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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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뉴스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버릇을 들이게 되었어.

신문도 거짓말을 하고 역사학자들도 거짓말을 해.

오늘날에는 텔레비전도 거짓말을 해."


움베르트 에코 작가의 유작이자,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꼭 읽어야 할 소설이기도 하다.

저자 움베르트 에코는 기호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이자 교수였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데,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이름답게 책 속 인물들은 예시를 들어도 매우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지식이 담긴 일화를 사용한다. 무솔리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거짓이고 허풍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너무나도 자세하고 설득력 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고 보니,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지 않았다."

책이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대충 알고 있는 나로서는 참으로 의아했다.

뒤표지에 가짜 뉴스를 다룬다고 되어 있으면서 갑자기 웬 수도꼭지?

다음 전개를 궁금해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이 첫 문장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독백으로 넘어가고, 이야기에 빠르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대필 작가로 일하는 '콜론나'는 어느 날 '시메이'로부터 대필 의뢰를 받는다.

콜론나가 대필해야 할 것은 어느 회상록. 어떤 정체불명의 신문에 대한 회상록이다.

의뢰자는 말한다. 그 신문은 창간되지 않을 신문이라고.

이 신문은 정계 인사들의 비리를 까발리는 신문이 될 것이고, 신문의 존재가 알려지면 그들은 불안에 떨며 자신의 주인에게 뇌물을 바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의 주인은 그것을 이용해 상류사회로 들어가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 신문은 발간되기도 전에 폐기될 것이고, 대중들에게는 어떤 비판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줄거리부터가 매우 흥미로웠다. 어디에서 이런 내용을 찾을 수 있겠는가. 흥미를 확 끌어당기면서도 앞으로의 전개를 궁금하게 만드는, 훌륭한 도입부였다.

신문이 창간되지 않는다는 것은 콜론나와 의뢰인만의 비밀. 본격적으로 신문을 위한 기자단을 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인 기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시메이의 주도 아래 신문에 실을 기사를 어떻게 꾸밀지 회의를 벌인다.

 

나는 이 회의에서, 이들이 결코 진실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그대로'라는 기자 정신은 여기에서 언급해봤자 시메이가 보기 좋게 퇴짜를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진실을 말하면서 진실을 숨기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사용된 비열한 방법으로 신문을 꾸미려 한다.

진지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을 원했던 '마이어'는 이런 작태에 실망을 금치 못한다.

 

독자들은 여기서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목적이 따로 있는 신문이라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기사 하나로 누군가를 매장하려는 일을 시메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시하고, 지시받은 자는 그것을 따른다.

글의 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펜을 잡으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작가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듯했다.

글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펜을 잡은 사람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이들은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고민하지 않는다. 기자를 표명하지만 이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읽는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읽어야 하는가?

신문과 뉴스를 읽고,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있는가?

나는 기자가 아니고, 실제로 기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것이다. 우리는 '직업윤리 의식'이라는 얄팍하기 짝이 없고 구속력도 없는 그것에 절실히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쥔 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저버린다.

 

저자는 매혹적인 플롯을 가지고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나는 아직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이것은 내가 나에게 질문했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앞으로 이에 답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보려 한다.

'가짜뉴스'가 물위로 본격적으로 떠오른 지금, 그들이 윤리의식을 저버렸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는 대답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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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 필로테라피 5
셀린 벨로크 지음, 류재화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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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초하지 말자실패하지 말자.

이런 다짐이 어떤 용기가 되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새로운 불만족과 끝없는 불안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것에 불과하다."


책을 열고몇 장 넘기면서 아상당히 위험한 책을 골랐구나라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철학에 문외한인 사람조차 이름 정도는 들어봄직할 만큼 이름 있는 철학자이다.

나 역시 철학을 잘 알지 못해서 '쇼펜하우어'하면 고슴도치의 딜레마 정도밖에 모른다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느끼길쇼펜하우어는 참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우리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이것은 행복한 나날들이 불행한 나날들에 자리를 내줄 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기쁨이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 그것을 맛보는 능력은 떨어진다.

습관이 된 기쁨은 더 이상 기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라는 제목을 보고나는 모든 자기계발서가 그렇듯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또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서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내 예상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쇼펜하우어에게 그것은 차선순위이고그는 먼저 '우리가 왜 괴로운지'를 탐구한다.

그 탐구 과정이 놀랍다쇼펜하우어는 우리가 행복해지려 애쓰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한다우리가 행복을 손에 쥐려 해 봤자 행복을 멀리 도망간다행복은 부정적인 것에 가깝다삶은 '살고자 하는 의지'에 따른 투쟁이고거기에서 승리를 거머쥐어 봤자 그것은 잠깐에 불과하다곧 우리는 다시 투쟁 속으로 뛰어들게 되고그것이 반복되면 지치게 된다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삶의 목표는 자연성 본성에 가까운 '의지'라 불리는 것에 의해 결정되며 이성은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지를 결정하는 것뿐이다진정 행복하지고자 한다면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을 그만두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버려야 한다.

읽는 내내 흥미로웠고정말 파격적이었다지금까지 윤리와 사상이나 생활과 윤리에서 배워 온 철학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철학이었다이것을 염세주의라고 하던가?

인간과 삶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본다는 이유로 싫어할 사람도 있겠지만나는 전혀 색다른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그의 철학이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는 것은 과거의 사람과 나누는 아주 좋은 대화라고 하는데나는 철학책만큼 이 말과 어울리는 책이 없다고 생각한다책을 읽는 내내 대화체가 아닌데도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옆에서 듣는 느낌이었다나는 때때로 그의 말에 맞장구치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였으며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나의 철학은 그와 다르다고 반박하기도 하였다좋은 말상대를 만났다고 악수라고 하고픈 마음이었다.


"선적인 시간으로부터 구원된 세계를 보는 것,

그 세계의 모든 것이 여러 가능성 형태로 현존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시간의 압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우리는 이제 '고통의 대가를 치를 만한 어떤 것'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의무로부터 벗어난다.

행해지지 않은 것빛을 보지 못한 보물들보지 못했거나 창조되지 못한 아름다움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현될 것이다.

이 다른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변형일지 모른다."


이 지독한 염세주의자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연민을 제시한 것 또한 참으로 흥미롭다.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 '자기애'로부터 주의를 돌리라는 것이다.


"자애는 자아를 포기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어떤 감정이나 욕망 따위도 포기하게 만든다.

자애는 범사랑을 만든다."


비록 염세주의의 형태를 띠었지만사실 그는 누구보다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을까정확히 말하자면 평화를인생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한 번 사는 인생진하고 깊고 마음껏 투쟁하며 살다 가고 싶었다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욕망이라고 생각했기에마음껏 욕망하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자 했다.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완벽히 반대다.

당연히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이다나는 그 고통조차 내 삶의 일부로 함께 가져가겠다고 생각했다그것이 날 더 강하게 만들 거라고.

나와 반대되는 태도로 삶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 기뻤다그것이 쇼펜하우어라서 더욱 즐거웠다한바탕 열띤 토론을 나눈 채 진심으로 상대에 대한 경외감을 담아 악수를 나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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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 426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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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소리에 조금씩 벽이 열리고 문이 열리고

이젠 혼자서 밤길을 걸을 수 있어요

나는 더이상 영혼 없이 태어난 아이가 아니에요

-<슬픈 모유>

 

창비시선 426번으로 이름을 올린 나희덕 시인의 신작, 파일명 서정시이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종이감옥

2부 눈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3부 주름들

4부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

 

1부는 표제작 '파일명 서정시'가 수록된, 말 그대로 나희덕 시인이 창작한 서정시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제2부는 실제 존재하는 사건, 역사 등 사회문제를 주제로 쓴 시의 모음으로, 가장 읽기 힘들면서 눈물짓게 했던 부분이었다.

3부는 '아버지''어머니'가 자주 등장하는데, 나희덕 시인이 자전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4부는 다시 서정시로 돌아오는데, 이제 서서히 작별을 고하는 듯했다.

 

이것은 불의 노래,

노래할 때마다 등불이 하나씩 켜져요

불은 번져가고

몸이 점점 뜨거워져요

강 속으로 걸어들어가며 노래를 불러요

강물도 끓어오르기 시작해요

뜨거워요 뜨거워요 너무 뜨거워요

사랑이여, 도와줘요

비의 노래를 불러줘요 비를 불러줘요

-1부 종이감옥 <탄센의 노래>

 

1부는 아름답고 처연했다. 시를 읽는 동안 탬버린을 치며 모닥불 주변을 맨발로 돌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무질서한 말로 가득한 구덩이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시는 모두 한 사람이 쓴 것 같기도 했고 각자 다른 사람이 쓴 것 같기도 했다. 따뜻하고 냉랭했으며 두 팔로 감싸안는 것 같더니 어느새 매몰차게 내치는 것 같기도 했다. 글자를 두른 토끼에게 이끌려 시어의 오솔길을 걷고, 빙하를 넘었으며, 사막을 지났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히 깨달을 때도 있었으나 도무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었으며, 뜻은 모르나 마음이 이미 알아차린 시도 있었다.

시는 이렇듯 가장 제한된 언어와 형태로 가장 많은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교실에 갇힌 아이들이 있다

책상 밑에 의자 밑에 끼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다리와

유리창을 탕, , 두드리는 손들.

그 유리창을 깰 도끼는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가.

-2부 눈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난파된 교실>

 

여기가 어디지요?

죽은 줄도 모르고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묻습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 한마리를

잃어버린 영혼인 듯 따라갑니다, 들린 발꿈치로.

-2부 눈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들린 발꿈치로>

 

2부는 1부에 비해 대상도 메시지도 명확했다.

정제되고 함축적인 시어로 표현되었기에 더욱 읽기 힘들었다.

우리는 아직도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역사를 만들어내고 역사에 휩쓸리고 역사를 부수며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직접 피부로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목으로 터져라 부르짖은 일이 아닌가.

내가 흘린 눈물은 그들이 흘린 눈물에 비하면 너무도 가벼웠다. 모두가 각자의 울음을 울었고 각자의 눈물을 흘렸으며 그래서 우리는 하나로 소리쳤다.

오늘은 기념비적인 날이다. 2015 한일합의 이후 10억엔으로 세워진 화해치유재단이 공식적으로 해산된 날이기 때문이다. 소녀상 발아래 그림자에 깃든 하얀 나비가 날갯짓했다.

 

이제 누구의 아내도 아닌

늙은 소녀

 

그녀의 주름 속에서 튀어오른 물고기들은 이내

익숙한 고통의 서식지로 돌아갔다

 

주름은 골짜기처럼 깊어

펼쳐들면 한 생애가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3부 주름들 <주름들>

 

몇 편 읽고 어쩌면 저자의 서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품에 작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시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읽은 시와 말을 어떤 생애의 실로 자아내왔는지 어렴풋이 보여주는 듯했기에.

시련 없이 살아온 사람은 없다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은 달랐다.

나는 다시 한번 모든 이들의 생애에 경배를 올렸다.

 

나이-톰보-톰보, 그곳은 바닷가에 있지

거룩한 산에 다다른 영혼이 뛰어내리는 바위,

바다에 옛 노래가 울려퍼지면

그제야 죽음이 임한 걸 알게 된다지

-4부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 <나이-톰보-톰보>

 

책의 마지막 장이다. 책을 덮으면 영원히 끝날 것 같으면서도 영원히 계속될 것 같기도 했다.

독자가 가닿을 수 없는 작품 속 바다에서 계속 노를 저어 가고 있을 것 같았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 반짝이는 무언가를 향해, 끝나지 않을 항해를 시작하는 듯했다.

내용은 1부와 비슷한 서정시 같으나, 이번 장에는 '시인으로서의 저자'가 녹아 있는 것 같았다.

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계속해서 고뇌하고 창작하는 그런 사람이 보였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고 싶다고, 그 험난한 여정에 기꺼이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시는 늘 과거의 이야기였다. 윤동주, 백석 등 과거 사람들의 시를 읽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몇 세기가 흘러도 빛바래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사람들의 언어로 쓰인 과거의 언어였다. 그래서 시는 늘 내게 있어 추억 속의 무덤과 같았다.

이번 책을 읽고 처음으로 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시의 살아 있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의 사람이 쓴 지금의 언어가 처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시는 과거에 주저앉아 있는 게 아니라 언제까지나 시간의 곁에서 걷고 있었음을 처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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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웃었으면 좋겠다 시바 - 생각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아
햄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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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로 자랐다.

고집스럽게도 나로 자랐다.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난결국 나일 수밖에 없었다."


잡아 늘리고 싶을 정도로 토실토실한 볼과 말랑말랑 몸매를 가진 시바가 우리의 주인공이다.

녹록지 않은 세상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살고 싶은 우리의 시바어쩐지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이 책은 그림형 에세이로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좀 더 가볍게 살기로 했다

2부 마음이 마음대로 되면 그게 마음인가

3부 에누리 없는 시바 연대기

4부 나의 최선은 지금의 나야

글과 그림을 쓰고 그린 햄햄은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현재, 8년간의 회사 생활을 청산하고 신나는 백수 라이프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모든 회사원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은 결국 백수 같은 삶이라지만 그건 회사원이 되었을 때 얘기고모든 취준생들은 백수라는 현실을 괴로워하며 빨리 취업하려 애쓴다그러나 우리의 시바는 다르다시바는 일도 출근도 없는 하루하루를 마음껏 즐기고현재와 현재를 살고 있는 자신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아침에 급히 이불에서 일어나다가 '아 맞다 회사 때려치웠지하고 다시 드러눕는 시바는 얼마나 귀여운지.

비록 회사를 나오게 되었지만시바는 한층 더 여유롭고더욱 느긋하고무엇보다 행복해 보인다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모든 회사원이 그렇듯 시바도 제법 험난한 회사 생활을 했다어느 회사에서는 "어디 가서 컴퓨터로 그림 그리지 마세요."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또다른 회사는 "입사하고 바로 결혼할 건 아니죠?"라고 묻기까지 했다대체 면접을 빙자한 인신공격은 언제쯤 끝나는 걸까우리 시바가 더 이상 시바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쯤 끝나는 걸까아니면 그 짓이 끝나야 시바가 시바라는 말을 끝내는 걸까가장 슬픈 일이 이것이 그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할 만하면 일이 아니겠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다고.

남의 돈 벌어먹기 힘들다면서 일하는 건 쉬워 보이는 모양이다.

학교에서도 "힘들 테니 과제는 쉬운 걸로 내줄게 or 빼줄게"라고 말하는 교수님은...

언젠가 '동생과 언니의 카톡'이라는 스크린샷을 본 적이 있다.

'빨리 취업하고 싶다'는 동생에게 언니의 대답이 가관이다.

'돈 내고 다니는 학교도 그 모양인데 돈 받고 다니는 회사는 어떻겠니'


"오늘도 정의로운 백수가 되게 해 주세요"


시바는회사를 나올 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엉엉 울었다퇴직이 처음이 아닌데도 그랬다.

그렇게 펑펑 운 다음에야 우리의 시바는 깨달았다.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해야 하는 것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늘 당연한 것일수록 깨닫는 데 오래 걸린다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당연하지 않은 일이 당연한 곳이어서 그렇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시바의 시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예술계의 고질병저작권 침해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법적 대응을 하느라 거금을 날렸다하지만 그래도시바는 살아 있고행복하게 살려고가볍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릴 때 산타 할아버지가

그렇게 울지 말라고 한 이유를 이제 알겠어.

사회생활 하면 울고 싶을 때가 오니까

그럴 때 참으려면 내성을 기르라는 거지.


우는 아이한테는 선물을 안 준다니.

울고 있으니까 좀 달래줘도 될 텐데."


울고 있을 때 산타 할아버지조차 어깨 토닥여 주지 않는 세상,

염려의 말 대신 질책을 말을 하는 데 혀를 사용하고 있는 세상에서,

나 자신만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주자.

나 자신만은 나를 위해 살아주자.


"다들 처음은 있는 거니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거니까.

다들 날 때부터 회사원은 아니었으니까.

너도 처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어차피 이번 생은 다들 처음이니."

다들 후회 없이 놀아라 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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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거니?
송정림 지음, 채소 그림 / 꼼지락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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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간직하고픈 시간은

아주 평범한 시간이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행복하다는 느낌조차 없는 시간이다."


읽으며 새벽안개에 젖는 것 같기도 했고깊은 물 속으로 침잠하는 것 같기도 했다.

행복에 대해삶에 대해사람에 대해사랑에 대해 귓가에 노래하듯 속삭이는 것 같던 책이었다.

행복과 삶과 사람과 사랑생각만 해도가만히 읊조리기만 해도 마음 한구석에 온기가 고이는 단어 아니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언어로만 채워진 책이런 책 한 권쯤은 책장에 꽂아 두면 좋지 않을까매일 집에 돌아왔을 때맞아 줄 사람은 없더라도 맞아 줄 책은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에세이이다그러나 예쁜 글씨체로 줄을 맞춰 배열되어 있고언어가 꼭 시어 같아 시집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모든 글마다 중요한 부분에 밑줄과 색이 입혀져 있는데단순히 단색이 아닌 그라데이션을 그린다신경을 많이 쓴 책 같다는 느낌이 들어 읽는 내내 흡족했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색연필 그림도 분위기와 참 잘 어울린다중간중간 색지와 함께 등장하는 색연필 풍의 작화가 한층 감성을 고조하고 책에 미적인 감각을 더한다.


"생의 암호는 단 하나.

닥치고 견디기.

아무 기대도 없이

그저 오늘을 견디기.

 

인생을 살아온 수많은 이들이

써내려간 철학서와 문학은

우리에게 이런 힌트를 준다.

기껏 그래봤자 선택은 두 가지 중에 하나일 뿐.

 

눈물 젖은 빵이거나,

맨땅에 헤딩이거나.

 

그러니 두려울 것 없는 인생이라고."


서평을 쓸 때는 느낌과 동시에 객관적인 분석과 비평도 넣으려 노력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자꾸 그러기가 싫어졌다.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말고 한 번쯤은 감성에 푹 젖어보고 싶었다.

'메지나'라는 만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두 날개로 나는 새다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날 수 없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대사인데이 책을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가끔은 날개를 쉬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는 갈수록 휴식에 인색해진다.

육체의 휴식이든 마음의 휴식이든휴식은 일보다 훨씬 중독성 있어서 잠시 발만 담그고 빨리 돌아와서전력으로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내가 충분히 기력을 회복할 만큼 세상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기에.

그럴 거라면어차피 마음껏 쉴 수 없다면이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쉴 수 없을까.

이 글에 기대고 싶어져서 끊임없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여기서 다리를 쉬고자 주저앉아버리면 다시는 일어나 달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러니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은 공감도 하고눈물도 흘리고잔잔한 미소도 짓고그렇게 크게 한숨 내쉴 만큼의 여유를 가지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으면 한다.

 

저자는 사랑과 이별의 감정도 다양한 언어를 써서 다채롭게 그려낸다.

나는 아직 사랑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이별도 해 본 적이 없지만,

저자처럼 솔직히 슬퍼하고 마음껏 처연했으면 한다그리고 아름다웠으면 한다.

어쩌면 비웃을지도 모르겠다그런 이별 따위는 세상에 없다고.

뭐 어떤가해보지 않았으니 환상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차가운 겨울날 뜨는 해를 바라볼 때,

봄의 한가운데 햇볕이 머리 위로 드리워질 때,

빗소리가 귓바퀴를 두드릴 때,

이제 막 터지려는 꽃봉오리를 볼 때,

길거리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

어쩐지 행복해질 것 같을 때,

그 때 이 책이 떠오를 것 같다.

지난날을 다 잊어버리게 하는 술이 있다면
그 술은 금방 동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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