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와 고마워는 두 글자나 같네 걷는사람 시인선 13
김은지 지음 / 걷는사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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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와 고마워는 두 글자나 같네

 

 제목이 길어 더 기억에 남았다. 줄임말에 익숙한 세대에 긴 제목의 노래들도 요즘 대세인 것 같다. 악뮤의 이찬혁은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를 만들며 그 문장 자체여야 곡이 완성되는 느낌이 들어 곡 제목을 줄이고 싶지 않았다는 인터뷰를 했고.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라든지, 또 잔나비의 사랑하긴 했었나요~’로 시작되는 노래 제목은 글자수가 42자나 된다. 찰나의 직관이 환영받는 디지털 시대에 단절의 단어에 익숙한 우리들이 이처럼 문장형의 제목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좀 더 곱씹어 보게 되는 문학적이고 스토리가 담겨있는 제목이라 호기심을 자아내는 건 아닐까? 처음 시집에서 긴 제목을 발견했던 건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였다. 김은지님의 시집도 그래서 와닿았다. 제목은 첫인상이기에 여기서 따뜻함을 느꼈다. 차례마저 마음에 들었다.

1. 안녕이라는 소리의 감촉

2. 따뜻한 호수에 떠 있는 오리가

3. 종이에 누워 있던 잉크에 누군가의 눈길이 스칠 때

4. 다음으로 날씨 예보가 이어졌다

 

 시집은 내가 읽고 싶은 시부터 보아도 무방하다는 전제하에 오늘의 우중충한 날씨로 인한 마음의 서늘함을 4부에 실린 시들로 먼저 따뜻하게 채워보고 싶었다. 내일이 수능인데 오늘은 꼭 비가 올 것만 같다. 매년 수능날은 한파다. 으슬으슬 춥다. 먼저 읽은 시 또한 제목이 길다.


<우산을 접을 때는 우산을 접는 것만 생각한다>

(중략)

옆 테이블에서는

중간부터 보는 영화

침묵이 아무리 길어도 계산된 만큼 흐르고

다시는 못 본다는 것

무섭지 않다

두 사람은 주인공이니까

(중략)

우산을 접을 때는 우산을 접는 것만 생각하고

당신이 비를 맞진 않을까 하는 건 떠올리지 않게 된다

 

 카페에 앉아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을 스크린 속 배우들처럼 관찰하고 있는 느낌이다. 우산을 접는 모습을 클로즈업해주고 기타 여러 장면은 편집된다.

 

1부 첫 시로 실린 고구마는 내가 생각하는 먹는 고구마가 아니었다. 강아지였다.

<고구마>

(중략)

열 살 넘은 개가

내 이불을 덮고 자고 있다

들숨 날숨에 맞춰

움직이는 배를 보다가

머리를 쓰다듬으면

어김없이 눈을 뜨고

나를 확인하는 개

고구마와 고마워는

두 글자나 같네

 

 고구마가 눈을 뜨고 나를 확인하는 모습이 마치 아기가 엄마를 쳐다보는 모습 같아 흐뭇하고 예쁜 장면이었다. 고구마가 봄에 심장약을 복용하지 않도록 이 겨울을 잘 났으면 좋겠다.

 

  김은지 시인은 시의 의도에 맞추어 타자를 임의로 판단하거나, 타인의 내면이나 외형을 변형하여 시의 재료로 활용하지 않는다고 육호수 시인은 말했다. 시인이라는 이유로 타인을 추측하고 판단하여 글의 소재거리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독을 그대로 곁에 두는 것이다. 성품이 엿보인다. 글은 그 사람의 마음이니까.

 

  제목부터 감사가 느껴지는 시집에 나 또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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