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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쏟아지던 여름
임은하 지음 / 고래가숨쉬는도서관 / 2020년 6월
평점 :
햇빛 쏟아지던 여름
“추리닝 입고 전쟁터에 나갈 수는 없잖아요. 그건 전쟁에 임하는 자세가 아니죠.”
설이가 열흘이나 공들여 그린 그림은 선생님께 뺏겼다. 단지 여전사가 가슴 파진 옷을 입고 있었다고. 설이의 그림은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다. 이 일로 엄마가 불려왔고 사실 엄마는 새엄마였다. 설이는 그 단어가 못된 팥쥐엄마같은 계모느낌이 나서 싫었다. 여하튼 사춘기에 접어는 15세 소녀 설이는 여름 방학 때 식구들과 여행을 가는 대신 고모할머니네 가있기로 했다. 설이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새엄마는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고 변호사인 아빠는 엄마가 더 배부르기 전에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설이는 아줌마와 아빠 사이에 끼기 싫었다. 꽤 큰 의류회사 사장님인 고모할머니네 간다고 선언해버렸다. 설이가 고모할머니 댁에 가면서 평화시장 공순이에서 일류 디자이너가 된 그녀의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펼쳐진다. 마치 우리나라 현대사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할머니는 아직도 미혼인데, 열아홉에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이 죽었다는 부고를 듣고 설이와 함께 섬으로 가는 선착장에 몸을 싣는다.
책의 제목처럼 햇빛이 쏟아지던 그 여름날, 그 섬에 가면서 설이는 가족과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계기를 맞는다. 작년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수상작으로 유기적으로 짜인 구성이 몰입감을 덧입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섬까지 함께 도망한 할머니의 용기는 미녀와 야수처럼 모든 걸 극복하진 못했지만 설이는 엄마가 자신을 미워해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게 아니라는 건 깨닫게 되었다. 섬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영혼이 설이에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모두 자기만의 언어로 노력하고 있는 거니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아줌마가 낳은 설이의 동생은 설이의 손가락을 꽉 쥔다. 설이 자신도 이렇게 꽉 쥔 주먹 속의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며 살았는지 생각해보기도 하고 말이다. 고모할머니의 흉터처럼 지나온 시간들을 되새기며 그것이 단지 상처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설이의 회복처럼 나도 누군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군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