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간판들 - 오래된 한글 간판으로 읽는 도시
장혜영 지음 / 지콜론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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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간판들

 

  어릴 적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한글 간판들을 보며 글자를 익혔다. 가끔 외래어를 한글발음 그대로 간판에 써놓은 걸 보면 그걸 읽으며 더 유식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맞춤법이 틀린 간판을 발견하면 국어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자부심도 들어 기분이 좋았다. 이를테면 어름이 그것이다. 얼음-집을 어름으로 쓴 곳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아는가.

 

  서울 낙원상가 근방에 가면 허리우드극장이 보인다. 한글로 또박하게 빨간 색으로 박혀있다.80년대에 태어난 내가 처음 가본 극장이 인천의 애관극장이었는데(그곳도 한글로 적혀있음) 같은 느낌이 났다. 옛날 느낌의 간판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시대의 삶을 오롯이 녹여낸다.

 

  이번 서평 도서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의 저자도 내 또래다. 86년생인 그녀는 추억의 장소들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며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가게에 대한 그리움이 생겼다고 했다. 그도 그럴 듯이 동네 슈퍼는 할인마트가 되었고 마트는 24시간 편의점이 되며 변하지 않는 가게에 대한, 아름다움의 역설을 찾고 싶었다고. 목차를 보니 흥미로운 문장이 많았는데, ‘서울에는 왜 지방 이름의 간판이 많을까란 질문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하던 차였다. 지역특성과 상관없을 것 같은 서비스업종에서도 지방 이름을 쓰는 걸 보며 궁금했었다.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에 따르면 서울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시대적인 키워드 상경답게 서울로 일거리를 찾아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먹고 살기 위해 무작정 상경해야만 했던 당시 상황은 고향의 이름을 딴 가게 간판 속에 담겨지게 되었다. 나주가 고향이었던 사장님은 전라도를 부르는 명칭인 호남을 붙여 호남집이란 생선구이 전문집을 운영했고 그 주위로 전주집, 삼천포집 등 고향 이름을 딴 식당들이 하나둘 생겨났단다.

간판의 모습을 닮은 주인장이란 문장도 눈에 들어왔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가게의 겉모습에 반해 사장님들에게 다가갔지만 오랫동안 자신만의 철학을 가꿔온 사장님의 속 모습에 반했다는 저자는, 도장을 새기는 인장 가게를 운영중인 사장님을 만났다. 생계로서의 일을 넘어 조각사 라는 직업을 근사하게 지키려는 그분의 자세에 감명을 받으며 40년 된 태광인재사의 색바랜 간판에 의미를 담았다.

 

  간판의 글자 디자인은 매우 다양하다. 성수동의 우당약국은 50년이나 되었는데 간판 장인은 고무판에 글자를 조각한 후 함석판에 부착하고 가게에 어울리는 색으로 직접 페인트칠까지 했다. 시간이 지나고 색이 바랠수록 깊이감이 더한다. 언뜻 쉽게 쓴 글씨체같지만 이응 한 자만 보아도 모음과의 조화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달라져 세심함을 엿볼 수 있었다. 한글 특성상 자음, 모음, 받침의 결합에 따라 크기와 간격을 조절하는 건 쉽지 않을 터. 한글디자인의 한 시대를 일군 디자이너들이었을 간판 장인들의 노고가 오늘에서야 보인다. 봉천동 수진 의상실은 원단을 가위로 자르듯 글자마다 뾰족하게 가장자리를 잘라낸 모양이 독특해 개성있었다.

 

  오래된 한글 간판은 오래된 가게를 대변하며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자리를 지켰다. 요즘 상가는 간판을 통일하여 개성이 없게 만들지만 제각각 가게의 의미를 담고 독특한 간판으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옛날 간판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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