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과 분위기가 완전 달라서 놀랐어요. 진교님은 심각하고 진중한 문체에 특화되신 작가님 아닌가 생각했었는데요. 유머러스하고 가벼운 이야기도 아주 자연스럽게 펼쳐주시네요. 작품의 발랄한 분위기는 대부분 여주가 이끄는 것 같습니다. 밝고 순수하며 톡톡 튀는(라고 쓰고 사고뭉치라고 읽는) 햇살여주는 자칫하면 민폐 고구마 바보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데요. 우리의 여주는 마음 속에 사나운 원숭이 전사를 키워 유사시 말싸움터에 투입할 정도로 똘똘하고 전투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캐릭터가 마냥 해맑고 거침없기만 하다면 너무 일차원적이라 매력이 없죠.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님의 절묘한 솜씨가 빛을 발하네요. 햇살 여주에게 그늘을 씌워서 캐릭터의 매력을 몇 배로 끌어내는 솜씨 말이죠.여주에게 드리워진 그늘은 시각장애라는 핸디캡입니다. 이 세계관에서 장애인은 예전의 한센병 환자같이 천대받고 기피당하는 가혹한 대우를 받는데요. 여주가 아무리 유수의 귀족 영애로 구김살없이 살아왔어도 장애인이기 때문에 받은 깊은 상처는 여주의 자존감을 뿌리부터 훼손시켜버렸죠. 그리하여 여주의 캐릭터는 햇살과 그늘, 거침없음과 주저함이 공존하는 복잡한 개성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주의 복잡한 자의식 덕분에 다소 음습한 남주의 직진은 이런저런 어려움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구요. 냉혹하고 자만심 가득한 단정하기 짝이 없는 알파 남주가 여주 때문에 망가지는 모습도 또다른 재미를 주네요.열 말 필요 없이 재미있었습니다. 진교님 작품답지 않게(?) 웃기기도 했는데요 억지로 웃기려 하지 않는 품격있는 문체가 좋았어요. 무엇보다 여주의 친정과 시월드의 모든 구성원들이 여주를 우쭈쭈 해주니 마음 놓고 편하게 달릴 수 있었네요. 진지와 유쾌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님의 필력에 감탄 또 감탄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