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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그동안 돈을 좀 벌었다. 꽤 된다. 이젠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 난 더 이상 돈이 필요 없는데,
복지 단체에 기부하려니까 왜 그렇게 허전한지.
이제 와서 핏줄 얘기하는 걸 참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꼭 너희들, 바로 내 핏줄에게 물려주고 싶구나.
일본에서 택시 회사를 했다.
이번에 정리했더니 한국 돈으로 한 60억 되는구나. 너희들에게 물려주면 세금을 제하고도 거의 40억은 된다고 하더라.”
할머니의 60억에 온 가족의 눈이 반짝였다. 그때부터 할머니 환심 사기 전략이 시작되는데,
할머니의 60억은 과연 진짜일까?
대책 없고, 뻔뻔하고, 기상천외한 정끝순 제니 할머니가 온다!
여기 답 없는 한 가족이 있다.
슈퍼마켓 사장님인 어머니와 사업하는 고모는 돈을 밝히고, 아버지는 정치판만 기웃거리고, 아들은 마흔이 넘어서도 취업을 못한 백수다. 그나마 딸과 과거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만 좀 괜찮아 보인다.
이런 가족이 살고 있는 집에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가 찾아온다.
67년 전 염병에 걸려 죽었다던 할머니, 할아버지를 밀고하고 일본 순사를 따라간 민족의 배신자인 할머니가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초인종을 몇 번이나 누르고 원래 살았던 집인 것처럼 당당하게 돌아온다.
할머니를 보고 이를 갈던 고모와 할아버지, 다른 가족들은 할머니의 60억 이야기를 듣고 입을 딱 다문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60억 쟁탈전, 할머니의 60억은 과연 사실일까? 67년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저자 김범은 2009년 단편 「치즈버거」로 한국소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할매가 돌아왔다』는 저자의 첫 번째 장편소설로, 출간 즉시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판권이 계약되며 큰 호평을 받았다.
"할머니는 거실에서 왜 창밖만 바라보나요?"
한동안 작품에만 몰두하던 할머니. 수줍은지 얼굴을 붉혔다.
"얼굴이 보고 싶어서. 네 아비도 너도 동주도, 달자도 다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런데 왜 창밖을?"
"직접 보긴 뭣해서 창에 비친 모습을 보는 거란다."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가볍고, 유머러스하다. 할머니를 당장 내쫓으려던 가족들이 돈 앞에서 태세를 전환하는 장면은 우스꽝스럽고, 거기에 대해 아무런 발언권 없이 그저 관전하기만 하는 주인공은 한심하면서도 우습다.
그 웃음 속에 할머니의 사연은 일차적으로 가려진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천천히,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부드럽게 풀려 나온다.
어느 시대에서든 역사에서 주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사회는 사뭇 다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민족을 배신하고 남편과 자식을 버린 채 도망쳤다가 67년이나 지나서야 뻔뻔하게 돌아온 할머니. 이것은 주류들의 기억이고 시선이다.
훌륭했던 위인들도 여성과 약자의 입장에서는 영 질 좋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묻히고 사라졌던 사람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준다.
그리고 이 우스운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사실 절대 다수의 입장에서만 쓰여진 이야기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생각했다. 좀더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좀더 많은 여성들이, 약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것을 들어주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피할 수 없는 길을 피하면 그 대가를 아주 오래도록 치러야 한다.
너도 참 어렵게 사는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엔 늘 정직해야 한단다.
피하면 길은 더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