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의 위상이 유명무실해지고 부르조아가 부상하기 시작하는 자본주의 초기 유럽 가상의 공화국 공작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작님과 하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로판의 클리셰가 전혀 개입하지 않은 사실적인 설정이기에 플롯의 재미는 전적으로 캐릭터들이 서로 빚어내는 갈등의 드라마에서만 찾을 수 있는데요. 단순한 플롯의 로맨스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박진감 넘치게 흥미진진합니다. 이 재미는 순전히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들이 이뤄낸 것이라 하겠는데요. 캐릭터가 각각의 인물마다 전형적이지 않고 매우 입체적입니다. 각자 자신만의 역사를 지닌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 그리고 행동은 복합적이고 다채로울 수밖에 없지요. 전적으로 악하거나 전적으로 선량한 캐릭들의 일차원적이고 지루한 내러티브는 절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구요. 우리의 여주는 내전에서 부모님을 잃고 하나 남은 가족인 동생을 하녀일을 해가며 돌봐야 헸습니다. 비록 일은 힘들지만 여주는 제 손으로 돈을 벌어 삶을 꾸려나간다는 자부심이 무척 강합니다. 그러니 여주는 자신의 자부심을 깨트리는 존재를 절대 용납할 수 없지요. 그 존재가 아무리 사랑하는 남주라도 말이죠. 여주는 남주에게 마냥 상냥하지 않습니다. 남주는 또 어떤가요? 살인자이지만 한 마디로 악인이라 단정지을 수 없는 맥락이 있지요. 남주의 이복형제가 부리는 패악에는 열등감이라는 원인이 있고 남주의 이복누이는 댓가를 받고서야 남주의 조력자가 됩니다. 여주의 친구는 여주를 배신하지만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죠. 이렇듯 복합적인 캐릭터들이 로맨스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재미는 구체적이고 섬세한 묘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남주와 여주가 사랑에 빠지는 심리, 감정변화가 세밀한 묘사로 집요하게 차근차근 그려지고 있는데요. 덕분에 남주의 비틀린 집착과 그로 인한 기행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인물 생활환경 자연배경 행동양식 등등 어느 하나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세밀화를 그리는 듯 눈 앞에 포착해냅니다. 예컨대 2권에서 여주가 작은 소녀에서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한 세월의 흐름을 서술할 때"제 키보다 큰 대걸레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복도를 걸어다니던 소녀 대신 부드러운 굴곡이 돋보이는 아가씨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저택을 바삐 쓸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굽이치는 갈색 머리카락이 날씬한 허리 주변을 살랑거렸다."라고 묘사되고 있는데요. 스낵컬쳐인 장르소설이 아니라 본격적인 문학 작품을 접하는 감동을 받았더랬습니다. 진짜 오랜만에 발견한 보물같은 작품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