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 또한 최종 학력을 기준으로 했을 때 청년 졸업자는 470만 6,000명이었는데, 그중 3분의 1이 넘는 154만 8,000명이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결과도 함께 발표되었다. 심지어 27만 8,000명은 무려 3년이 넘도록 취직을 하지 못했다. 청년들이 첫 직장을 얻기까지는 평균 10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그렇게 얻은 첫번째 일자리의 약 3분의 1은 1년이하의 단기계약직이었다. 만약 계약이 연장되지 않는다면 이들은 1년뒤 다시 구직자가 되거나, 아니면 실직자가 될 것이다. 1년마다 생존을고민해야 하는 주기 속에서 청년들이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

통계청은 국제노동기구의 기준을 따라 주 1시간 이상만 일하면 취업자로 정의한다.또한 수입이 없더라도 가족의 사업을 돕고 있거나 일시적인 이유로 휴직 중이라면 모두 취업자로 집계된다.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실업률이체감 실업률보다 훨씬 낮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쉬었음 인구‘는 이런 사례를모두 제외하고도 구직 활동을 하지 않는 경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경제 활동 능력이 있는데도 뚜렷한 이유 없이 취업도 하지 않고 당장의 구직 의사도 없는 이들이 ‘쉬었음 인구‘로 분류된다.
전통적으로 이 카테고리로 집계되는 이들은 명예퇴직이나 조기퇴직이후 딱히 다른 직장을 찾지 않는 60대 노년층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의 충격파가 시작되었던 2020년 3월, 20대의 ‘쉬었음 인구‘가 사상 최초로 40만명을 돌파하더니, 그 이후로 매월 증가 추세를 보이며 2021년1월에는 46만명으로 다시 최고치를 뛰어넘었다. 

청년들의 자조와 냉소, 혹은 분노와 좌절이 담긴 ‘노오력‘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런 경험에서 나온다. 고도성장기에 청년 시절을 보내며 국가와 함께 동반 성장하는 경험을 했던 이들이 기억하는 20대와 오랜 저성장 사회에서 단 한번도 경제적 호황을 누려보지 못한 채 그저 일다운 일을 찾기 위해 계속 달려온 이들이 경험한 20대는 전혀 다른 세계다. 

마땅히 기대해왔던 사회적·경제적 특권을 보장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이들의 억울함, 박탈감, 피해의식은 한국 사회에서도 관찰된다. 문제는 한국 정치가 이 같은 불안한 마음의 근본적 요인과 구조적 기원을 탐색하려 애쓰기보다 오히려 이런 심리를 적극 이용하면서 사회 갈등을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가이 스탠딩 Guy Standing은 이 계층을 국가 및시장과 안정적인 사회계약을 맺지 못한 사람들, 정당한 사회적 지위를보장받지 못한 사람들, 존재론적 불안이 일상이 되어버린 사람들이라고 기술한다.단순히 저임금 노동자 또는 단기 노동자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뜻이다

첫째, 디지털 경제와 포스트휴먼posthuman 사회의 도래로 인해 광범위한 수준에서 인간의 노동력과 노동 가치가 재평가되며,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직무를 대체하거나 또는 인간과 협업하게 된다.

둘째,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탄소중립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산업 구조와 노동 시장이 인위적으로 재조정될 수 있다. 탄소중립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탄소 산업의 비중을 줄어야 한다. 또한 그외의 산업 분야에서도 탄소배출을 감소시킴과 동시에 재생에너지및 친환경 산업을 빠른 속도로 확장해야 한다.

불안정 취약계층은 이 같은 전방위적 변화에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없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이들은 불필요 계층the wanocesalian, 즉 기계에 의해 진면 대체되어도 별문제 없는 ‘잉여 계층‘으로 간주될 것이다." 불안정 변동성은 민 미래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우리는 예기치 못한 팬데믹으로 인해 인간의 노동권과 노동 가치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이해하게 됐다. 


고용 불안정, 직무 불안정, 불안정 변동성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시급한 문제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앞으로도 장기간 마주해야 하는 문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역량은 온전히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장기적 비전도, 구조적인 해결책도 없이 많은 이들이 공정 경쟁과 능력주의 실현이 마치 위기 해결을 위한 최선의 방안인것처럼,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핵심 가치인 것처럼 외쳐댈 뿐이다. 

그는 공정성을 매개로 한 당시 미국의 사회적 담론을 세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개인 책임individual responsibility ("네가 진 빚은 네 책임이지."), 둘째 각자도생 bootstrap mentality ("나도 노력한 거야. 너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어."), 셋째고통감내의 원칙 sufferance doctrine ("나 여기까지 오려고 죽도록 고생했어. 너도 고생 좀 해야지.")이다. 한국 사회의 공정 경쟁, 각자도생, 능력주의 논리와놀랍도록 닮아 있지 않은가?

기업 중심적 사고와 담론이 사회 전체에서 지배 원리로 통용되면서, 공적영역에 속한 제도들 역시 기업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정부기관의 민영화,대학의 시장화와 같은 현상이 그것이다. 개인들도 마찬가지로 생산성, 효율성, 자기계발, 시간 관리, 이윤 추구와 같은 기업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놓고 자신의 일상을 계획하게 된다. 이런 현상을 통틀어 기업에 의한 삶의 식민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남들이 놀 때 열심히 자기계발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파편적 진실만을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뛰고 있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시대가 요구하는 노동과 능력에 따라 누구든 잉여 계층이 될 수도, 혹은 불안정 취약계층이 될 수도있기 때문이다. 공정성을 무기화하는 이들의논리가 위험한 이유는 자신과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을 손쉽게 타자화 및 적대시하고, 그들의 생존 기반을 거부하며(예: 정규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기여와 조력 없이도 우리 사회가 문제없이 돌아갈 것이라는 인식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개별주의적 존재론individualistic ontology 은 한국 사회의 분열과 경쟁을 더욱악화시킬 뿐 아니라 불평등을 정당화한다.이런 존재론적 기반으로는어떤 사회도 지속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경쟁, 불평등, 각자도생의 고리를 끊어낼 수 없을까? 이 질문에 함께 답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살고싶은 세계를 다시 그리기 위해 ‘공정‘을 넘어 새로운 대안 가치들을 탐색해보고자 한다.

기업주의형 존재론

자기 자신을 인적 자원으로 간주하고 언제나 자기계발에 매진함으로써 스스로의 시장 가치를 끝없이 재조정하는 삶의 양식이다

관련된 세부 논의들은 우리의 눈 밖으로 밀려나고, ‘이것이 공정인가‘라는 질문만 남아 사람들의 감정을 압도적으로자극한다. 이 막강한 중력파는 우리 사회의 담론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인국공의 정규직 전환 정책에 절망했던 청년들은 어쩌면 ‘로또취업방지법‘이라는 이름만으로도 크게 열광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정말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담았을 것이라고 믿었을 수도 있다. 저런 식으로 법안을 찍어낼 것이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청년들의 절망과 기대를 이용해 그들의 지지와 환호를 얻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인지 묻고 싶다. 뻔한 이야기를 ‘공정‘의 이름으로 과대포장한 법안으로 청년들의 환심을 사고 불공정에 대한 억울함,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반감 을들의 대립만 계속 증폭시키는 정치가 어떻게 청년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을까. ‘인공 정규직이라는 자격‘이 청년들에게왜 그토록 중요해졌는지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볼 생각은 해봤을까?

예를 들어, ‘공정‘뿐만 아니라 분명히 ‘평등‘이나 ‘정의‘와 같은다른 가치체계로 접근하는 것도 가능한데 오직 공정성만 적합한 프레임인 것처럼 여겨지고 이와 다른 목소리는 주류 담론장에 아예 끼어들지도 못하게 된다. 결국 생산적 갈등, 다양한 의견의 교환, 새로운 의미의생산은 불가능해진다.
이처럼 특정 집단에 의해 의미의 체계적 왜곡systemic distorrion이 일어나는 현상을 담론적 폐쇄discursive closure 라고 한다. 여기서 특정 집단은 해당 사안의 이해관계를 고려했을 때 주로 기득권을 선점하고 있는 집단을 뜻한다. 예컨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논쟁에서는 이미 정규직을확보한 사람들, ‘공공의대 설립‘ 논쟁에서는 이미 의사 국가 시험에 합격

폐쇄적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 매커니즘

1.자격박탈.
불공정의 수혜를 입은 자들이 논의에 참여할 자격 박탈.
인국공 사태의 경우 비정규직

2.자연화
기존의 사회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대로 지키는 것이 오히려 정당하다고 평가

3.가치중립화
기득권의 주장은 실제로는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논리임에도
각종 수사 동원하여 사회 안정을 위한 것이라 주장.

의사정원확대 논란 시 개업시 먹고 살기 힘들까봐,아무나 이런 자격 주면 안된다는 사회적지위.경제적 이익을 걱정하는 움직임
그러나 공정성 잃을까 우려된다며 호소

4.주제회피
공정 불공정 표현 나오는 순간 실질적 논의 불가.

5.정당화
개별사안을 추상적 가치 혹은 거대 담론과 즉각적으로 연결시킴
으로써 해당 주장을 옳은 것으로 정당화하고 대항 담론의 형성 억제하는 전략.
반공 애국 성장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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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성공‘을 하려면,
누군가를 돌보지 않아야 한다. ‘성공한 사람들 중 돌봄 책임을다하며,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자신의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이로부터 무수한 돌봄을 받고 의존은 하되, 자신의 돌봄책임은 평생 누군가에게 전가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기존의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이 임금노동은 하지만가사노동은 하지 않는 남성을 표준 시민으로 설계한 것이라면,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은 임금노동도 하고 가사노동도하는 여성을 표준 시민으로 설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집 밖에서는 임금노동을, 집 안에서는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시민을보편으로 설정해서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본질적으로 상호 의존적 존재로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누구나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며, 시민의 핵심 자격요건에 돌봄 수행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돌봄이 필요한 몸은 열등한 몸이 아니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돌봄을 원한다! 돌봄에는 시장이 아니라 국가가 필요하다! 돌봄의 공공성 강화하라! [생활동반자법」 제정하라! 가족이 아닌 개인을 전제로 돌봄을 제도화하라! 1인 가구를 위한 돌봄제도를 강화하라! 독박돌봄이 아닌 평등한 돌봄을 원한다! 돌봄의 성별성을 해체하라! 안전하고 정의로운 돌봄노동 환경을 마련하라! 돌봄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적절한 임금을 지급하라! 돌봄 노동자의 국적에 따른 차별 철폐하라! 자본은 재생산 비용을 지불하라! 돌보고 연대하는 삶을위해 노동시간 단축하라! 괴물 같은 성장이 아니라 탈성장과돌봄을 원한다! 돌봄을 중심으로 체제를 전환하자!"

돌봄의 공공성은 국가의 역할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되레 거대 국가를 강조하는 담론은 경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탈가족, 탈시장, 탈국가적 돌봄영역을 작게라도 지속적으로 구축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

돌봄이 노동이 될 때
: 사회적 돌봄노동의 현실과 과제

오승은(민주노총 부설 민주노동연구원 연구위원)

가족 내 여성 구성원이 아니고는 누구와도분담하지 못했던 돌봄을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에게맡기게 되면서 발생하는 긴장과 불안, 기대, 그리고억압은 돌봄위기의 새로운 증상이 되었다.

이처럼 여성에게 가족 돌봄을 강요하는 불평등한 현실은 여성이 단시간노동을 선호한다는 근거로 이용되며, 돌봄노동자를 낮은 임금이나 임금을 빼앗기는 노동조건으로 간편하게 몰아넣고 있다. 결국 가족 돌봄이 여성의 일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압력은 가족 바깥의 돌봄 일자리마저 여성의 노동으로 채울 뿐 아니라, 그 처우를 저해하는 가장 확실한 핑계로까지 활용되는 셈이다.

장기요양제도는 공적 재원이 투입되고 국가가 이용자와 노동자의 자격을 관리하며 여러 지침을 정한다는 점에서분명 사회적 돌봄이다. 하지만 정작 그 돌봄이 이뤄지는 현장을 들여다보면 이렇게나 개인적이다. 이용자와 노동자를 덜컥만나게 하고 덩그러니 남겨두니 ‘복불복 돌봄‘과 다름없다. 돌봄시설의 아동학대나 노인학대, 돌봄 이용자의 ‘갑질‘ 사건이때마다 언론에 보도되는 와중에도 돌봄 이용자와 노동자가 정작 어떠한 기준과 누구의 책임 아래 서로 신뢰 관계를 맺을 수있는지는 관심을 받지 못한다. 나는 이제껏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이 서로 좋은 마음으로 눈치껏, 요령껏 맞추며 도우라는 식으로 정부가 사회적 돌봄을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돌봄은 한국사회에서 단 한순간도 사회적이었던 적이 없다.

돌봄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는데 왜 돌봄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자는 목소리에는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을까? 첫 단추부터 돌아봐야 한다. 저출생과 고령화가 가속되자 급한 대로 "여성의 돌봄 걱정을 덜어주자"라며 급격히 시행한 것이 지금의 사회적 돌봄제도이다. 더좋은 돌봄을 위해 가족, 직장, 지역 등 사회 전반의 정책을 함께 바꿔나가려는 고민과 시도는 없이 그저 여성이 떠맡던 돌봄의 일부를 다른 여성에게 외주화하고 국가가 그 비용을 충당하는 가장 손쉬운 카드를 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서비스 제공과 고용의 책임을 민간에 떠넘김으로써 사회적 돌봄을 시장화하기도 했다. 이때, 민간사업자들은 인건비와 급식비를 아껴 수익을 남긴다. 부족한 지원과 부당한 대우로 요약되는 가족 돌봄의 문제와 소규모사업장에 흔히 나타나는나쁜 노동조건이 사회적 돌봄 일자리로 고스란히 전이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오랫동안 집 안에 갇혀 여성에게 짊어졌던 돌봄이 갑자기 임금노동이 되면서 그 노동자는 엄마, 아내, 딸의 역할을 일정 시간 대행하는 사람, 그래서 ‘가족처럼‘ 일하도록 얼마든지요구받고 감시당하고 통제될 수 있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되었다. 

사회적 돌봄은 ‘엄마‘의 확장이나 돌봄 이용자와 노동자 간의 개별 관계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사회적관계이자 사회적 실천, 그 자체로 조망되어야 한다.

돌봄은 경쟁중심사회를 끝장내고 젠더, 인종, 기후 정의에 다가가는, 밀려난 연대의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핵심 가치이자 실천으로 조명된다. 돌봄을 집집마다덜어줘야 할 ‘걱정거리‘로 바라보기를 멈추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제안이다. 돌봄으로 체제를 바꾸고 지구를 구하자는 외침이 지금 세계 곳곳에 퍼지고 있다.

<의료>

의료에는 돌봄이 없다
: 시장과 상품을 넘어, 돌봄을 회복한 새로운 의료

김창엽(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시민건강연구소 이사장)


의료는 돌봄과는 다른 것으로 분리되었으며돌봄은 사소하고 의미 없는 일, 무가치한 일혹은 아예 없는 일처럼 여겨진다.문제는 병원과 의사만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환자와 그의 가족들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교육>

돌봄 없이는 교육도 없다
: 교육과 돌봄의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학교‘를 상상하기

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스스로 서서 서로를 돕는 교육"은
"서로를 도와서 스스로 서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참된 돌봄의 관계 속에서만 참된 교육과인간의 성장이 가능하다.

돌봄교실 지자체 이전 찬반 토론회를 마치고 나니 교사가 갑이면 돌봄 전담사가 을, 학부모가 갑이면 학교는 을이었다. 그날의 장면은, 교육이 서비스산업이 되면서 공교육 안에서도 교육 주체들의 관계가 서비스 공급자와 소비자로 변형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신분처럼 나눠진 ‘노동신분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급할 때 기댈 수 있는 곳, 엄마들의 세계에선 그 장치를 ‘쿠션‘이라고 불렀다. 대부분 그 쿠션은 여자들의 사적관계에 대한 의존이었다.
누구나 기댈 수 있는 ‘사회적 쿠션‘이 필요했지만, 우리는 그걸 만들지 못했다. 경제가 성장하고, OECD에 가입하고,이제는 선진국 대열에 오른 국가가 되었다고 하지만, 돌봄은아직도 전쟁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교육목표에도 ‘돌봄‘을넣어본 적이 없다. 교육의 목표는 언제나 인재 양성이었다. 사람이 곧 자원이고 인재를 키워야 나라가 산다는 ‘자원빈국의성장전략‘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지만, 그 ‘인재상‘에 ‘잘 돌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라는 널리 알려진 교육학적 명제에 나오는 그 마을이 돌봄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간과한다. 교육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의 이름조차 ‘교육인적자원부‘인 나라이니, 그런 사고방식 속에서 돌봄은 계속 교육에서 외부화될 수밖에 없다.

사람을 사회의 ‘인적자원‘으로 본다는 것은 자연을 경제성장에 필요한 ‘물질자원‘으로 규정하고 대해왔던 것과 같은방식으로 인간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추출과 채굴, 전유에 기반한 약탈 경제에는 돌봄의 세계관이 없다. 

환경 경제학에서 ‘외부화externalization‘ 개념을 설명할 때,
흔히 ‘개수대의 비유‘를 사용한다. 우리는 개수대에서 물을 틀고 사용하면서도 쏟아지는 물이 어디서 오는지, 다 쓴 물이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는다. 외부로 내보내면 어딘가에서 다시 정화되어 깨끗한 물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이치‘라고 생각한다. 생산 영역에서 자연을 외부화하고 자연의 무상노동을당연한 듯 공짜로 전유했듯이, 재생산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마다 공장으로 콸콸 쏟아져 오는 노동자들은 하루의 노동을 끝내면 다시 어디로 흘러들어 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씻고 쉬는 걸까? ‘사회의 재생산을 위한 교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침이면 말간 얼굴로 학교에 쏟아져 들어온 어린이들은 일과가 끝나면 지친 얼굴로 쏟아져 나갔다가 어딘가에서 먹고 자고 쉬고 난 후에 다음 날 아침 학교로 돌아온다. 노동자든 아이들이든 어딘가로 내보내기만 하면 다시 살아 돌아오는 마법 같은 일은 누가 담당하고 있었을까? 기업과 사회가무상으로 전유해 온 돌봄노동이 없었다면, 고용도 교육도 가능하지 않다. 지금까지의 성장과 교육 모델은 전적으로 돌봄을 무상으로 착취하고 무가치화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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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나 산소처럼 돌봄역시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임에도 이토록 저평가된 배경에는 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을 분리하고 재생산노동을 여성에게 떠넘겨 온 역사의 흐름이 있었다. 근대적 인간관과 독립성의 강조에서 인간의 의존은 벗어나거나 극복해야 할 숙제로 여겨졌다. 성장 및 개발중심사회는 무한히 노동할 수 있는 몸을 추앙하면서, 적극적으로 의존하는 몸을 쓸모없는 몸으로 규정해 왔다. 돌봄노동을 저임금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평가가 필수적이다. 전지구적으로확대되고 있는 돌봄위기는 기존의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인류의 지속이 가능하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인간과 자연간의 돌봄 부정의를 해소해 나가기 위해서는 인간 세계에 돌봄 정의를 세우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들은 돌봄을 ‘노동‘으로 명명하고, 돌봄노동을개인 간의 사랑과 헌신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만들었다. 즉, 누군가를 보살피고 돌보는 일은 여성의 생물학적 본능이나 필연적인 노동이 아님을 선언하며, 돌봄노동을 자연화하고 탈가치화해 왔던 역사에 저항했다.

1972년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캠페인‘을 펼친 페미니스트 학자 실비아 페데리치 SilviaFederici는 "그들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부불노동unpaid work (돈을 지불하지 않는 노동)이라고 말한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과정에서 돌봄노동의 의미나 성별화된 현실에 대한 대안적 모색, 돌봄중심사회에 대한 논의들은 뒤로한 채 돌봄의사회화가 시장화 형태로 진행됐다.
그리고 그 결과, 돌봄은빈곤층 여성에게 저임금으로 외주화되었다. 돌봄노동은 여성과 남성 간에 민주적으로 재분배되지 않고, 저소득 여성과 고소득 여성 간에 재분배되는 현실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젠더 질서와 계층구조를 유지하고 공고히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랫동안 페미니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돌봄노동의 가치 재평가와불평등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면서, 돌봄노동을 시장화(상품화) 방식으로 사회화한다면 새로운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돌봄을 혐오하는 사회에 살게 된 것 같다. 물론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이 돌봄의 보편성이나 필수노동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이 든 부모,어린 자녀,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이들을 돌보는 노동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점점 더 품게 된 것 같다. 그러니까나는 하기 싫고, 누군가 저비용으로 알아서 해주었으면 하는일, 그것이 돌봄이 처해 있는 정직한 현실 아닐까? 하지만 인간은 돌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확장되고 타인에 대한 연민과 연대감이 깊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돌봄의 기쁨이 복원되는 사회가 돌봄이 살아 있는 사회일 것이다. 따라서 돌봄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적극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무엇에 어떤가치를 부여해 왔는지, 그 가치체계를 묻는 근원적 질문이기도 하다.

<질병> 염윤선(선천성 심장질환자, 간헐적 노동자)
나의 장애는 몇 점인가요?
: 제도안의 돌봄 공백과 폭력

이 글을 통해 제도적 돌봄의 부실함과 그에 따라 환자와 환자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국가의 ‘생애 설계 예측‘과 다른 시간을 산다. 그래서 제도내 장애인이 되어야 장애인 생활보호체계 내에 속할 수 있다.
아직 부족하고 많은 개선이 필요한 복지이지만, 나 또한 제도내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장애인에게 허락된 휴학 횟수와 장애인에게 배정된 휴학 횟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면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물론 ‘장애 극복 서사‘를 써 내려가는장애인들도 있지만, 절대다수의 장애인은 장애의무고용제도에 벌이를 의존해야 한다.

내가 충족하지 못한 것은 ‘입원 횟수‘였다. 매번 생사를 걸고 수없이 응급실을 찾았지만, 늘 당일 퇴원을 하였기에부정맥이 아무리 많이 왔어도 단 1건도 입원 횟수로 인정되지않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부정맥이 와서 응급실에 간 다음 전기충격기로 맥을 정상 상태로 되돌린 후에, 그래도 병동입원을 하겠다고 주장하여 2~3일간입원하고, 다시 그 과정을 9개월 내에 두 번 더 반복하여 3회의입원 횟수를 채워야 한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부정맥이 와서 응급실에 간 다음 전기충격기로 맥을 정상 상태로 되돌린 후에, 그래도 병동입원을 하겠다고 주장하여 2~3일간입원하고, 다시 그 과정을 9개월 내에 두 번 더 반복하여 3회의입원 횟수를 채워야 한다. 

심장에 무리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이 과정은 나의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모욕이었다. 이렇게 해서 재심사를 두 번 연속 통과하고 나서야, 나는 영구장애인이 되어 더 이상 재심사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부모님은 영구 3급이라도 되었으니 이것으로 감사하자고 한다. 실제로 나 또한 어떤 면에서는 감사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언제나 장애등급 판정이 스스로를 모욕하고 나의 마음과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내어 이루어진 것임을 잊지 않고(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약자들이 그러하듯, 아픈 사람이나질환자는 세상과 단절되는 느낌을 ‘언어의 부재‘에서 가장 통렬히 느낀다. 자신의 상황을, 고통을 비명으로밖에 표현하지못할 때, 그러니까 자신이 가진 언어가 어떤 의미도 없는 비명밖에 없을 때, ‘나‘는 기존 사회에 속할 수 없는 이질적 존재이자, 이상적인 인간성이 결여된 존재가 된다. 

질환자는 자신의 존재자체에 낯선 느낌을 받는다. 몸이예기치 못하게 아프다, 안아프다 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해주는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이 답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썼던 글에서 내 몸을 "시간이 드나드는 몸"이라고 정의했다. 우리사회의 의료현장에서 가장 지배적인 담론인 ‘치료‘ 서사에 나를 맡기면, 내 몸은 그에 맞춰분절되고 파편화된다. 내가 나를 컨트롤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아픈 몸을 넘어서 나의 실존을 불안하게 만든다.

나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서사를 쓰고, 그 이야기를 계기로 연결되었으면 한다. 처음에는 단지 비명밖에 기록할 수없다고 해도, 이야기함으로써 다시 조직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질환자들의 이야기들이 모이고, 우리 사회가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의료의 주체인 질환자, 돌봄 당사자, 의료종사자 간에 더 건강한 관계가정립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정신장애 >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
: 강제 입원이 아닌, 저항과 대안의 돌봄 박목우(조현 당사자, 동료 상담가)

제도로서의 정신의학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한다.
정신의학적 현실"은 가장 관습적인 조건에서 정의된다.관습을 좇지 않는 극적인 삶의 선택은 빈번하게 정신병질환의 증거로 인용된다.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는 아내,"커밍아웃" 하기 등 이 모든 것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위기이지만, 그것은 과연 의료적인 문제인가? 이러한 상황에 정신의학이 연루되면, 이는 의학보다는 명백하게 도덕을 다루는 것에 훨씬 더 가깝다. 반항적인 사람을 아픈 사람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한 그의 인식, 즉 그의 개인적 현실을 무효로 만든다. (…) 정신의학적 레이블링으로 가장 연약한 관계자의 개인적인 인식을 무효화하는 것은 의학 용어라는 가면을 쓴 순응에 대한 요구이다.

지금까지의 정신의학 시스템은 전문가, 다시 말해 정신과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이 주축이 되어 당사자들에게필요한 서비스와 치료를 독점하여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정신건강 시스템 안에서 생겨나는 이 냉담한 거리는, 당사자와 전문가 간에 의미 있는 인간적 접촉이 형성되는 것을 방해한다.여기에 평등은 없다. 이것은 당사자의 염려를 빼앗아 그들 대신 염려를 떠맡는 방식이다.

"정신장애인 당사자주의는 기존 정신의학 중심의 의학모델이나 재활모델과는 실천적 접근에 있어서 결이 다른 새로운패러다임"이라고 소개한다. 전문가와 환자라는 전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정신장애인의 능력과 잠재력에 대한 신뢰, 정신장애인이 서비스를 선택할 권리와 책임을 강조한다. 

당사자의 삶에 있어 염려를 되찾는 것은 비단 당사자의자기결정권을 강화하자는 말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에서 우러나오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뜻하기도 한다.

정신의학에서는 환자에게 진단을 내릴 때, 환자의 이야기를 모두 증상으로 해석한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는 ‘나는 이러한 사람이다‘라는 자기 이야기를 상실하게 된다. 자기 삶의가치나 목표를 가지고 자기 정체성을 구성했던 과거로부터 갑작스럽게 단절되며, 공허하고 무의미한의학적 객관 앞에 던져진다. 따라서 환자에게 대안적인 돌봄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처한 어려움을 그의 삶 전체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열망하고 존경하는 가치들과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삶의 목적들에 비추어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민은 치유자와 상처받은 자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그것은 평등한 사람들 간의 관계이다. 우리 자신의 어두움을잘 알고 있을 때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어두움과 함께 있을수 있다. 우리가 공유된 인간성을 인식할 때 비로소 연민은 현실이 된다

의료협동조합 살림의원의 장창현 원장이 번역한『비판정신의학』말미에는 보통 ‘광기‘로 불리는 상태를 ‘신경 다양성‘으로 다시 고쳐 쓰자고 주장한 활동가 다리엔 레이철 웰치Darien Rachel Welch의 말이 등장한다.
저는 받아들여짐의 반대편에 있는 삶을 경험할 기회가있다는 데에 신경 다양성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경 다양성은 당신이 고장 났고, 손보아야 할 대상이라고 계속해서 강요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갖고 노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 행동의 표준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이 얼마나 결함이 있으며 위험한지 인식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경 다양성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순응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그들 자신이 당당한 인간으로 일어서는과정을 지켜봅니다.

<장애>
장애를 중심에 둔 돌봄사회
: 팬데믹과 장애인의 ‘돌봄‘ 그리고 불능화
전근배(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나는 팬데믹에서 드러난 장애인의 돌봄 단절과 의료 공백이 어떤 개별적인 서비스나 제도들의 불충분함에서 기인하는 것, 그러니까 감염병의 대유행이라는 전례 없는 변수로 인하여 발생한 특수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 사회가 일정한 합의로 구축해온 기존 돌봄 시스템에 내재된 폐단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며, 시스템을 설계하고, 가동하고,정당화하는 데 기여해 온 ‘돌봄 윤리‘가 정상적으로 그 역할을했을 따름이다. 

‘장애인 모순‘
: ‘장애인‘이라 쓰고 ‘후 순위‘라 읽는다
코로나19 위기가 개별 인간의 건강문제를 넘어 정확하게는 ‘인간‘과 ‘사회‘ 그 자체를 공격하고 드러낼 것이라던 UN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한국은 물론 여러 나라에서 이미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장벽을 경험해 온 장애인은 코로나19 시기에 더욱 주변화되었으며, 더욱 심화된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놓였다. 

‘장애인‘이 된다는 것은 필요한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받는 일이 아니라 ‘특정한 등록 집단만의 문제‘로 장애문제가 협소해지고, ‘덜 중요한 존재‘로 낙인찍히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재난 시에 더 심각해지는 이유는 재난이심화되어서라기보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를 정의하고 등록하는 목적 자체가 본래의 의도(가령, ‘별도 취급)대로 원활히 작동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 ‘돌봄사회‘를 설계할 때 ‘장애‘를 어떻게 사회계약의 예외 조항처럼 별도취급하지 않으며 대안적으로 포착하고 다룰 수 있을지 물음을던진다.

별도 취급의 구체적인 방식은 무엇보다 자본주의 효율성 원칙에 따라 구축되었다 우리 사회가 오랜 기간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돌봄의 종착지‘ 또는 ‘돌봄의 종말지‘는 시설이었다. 어떠한 이유로든 취약해진 몸들이 시장경제의 운영에 방해가되지 않도록,
그 가족들이 원활히 경제 전선에 뛰어들 수 있도록 지정된 장소에 취약한 몸을 밀어 넣어 배치했다. 이들은 구획된 장소에서 (그곳으로 보낸 이들이 덜 미안할 정도의)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받으며 살았다. 국가는 민간을 통해, 민간은 집단수용이라는방식을 통해 가장 적은 돈으로 가능한 한 많은 몸들을 관리하고자 했다.

"역사적으로 장애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개인의 선택과 통제의 권리를 부정당해 왔다. 많은 장애인이 스스로 선택한 지역사회에서 자립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지원제도는 이용할 수 없거나 특정 거주 조건에 묶여 있고,
지역사회 인프라는 보편적으로 설계되지 않는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발하는 게아니라, 시설에만 자원이 투자된다. 이는 유기, 가족에의 의존,
시설화, 고립, 분리로 이어졌다."

사라져 발생하는 것으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지않고 별도 취급하는 것이 바탕이 된 돌봄 윤리는 결국 모든 시민이 아닌 ‘그래도 되는 존재들‘에 대한 문제로 축소되었다.

"돌봄은 곧 부양"으로 납작해지는 현실은 너무나 당연하게 당사자의 서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돌보는 행위 이외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방식의 장애인 돌봄은 ‘돌봄을 제공하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를 구분하고 전자를 권력화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많은 반민주주의적 행태가 그러하듯 돌봄의 권력화는 돌봄의 주체를 ‘권리를 지닌 자‘에서 ‘권리 실현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로 역전시켰으며, ‘돌봄받을 권리를 지닌 자‘에게서 시민의 자격을 박탈했다.

 ‘돌봄‘은 그 자체가 무조건적으로 선하다는 인식을 은연중에 내포함으로써 돌봄의내용과 방식에 대한 고민을 간과하게 만들 수 있다. 장애인을 관리하는 일정한규범적 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현재 제도의 내용과 방식,그로 인한 관행들이 막연히 ‘선‘의 이미지로 은폐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장애인‘ 모순, 시설화 돌봄, 돌봄의 권력화는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 되어서 마치 그것이 장애인에게내재하는 ‘특성‘이자 장애인을 대하는 돌봄의 ‘전문성‘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장애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인것처럼 장애인의 돌봄 역시 모든 인간 돌봄의 미래이다. 장애인의 돌봄 현실이 결국 우리 사회의 돌봄 현실이자, ‘비장애인‘다수가 겪을 돌봄의 미래를 예고한다(이것은 장애등록 여부와는 관계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돌봄은 어떻게 구상되어야 할까? 나는 ‘돌봄 대상자‘를 별도로 규정하여 취급하지 않으며 (또는 가능한 한 보편화하며), 돌봄을 구현하는 가장 정의로운 방식을 찾고,
돌봄에 내재해 있는 지금의 권력관계를 인정하여 오히려 평등하게 갈등할 수 있는 관계를 재구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장애인‘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장애‘는 기존의 등록 장애의 기준을 지칭하는 것이아니라 보편적인 생의 조건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몸의현실을 말한다. "우리 모두 장애인이 될 수 있다"라는 가정이아니라,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며, 반드시 장애인이 된다"라는의미이다.

시버스는 ‘건강함‘ 혹은 ‘비장애 상태‘는 기껏해야 인간의 임시적인 정체성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장애‘를 인종,
젠더와 마찬가지로 사회 분석을 위한 하나의 틀로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손상과 장애를 서로 교통 가능한 범주로 바라보며, 인간 모두에 속한 보편적 문제로서 장애를 바라보는접근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범주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흩트리는 것이며, 이러한 접근은 특정한 몸만을 선별하고 때로는 배제하는 이데올로기를 분석함으로써 ‘사회적 몸‘을 확장한다.

이 노골적이며 거친 현실, 몸의 일상,‘건강한 사람‘이 거의 상상하지도 못할 물질성을경험하는 신체가 ‘예외적‘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사회를 설계하는 데 중심으로 설정될 때,그 경험을 통해 발견되는 장애화 요인을제거해 나가며 인간 모두가 보다 유리한 생존을담보할 수 있게 된다.

‘장애‘를 중심으로 돌봄사회를 구상하는 일은 결국 장애인으로 등록된 사람들의 문제를 인간 보편의 필연적인 문제로 직시하는 일이며, 자연의 필연이자 인간 세계의 수많은 우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야 스스로의자기 보존과 더 큰 완전성에 유리해질 수 있는 것인가를 탐구하는 일이다.

* 일부러 ‘유리한 생존‘이라는 표현을 쓴다. 돌봄은 도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생명의 조건에 유리한 원리여야 한다. 가령, 장애인을 고려하는 방역체계는 도덕적으로그것이 옳기 때문에 추가적인 비용을 투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모든 몸들을 고려해 나가는 방역의 설계가 애당초 사회 전체의 유지와 인간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안전‘과 ‘정의‘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워야 더 안전하다. 나는 ‘돌봄사회‘에 관한 논의가 고고해서는 안 되며, 돌봄 윤리 혹은 돌봄 정의 역시 매우세속적이어야만 사회를 바꾸는 힘이 조직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권리>

의존과 질병의 ‘정상성‘
: ‘셀프서비스‘의 시대에서 돌봄이 흐르는 사회로

조한진희(다른몸들 활동가)

민원을 제기한 당시 <한겨레>에 <잘 아플 권리>라는 칼럼을 연재하던 중이었고, 해당 지면에 민원 제출 내용을 언급하며 사회적 이슈화를 시도했다. 그 덕분인지 한국철도공사 사장의 지시라며 곧장 면담을 요청해 왔다. 여러 차례 논의 끝에 결국 2021년 7월 청량리역에알기 쉬운 표지판이 설치됐으며 안내데스크 운영을 시작했다. 이는 나 같은 이들뿐 아니라 노인, 경계성 발달장애인, 이주민, 비서울지역시민 등의 이동권이 다소나마 나아졌음을의미한다. 살아 있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동한다. 그 이동은 단순히 물리적 움직임 자체를넘어서, 시민으로서 사회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동 정의 Mobility Justice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삶의 가능성과 시민권을 제한한다는 뜻이다.
*

"셀프서비스가 손상을 장애로 만든다"라고 답하며 웃는다. 이말은 "손상은 손상일 뿐인데 특정한 조건이 손상을 장애로 만든다"라는 장애인권운동의 오래된 구호를 적용한 것이다.

누구나 무언가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나같은 청인들은음성언어에 의존하고, 농인들은 문자나 수어에 의존한다. 

그런데 특정 의존 행위 혹은 의존하지 못하는 행위는‘문제‘가 된다. 나 같은 청인이 음성언어에 의존하는 것은 ‘정상‘으로 여겨져 소리 없이 방송되는 드라마는 곧 ‘사고‘이지만,문자나 수어에 의존하는 농인들에게 자막이나 수어통역이 제공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의 ‘의존‘이다. 그래서 수어나 자막이 제공되더라도 권리가 아니라 시혜로서 주어지고, 예산이나 상황에 따라 언제든 제공되지 않을수 있는 ‘선택지‘로 남는다.

돌봄에 의존하는 것이 강한 남성성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주장도 사실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 혼자서는 넥타이도제대로 못 매는 남편을 위해 아내가 아침마다 넥타이를 매주고, 아내가 건네주는 영양제를 입에 털어 넣고, 집을 나설 때는아내가 신기 편한 방향으로 놓아준 구두를 신고 출근하는 모습. 이는 남성성 훼손이 아니라, 남성 혹은 남편으로 ‘대우받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강조하지만 특정 의존만이 문제가된다. 문제는 의존하고 돌봄받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돌봄을둘러싼 권력과 통제권이 그 핵심이다.

의존과 자립에 관해 일본의 경제학자 나카무라 히사시는 "많은 사람에게 의존해야 자립할 수 있으며, 다양한의존이 가능해야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연결해서 일본 도쿄대학교 교수이자 뇌성마비장애인 구마가야 신이치로熊谷晉-3의 말을 살펴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이 장애인용으로 되어 있지 않으니 장애인은 의존할 수 있는 것이 무척 적습니다. 장애인이 너무 의존하는 게 아니라 의존할 게 부족하기 때문에 자립이 어려운 겁니다. 인간은 약함을 서로 보충하고 의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서 강해졌어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를 잘 돌보는 사회가 좋은사회이다"라는 말은 재사유되어야 한다. 이 말은 코로나19 초기 청도대남병원 등에서 발생한 집단감염과 장애인 돌봄 공백등이 드러나면서 사회적으로 새삼 강조된 말이었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사회에 필요한 말이다. 그러나 보호는통제를 동반한다. 보호 담론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상‘에서 비켜난 모든 몸들을 약자화하는 현실을 ‘문제화‘해야한다. 우리는 이제 그 너머를 질문해야 한다. 어떤 조건이 특정존재를 약자로 만드는가? 약자를 약자로 만들지 않는 사회는어떻게 가능한가?

건강권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하면 인류가 더 건강한 삶을영위하도록 할 것인가에 있다면, 질병권은 아픈 몸을 극복하지 않거나 못해도 어떻게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아픈 몸이 기본값인 사회를 주장한다. 질병권은 아픈 몸이 예외와 특수가 아닌 보편이자 정상임을 주장하며, 아픈 몸을 기본으로 사회를 설계할 때 모두에게 더 이롭고 편리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본다. 

질병권에서는 인류 역사에서 질병과 아픈 이들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그에 대한 사회적태도는 시대마다 달랐음을 주시한다. 과거 질병은 불운으로 여겨졌지만, 현재 질병은 실패가 됐다. 즉, 건강이 스펙의 한 요소가 되면서, 질병이 건강관리의 실패로 규정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산재, 기후위기, 성폭력과 성차별, 관리되지 않는 유해물질, 극심한 빈부격차, 차별과 같은 ‘독성물질‘로 인해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 그런데 의료비 보장률은 OECD 국가 중 바닥이고 여전히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이동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의료비이다. 노동시간은 세계적으로 길고 산재는 빈번하며, 유급병가 없는 회사가 상당수이고, 상병 수당도 아직 제도화되지 않아서 아파도 일해야 하고 일해서 더 아프게 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결국 건강하기도 아프기도 힘든 사회이다. ‘질병권‘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동녘, 2019)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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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상에서 누가 어떻게 돌볼 것인가는 복잡한 정치적 문제이고, 많은 이에게 돌봄은 여전히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주제이다. 시장화된 돌봄과 취약한 돌봄의 공공성, 여전히 강고한 돌봄의 성별성,돌봄이 보편이 아닌 특수로 규정되는 현실, 사회적으로 저평가된 돌봄의 가치, 돌봄노동자의 저임금과 낮은 처우 등은 제대로 된 돌봄을 수행하는 것도, 받는것도 어렵게 만든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는 누군가를 돌볼수록 그 자신도 취약해지는 구조에 놓이게 된다. 

공적제도로서 돌봄이 보장되고, 제도가 다 수행할 수 없는 돌봄이 가족 내에서 성별과 상관없이 민주적으로분배되고, 돌봄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게 평가되며, 돌보는 사람도 적절한 쉼과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사회 안에서는 돌봄노동이 마모의 과정이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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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인권이라는 단어들이 정치와 경제, 사회전반에서 세력을 장악한 시대가 계속되면서 정의의 주체는
‘나‘ 자신이다. 내가 옳은 것이 옳은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나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행동 규범을 이끌어왔던 보편적 ‘덕virtue‘의 정의는 변질되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새로운 덕의 정의가 계속 확장된다.

목적론과 계급구조로부터 해방된 개별적 도덕 주체는 스스로를 자신의 도덕적 권위의 주권자로 생각하거나, 도덕적 철학자들에 의해 그러한 것으로 여겨진다. (…) 이 호소는 정말 개인적 욕망과 의지의 도구로 나타날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도덕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목적으로한다"라는 제러미 밴덤의 공리주의의 모순을 지적한다. 공리주의를 쉽게 말한다면 모든 사람이 최대로 행복해지는 것이고이것이 사회의 윤리적 기준(덕)의 목표라는 것이다. 개인행동의 윤리적 기초는 이익과 쾌락의 추구라는 공리에서 추론됐다. 자본주의의 근본원리가 된 이 공리주의로 인해 고통은 철저히 배격되기 시작했고, 고통과 불행은 인간의 삶에서 제거돼야 할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의 실현은 개인의 사익 추구를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의 원리와 배치된다는사실이 드러났다. 이 모순이 같은 공리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발견되면서 그 의미가 상실된다. 신기한 것은 밀이 이같은 공리주의의 모순을 발견한 것이 그가 신경쇠약‘을 겪고난 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경쇠약을 통해 개인의 쾌락과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적 공리의 실현이 불가능한 ‘지역‘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 추구라는 자본주의 개념의 사회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자들의 삶은 제외되었다. 밀은 신경쇠약증을 앓는 중에 제어할 수 없는 고통의 존재가 삶에 확연히포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고통은 제거의 대상이 되는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삶에도 포함된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뇌기능장애자,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치료와 돌봄은 무너지는 가족제도를 복원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들과 그 가족들은 서로의 운명을 짊어진 채, 서로의 십자가들을 지고 대답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때때로 이 선한 싸움은 패배와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후에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이 이 싸움의 목적이다.

그는 항상 웃고 즐거워했다. 삶의 새로운 기쁨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성진의 부모는 그를 통해 성장했다. 장애자인 아들이 저렇게 밝은 삶을 이루어가는데 온몸과 정신이 멀쩡한우리가 불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
"불행은 개인의 주관적 느낌일 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성진이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성진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불행한 것이었습니다."
·처되어야

점점 어두워지는 혼돈 속에서 그 원래의 뜻을 잃어버린단어들이 있다. 법률적인 단어와 의학적인 단어들이 혼용되면서 서로 경계를 넘나드는 비슷한 부류의 단어들이 됐다. 병자와 죄인과 악인이다.
죄인과 악인의 구분이 모호하고, 악인과 병자의 구분이모호하다. 죄인은 병자는 아니다. 죄인은 법적 혹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고, 병자는 의학적 의미이다. 죄인이 악인이 아닐수가 있고, 악인이 죄인이 아닐 수가 있다. 선한 사람이 죄인이되는 경우가 있듯이, 역으로 극악한 악인이면서 죄인으로 벌받지 않은 사람도 무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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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는 그의 유명한 책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에서 나병 환자와 고통의 관계를 묘사했다. 고통은 ‘신체에 이상이 있다, 이에 대한 대처나 치료를 해야 한다‘
는 신호로서 고통이 없이는 신체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고, 생명의 유지에 필수적인 활동도 불가능하다. 얀시는 인도의 나병 환자 병원에서 일하는 브랜드 박사가 나병 환자를 통해 깨달은 통증의 병리학을 통해 고통은 인생에게 영적으로 축복으로 다가온다는 메시지를 설파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화가 났을 때 분노를 표출한다. 그러나NPD들은 우월성 superiority의 과시와 함께 분노를 쏟아낸다.
(…) 그들은 어떤 때 스스로의 분노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격한 분노의 장광설 외침 중에서도 "나는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니야!"라고 소리친다. NPD들이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것을 회피하는 극단적인 상태이다.
호인 아버지의 경우는 나르시시즘의 지배자적 증상, 그리고 감정이나 그 표현을 두려워하는 ‘감정공포emotion phobia‘ 증상이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의 느낌이나 고통에 대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거나 느끼지 않는 상태로서 감정표현에 두려움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아들의 고통이나 상한 감정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그의 ‘감정공포‘는 그 자신 속에 있는 실패에대한 두려움이나 공포이기도 했다. 그는 이 공포를 아들에 대한 우월성으로 표출했고, 폭언과 폭력으로 바꾸어 표현했다.그리고 아들의 병을 계속 악화시켰다.

케임브리지 대학과 하버드 대학의 정신과 병원 의사와 교수를 지냈던 크레이그 맬킨 박사는 그의 책 《나르시시즘 다시생각하기》에서 우리 주변 곳곳에 숨어 있는 나르시시스트에대해 말해주고 있다. 깜찍하고 예쁜 연인에서 유능한 직장상사, 가장 가까운 가족 구성원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 ‘잠복‘해 있는 유해한 NPD 환자들은 우리 예상을 뛰어넘어 의외로많다. 맬킨 박사는 배우자나 동료, 가족들이나 자신에게서 다음과 같은 징후가 있을 때 주저하지 말고 즉시 대처 방안을 세울 것을 권고한다.
- 나에 대한 감정적·신체적 학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사람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 
병이나 실직, 알코올 중독 같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이 병들지 않았다거나 괜찮다며 처한 위험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부정할 때
- 다른 사람들을 조정하며 자기의 우월성과 남을 이용하는조작자 manipulator로 드러날 때(이런 사람들은 강한 공격성으로도나타난다)- 

치료나 개선을 위한 변화를 거부하며 자신의 감정을 속이거나 드러내는 것을 막을 때

어떤 경우 며칠씩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분노와 퇴행의 불안함으로 이동한 것을 뜻한다) 비난이나 무관심으로 주변을 어둡게 만들 때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함께 고통을
붙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한 것이다.
구원은 기억에 달려 있다.

미로슬라브 볼프

"착하고 예민하고 똑똑한 아이들에게 뇌질환이 잘 찾아옵니다. 발병해서 저희 정신건강가족미션에 찾아오는 청년들이 대부분 뛰어난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들 청년은 마음이 고와서 불만이나 미움, 고통을 밖으로 내어놓거나 발산하지 못하고 자신 안에 쌓아갑니다. 마음의 병은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로 깊이 축적되고,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인해 뇌기능장애로 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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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선서문에서 천명하는 바와 같이 검사는 불의의 어둠을걷어내는 용기,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함,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함을 갖추어야 하고, 스스로에게 더엄격해야 합니다. 그런 검사임을 전제로 주권자는 검찰권을 검찰에 부여했지요. 만약 현실의 검사가 선서와 다르다면, 이런검사들이 검찰권을 감당할 자격이 있을까요.
검찰은 정권 교체 때마다 변신하며 권력의 총애를 받거나 여론의 환호를 받아 검찰권 사수에 성공하곤 했습니다.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넘도록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 역시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언제까지 속으시겠습니까. 이제라도 검찰의 화려한 분장술 너머의 진실을 직시하고 검찰권을 나누고견제하는 개혁이 조속히 추진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검찰은 수뇌부의 결정에 대동단결하고 일치단결하기를 원할 뿐결이 다른 목소리를 참지 못합니다. 검찰의 위상과 권한 사수를 최우선시하다 보니, 수사권 조정 등 정부 방침과 대립할 때도 국가공무원 신분을 망각한 채 집단행동을 불사하며 이탈자를 용납하지 못하지요.

내부 고발자의 역할은 세례요한처럼 ‘외치는 자의 소리‘가되어 잠든 동료들을 깨우고, 세상에 알려 잠든 척하는 사람들마저 억지로 눈을 뜨게 만드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검찰 내부를 들여다보려 해도, 검찰은 수사 기밀 등 각종 핑계를 대며 자료를 숨기며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검찰이 보여주는 자료만으로는 법과 원칙을 실제로 지켰는지를 확인하기 어렵지요. 제 능력이 부족하여 이런 검찰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검찰의 곪은 부위를 세상에 드러내는, 검찰을 비추는 CCTV가 될 각오로 공익 신고와 고발을 하고 있습니다. 법과 제도를 바꾸고 고치는 것은 검찰권을 검찰에 위임한 시민과 사회, 국회와 정부의 몫입니다. 어떻게 고치시겠습니까?

보수 언론은 검찰 수뇌부의 말을 속기사인양 그대로 받아쓰며 저를 매도하기에 급급했고, 진보 언론 역시 법령을 뒤져보는 수고를 게을리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기자들이 형사소송법, 검찰청법 등을 확인하고 제대로 취재했다면, "검사는 법에 따라 무죄 구형을 해야 하는 것이니, 백지 구형을 지시하고 검사의 이의 제기를 묵살했던 간부들을 중징계해야 한다"고 검찰을 비판했겠지요. 그러나 보수 언론은 황당했고, 진보 언론은 태만했습니다.

공익의 대표자여야 할 검찰이나 사회의 공기인 언론이 부조리의 데칼코마니 같다는 건 비극입니다.
권력자에 대한 질문은 언론의 권리이자 의무지요. 또한, 언론은 시민인 독자에게 답하고 오보 피해자에게 사과할 의무 역시 있습니다. 이에 묻습니다. 왜곡하거나 부풀리는 등 편파적이거나 불공정하게 취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권력의 감시자인양하다가 권력화하지 않았습니까.
언론에게 언론다움을 요구합니다.

사설 논조가 미안했나 봅니다. 《조선일보》 기자가 서울중앙지검 공판부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내용이 마음에 걸리겠지만, 1등 신문의 새해 첫 사설에 이름이 나온 거다. 그걸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 좋게 생각해 달라." 욱하는 마음을 누르며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기다리고계시다. 부모님이 너무 괴로워하신다."
1등 신문이 궤변과 오보를 늘어놓으면, 펜이 칼이 되어 1등살인 신문이 됩니다. 그 기자들에게 ‘지금 피 흘리는 사람들이보이지 않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그 기자가법조 출입 말진이기도 했고, 미안해했으니까요.

다만 오보의 피해자이자 독자로서,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언론 종사자에게 고언을 드립니다. 확인과 검증을소홀히 한 채 보도자료를 베끼고 특정 취재원이 불러주는 대로쓰면 기자라 하겠습니까. 언론의 사명과 책임을 늘 기억해 주십시오.

문재인 정부에서 공수처 도입 등 가시적인 성과가 없지는 않았지만, 사건 배당 제도 개선 등 법무검찰개혁위원회에서의 여러 권고가 검찰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검찰이 반대하는 부분이 검찰의 급소입니다. 검찰이 찬성하는 것만 바꾸고서야 개혁이라 하겠습니까? 검찰의 저울이 고장 나 있다는 것을기억해 주십시오. 저울을 고치라고 계속 외쳐주십시오. 검찰이고치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으면, 더는 고장 나지 않을 테고, 편향적이고 불공정한 검찰권 행사를 다소나마 주저하지 않겠습니까?

몇 년 전, "십 원짜리 사건에 십 원어치의, 천 원짜리 사건에 천원어치의 공력을 기울이라"고 훈시하던 검사장이 있었습니다.
가격을 매기는 기준이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회의만 길어질듯해 말을 삼켰지요. 반부패부(구 특수부)는 한정 수량 명품 생산 부서, 형사부는 염가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부서로 비유한 간부도 있었습니다. 한정 생산 명품에 불량률은 왜 그리높은 거냐고, 형사부에 배당된 사건 당사자가 그 말에 수긍하겠느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역시 삼켰습니다. 현실 앞에선덧없는 이상론에 불과하니까요.

지휘·감독권과 직무 이전권은 검찰 수뇌부에게 최강의 절대반지입니다. 상급자의 지시를 기꺼이 따르는 성실함과 책임감으로충만한 검사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양심 있는 검사가 난관을 돌파할 방법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습니다.

"특수부 검찰만 들어갔다 나오면 모두 마법에 걸려 딴사람이 되어 나오니 정말 안타깝고, 두렵다. 슬프다. 하지만 증인도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그 내용을 조금도 동의하거나 인정할 수 없다"고 비감에 찬 비망록을 작성했지요. 

 2008년 "무죄판결이나도 좋으니 〈PD수첩> 제작진을 기소하라"고 지시하던 검찰수뇌부가 검사 선서> 문구를 확정했지요. 그 검찰 수뇌부에게<검사 선서>의 다짐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검사 선서>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주권자의 관심과 비판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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