하나에 온 마음을 집중하게 되었다.

 

<벗어두어야 할 자리>라는 제목의 글에선 커다란 신발에 우리의 발을 맞춰 키울 수 없듯이 가끔은 내려놓아야 하는 크기도 있다는 문장이 와 닿았다. 미련 없이 던져버려야만 하는 순간.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내려놓음이다. 발상의 전환. 내려놓는다는 것은 다른 얘기로 새로운 해답을 찾는 것이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하루를 밟아보자고 제안한다. 인디언 속담에도 누군가를 평가하려면 먼저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의 하루에 어떤 표정들이 들어 차 있는지, 푹 파묻은 고개는 몇 번이나 흔들었는지...그 하루를 밟고도 그를 미워할 수 있을까 자문한다면 나 또한 고개를 저을 것이다.

 

늘 그렇게 거기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늦어서 미안해.

어둠이 내려앉을 때,

그제야 한 번씩 올려다봐서.

p.118, <달에게>

 

지난 주 퇴근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썹달이 높게 떠있었다. 이미 해가 금방 져서 이른 시간에도 깜깜해졌는데 달과 함께 온 건물들의 창문이 노랗게 반짝였다. 달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는데,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제야 달의 존재를 깨닫게 되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책의 문장을 읽고 내게 달 같은 존재가 누구인지 생각해봤다. 어둠이 내려앉을 때 그제야 올려다봐서. 소중한 존재라면 상황이 어둡지 않고 밝고 기쁠 때 더욱 잊지 않고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의 제목이 주는 길지만 강렬한 문장이 내 마음 속으로 파고들었다. 가랑비메이커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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