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나 산소처럼 돌봄역시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임에도 이토록 저평가된 배경에는 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을 분리하고 재생산노동을 여성에게 떠넘겨 온 역사의 흐름이 있었다. 근대적 인간관과 독립성의 강조에서 인간의 의존은 벗어나거나 극복해야 할 숙제로 여겨졌다. 성장 및 개발중심사회는 무한히 노동할 수 있는 몸을 추앙하면서, 적극적으로 의존하는 몸을 쓸모없는 몸으로 규정해 왔다. 돌봄노동을 저임금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평가가 필수적이다. 전지구적으로확대되고 있는 돌봄위기는 기존의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인류의 지속이 가능하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인간과 자연간의 돌봄 부정의를 해소해 나가기 위해서는 인간 세계에 돌봄 정의를 세우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들은 돌봄을 ‘노동‘으로 명명하고, 돌봄노동을개인 간의 사랑과 헌신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만들었다. 즉, 누군가를 보살피고 돌보는 일은 여성의 생물학적 본능이나 필연적인 노동이 아님을 선언하며, 돌봄노동을 자연화하고 탈가치화해 왔던 역사에 저항했다.
1972년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캠페인‘을 펼친 페미니스트 학자 실비아 페데리치 SilviaFederici는 "그들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부불노동unpaid work (돈을 지불하지 않는 노동)이라고 말한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과정에서 돌봄노동의 의미나 성별화된 현실에 대한 대안적 모색, 돌봄중심사회에 대한 논의들은 뒤로한 채 돌봄의사회화가 시장화 형태로 진행됐다. 그리고 그 결과, 돌봄은빈곤층 여성에게 저임금으로 외주화되었다. 돌봄노동은 여성과 남성 간에 민주적으로 재분배되지 않고, 저소득 여성과 고소득 여성 간에 재분배되는 현실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젠더 질서와 계층구조를 유지하고 공고히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랫동안 페미니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돌봄노동의 가치 재평가와불평등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면서, 돌봄노동을 시장화(상품화) 방식으로 사회화한다면 새로운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돌봄을 혐오하는 사회에 살게 된 것 같다. 물론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이 돌봄의 보편성이나 필수노동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이 든 부모,어린 자녀,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이들을 돌보는 노동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점점 더 품게 된 것 같다. 그러니까나는 하기 싫고, 누군가 저비용으로 알아서 해주었으면 하는일, 그것이 돌봄이 처해 있는 정직한 현실 아닐까? 하지만 인간은 돌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확장되고 타인에 대한 연민과 연대감이 깊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돌봄의 기쁨이 복원되는 사회가 돌봄이 살아 있는 사회일 것이다. 따라서 돌봄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적극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무엇에 어떤가치를 부여해 왔는지, 그 가치체계를 묻는 근원적 질문이기도 하다.
<질병> 염윤선(선천성 심장질환자, 간헐적 노동자) 나의 장애는 몇 점인가요? : 제도안의 돌봄 공백과 폭력
이 글을 통해 제도적 돌봄의 부실함과 그에 따라 환자와 환자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국가의 ‘생애 설계 예측‘과 다른 시간을 산다. 그래서 제도내 장애인이 되어야 장애인 생활보호체계 내에 속할 수 있다. 아직 부족하고 많은 개선이 필요한 복지이지만, 나 또한 제도내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장애인에게 허락된 휴학 횟수와 장애인에게 배정된 휴학 횟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면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물론 ‘장애 극복 서사‘를 써 내려가는장애인들도 있지만, 절대다수의 장애인은 장애의무고용제도에 벌이를 의존해야 한다.
내가 충족하지 못한 것은 ‘입원 횟수‘였다. 매번 생사를 걸고 수없이 응급실을 찾았지만, 늘 당일 퇴원을 하였기에부정맥이 아무리 많이 왔어도 단 1건도 입원 횟수로 인정되지않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부정맥이 와서 응급실에 간 다음 전기충격기로 맥을 정상 상태로 되돌린 후에, 그래도 병동입원을 하겠다고 주장하여 2~3일간입원하고, 다시 그 과정을 9개월 내에 두 번 더 반복하여 3회의입원 횟수를 채워야 한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부정맥이 와서 응급실에 간 다음 전기충격기로 맥을 정상 상태로 되돌린 후에, 그래도 병동입원을 하겠다고 주장하여 2~3일간입원하고, 다시 그 과정을 9개월 내에 두 번 더 반복하여 3회의입원 횟수를 채워야 한다.
심장에 무리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이 과정은 나의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모욕이었다. 이렇게 해서 재심사를 두 번 연속 통과하고 나서야, 나는 영구장애인이 되어 더 이상 재심사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부모님은 영구 3급이라도 되었으니 이것으로 감사하자고 한다. 실제로 나 또한 어떤 면에서는 감사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언제나 장애등급 판정이 스스로를 모욕하고 나의 마음과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내어 이루어진 것임을 잊지 않고(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약자들이 그러하듯, 아픈 사람이나질환자는 세상과 단절되는 느낌을 ‘언어의 부재‘에서 가장 통렬히 느낀다. 자신의 상황을, 고통을 비명으로밖에 표현하지못할 때, 그러니까 자신이 가진 언어가 어떤 의미도 없는 비명밖에 없을 때, ‘나‘는 기존 사회에 속할 수 없는 이질적 존재이자, 이상적인 인간성이 결여된 존재가 된다.
질환자는 자신의 존재자체에 낯선 느낌을 받는다. 몸이예기치 못하게 아프다, 안아프다 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해주는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이 답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썼던 글에서 내 몸을 "시간이 드나드는 몸"이라고 정의했다. 우리사회의 의료현장에서 가장 지배적인 담론인 ‘치료‘ 서사에 나를 맡기면, 내 몸은 그에 맞춰분절되고 파편화된다. 내가 나를 컨트롤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아픈 몸을 넘어서 나의 실존을 불안하게 만든다.
나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서사를 쓰고, 그 이야기를 계기로 연결되었으면 한다. 처음에는 단지 비명밖에 기록할 수없다고 해도, 이야기함으로써 다시 조직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질환자들의 이야기들이 모이고, 우리 사회가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의료의 주체인 질환자, 돌봄 당사자, 의료종사자 간에 더 건강한 관계가정립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정신장애 >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 : 강제 입원이 아닌, 저항과 대안의 돌봄 박목우(조현 당사자, 동료 상담가)
제도로서의 정신의학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한다. 정신의학적 현실"은 가장 관습적인 조건에서 정의된다.관습을 좇지 않는 극적인 삶의 선택은 빈번하게 정신병질환의 증거로 인용된다.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는 아내,"커밍아웃" 하기 등 이 모든 것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위기이지만, 그것은 과연 의료적인 문제인가? 이러한 상황에 정신의학이 연루되면, 이는 의학보다는 명백하게 도덕을 다루는 것에 훨씬 더 가깝다. 반항적인 사람을 아픈 사람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한 그의 인식, 즉 그의 개인적 현실을 무효로 만든다. (…) 정신의학적 레이블링으로 가장 연약한 관계자의 개인적인 인식을 무효화하는 것은 의학 용어라는 가면을 쓴 순응에 대한 요구이다.
지금까지의 정신의학 시스템은 전문가, 다시 말해 정신과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이 주축이 되어 당사자들에게필요한 서비스와 치료를 독점하여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정신건강 시스템 안에서 생겨나는 이 냉담한 거리는, 당사자와 전문가 간에 의미 있는 인간적 접촉이 형성되는 것을 방해한다.여기에 평등은 없다. 이것은 당사자의 염려를 빼앗아 그들 대신 염려를 떠맡는 방식이다.
"정신장애인 당사자주의는 기존 정신의학 중심의 의학모델이나 재활모델과는 실천적 접근에 있어서 결이 다른 새로운패러다임"이라고 소개한다. 전문가와 환자라는 전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정신장애인의 능력과 잠재력에 대한 신뢰, 정신장애인이 서비스를 선택할 권리와 책임을 강조한다.
당사자의 삶에 있어 염려를 되찾는 것은 비단 당사자의자기결정권을 강화하자는 말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에서 우러나오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뜻하기도 한다.
정신의학에서는 환자에게 진단을 내릴 때, 환자의 이야기를 모두 증상으로 해석한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는 ‘나는 이러한 사람이다‘라는 자기 이야기를 상실하게 된다. 자기 삶의가치나 목표를 가지고 자기 정체성을 구성했던 과거로부터 갑작스럽게 단절되며, 공허하고 무의미한의학적 객관 앞에 던져진다. 따라서 환자에게 대안적인 돌봄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처한 어려움을 그의 삶 전체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열망하고 존경하는 가치들과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삶의 목적들에 비추어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민은 치유자와 상처받은 자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그것은 평등한 사람들 간의 관계이다. 우리 자신의 어두움을잘 알고 있을 때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어두움과 함께 있을수 있다. 우리가 공유된 인간성을 인식할 때 비로소 연민은 현실이 된다
의료협동조합 살림의원의 장창현 원장이 번역한『비판정신의학』말미에는 보통 ‘광기‘로 불리는 상태를 ‘신경 다양성‘으로 다시 고쳐 쓰자고 주장한 활동가 다리엔 레이철 웰치Darien Rachel Welch의 말이 등장한다. 저는 받아들여짐의 반대편에 있는 삶을 경험할 기회가있다는 데에 신경 다양성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경 다양성은 당신이 고장 났고, 손보아야 할 대상이라고 계속해서 강요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갖고 노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 행동의 표준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이 얼마나 결함이 있으며 위험한지 인식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경 다양성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순응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그들 자신이 당당한 인간으로 일어서는과정을 지켜봅니다.
<장애> 장애를 중심에 둔 돌봄사회 : 팬데믹과 장애인의 ‘돌봄‘ 그리고 불능화 전근배(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나는 팬데믹에서 드러난 장애인의 돌봄 단절과 의료 공백이 어떤 개별적인 서비스나 제도들의 불충분함에서 기인하는 것, 그러니까 감염병의 대유행이라는 전례 없는 변수로 인하여 발생한 특수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 사회가 일정한 합의로 구축해온 기존 돌봄 시스템에 내재된 폐단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며, 시스템을 설계하고, 가동하고,정당화하는 데 기여해 온 ‘돌봄 윤리‘가 정상적으로 그 역할을했을 따름이다.
‘장애인 모순‘ : ‘장애인‘이라 쓰고 ‘후 순위‘라 읽는다 코로나19 위기가 개별 인간의 건강문제를 넘어 정확하게는 ‘인간‘과 ‘사회‘ 그 자체를 공격하고 드러낼 것이라던 UN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한국은 물론 여러 나라에서 이미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장벽을 경험해 온 장애인은 코로나19 시기에 더욱 주변화되었으며, 더욱 심화된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놓였다.
‘장애인‘이 된다는 것은 필요한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받는 일이 아니라 ‘특정한 등록 집단만의 문제‘로 장애문제가 협소해지고, ‘덜 중요한 존재‘로 낙인찍히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재난 시에 더 심각해지는 이유는 재난이심화되어서라기보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를 정의하고 등록하는 목적 자체가 본래의 의도(가령, ‘별도 취급)대로 원활히 작동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 ‘돌봄사회‘를 설계할 때 ‘장애‘를 어떻게 사회계약의 예외 조항처럼 별도취급하지 않으며 대안적으로 포착하고 다룰 수 있을지 물음을던진다.
별도 취급의 구체적인 방식은 무엇보다 자본주의 효율성 원칙에 따라 구축되었다 우리 사회가 오랜 기간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돌봄의 종착지‘ 또는 ‘돌봄의 종말지‘는 시설이었다. 어떠한 이유로든 취약해진 몸들이 시장경제의 운영에 방해가되지 않도록, 그 가족들이 원활히 경제 전선에 뛰어들 수 있도록 지정된 장소에 취약한 몸을 밀어 넣어 배치했다. 이들은 구획된 장소에서 (그곳으로 보낸 이들이 덜 미안할 정도의)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받으며 살았다. 국가는 민간을 통해, 민간은 집단수용이라는방식을 통해 가장 적은 돈으로 가능한 한 많은 몸들을 관리하고자 했다.
"역사적으로 장애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개인의 선택과 통제의 권리를 부정당해 왔다. 많은 장애인이 스스로 선택한 지역사회에서 자립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지원제도는 이용할 수 없거나 특정 거주 조건에 묶여 있고, 지역사회 인프라는 보편적으로 설계되지 않는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발하는 게아니라, 시설에만 자원이 투자된다. 이는 유기, 가족에의 의존, 시설화, 고립, 분리로 이어졌다."
사라져 발생하는 것으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지않고 별도 취급하는 것이 바탕이 된 돌봄 윤리는 결국 모든 시민이 아닌 ‘그래도 되는 존재들‘에 대한 문제로 축소되었다.
"돌봄은 곧 부양"으로 납작해지는 현실은 너무나 당연하게 당사자의 서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돌보는 행위 이외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방식의 장애인 돌봄은 ‘돌봄을 제공하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를 구분하고 전자를 권력화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많은 반민주주의적 행태가 그러하듯 돌봄의 권력화는 돌봄의 주체를 ‘권리를 지닌 자‘에서 ‘권리 실현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로 역전시켰으며, ‘돌봄받을 권리를 지닌 자‘에게서 시민의 자격을 박탈했다.
‘돌봄‘은 그 자체가 무조건적으로 선하다는 인식을 은연중에 내포함으로써 돌봄의내용과 방식에 대한 고민을 간과하게 만들 수 있다. 장애인을 관리하는 일정한규범적 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현재 제도의 내용과 방식,그로 인한 관행들이 막연히 ‘선‘의 이미지로 은폐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장애인‘ 모순, 시설화 돌봄, 돌봄의 권력화는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 되어서 마치 그것이 장애인에게내재하는 ‘특성‘이자 장애인을 대하는 돌봄의 ‘전문성‘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장애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인것처럼 장애인의 돌봄 역시 모든 인간 돌봄의 미래이다. 장애인의 돌봄 현실이 결국 우리 사회의 돌봄 현실이자, ‘비장애인‘다수가 겪을 돌봄의 미래를 예고한다(이것은 장애등록 여부와는 관계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돌봄은 어떻게 구상되어야 할까? 나는 ‘돌봄 대상자‘를 별도로 규정하여 취급하지 않으며 (또는 가능한 한 보편화하며), 돌봄을 구현하는 가장 정의로운 방식을 찾고, 돌봄에 내재해 있는 지금의 권력관계를 인정하여 오히려 평등하게 갈등할 수 있는 관계를 재구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장애인‘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장애‘는 기존의 등록 장애의 기준을 지칭하는 것이아니라 보편적인 생의 조건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몸의현실을 말한다. "우리 모두 장애인이 될 수 있다"라는 가정이아니라,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며, 반드시 장애인이 된다"라는의미이다.
시버스는 ‘건강함‘ 혹은 ‘비장애 상태‘는 기껏해야 인간의 임시적인 정체성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장애‘를 인종, 젠더와 마찬가지로 사회 분석을 위한 하나의 틀로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손상과 장애를 서로 교통 가능한 범주로 바라보며, 인간 모두에 속한 보편적 문제로서 장애를 바라보는접근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범주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흩트리는 것이며, 이러한 접근은 특정한 몸만을 선별하고 때로는 배제하는 이데올로기를 분석함으로써 ‘사회적 몸‘을 확장한다.
이 노골적이며 거친 현실, 몸의 일상,‘건강한 사람‘이 거의 상상하지도 못할 물질성을경험하는 신체가 ‘예외적‘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사회를 설계하는 데 중심으로 설정될 때,그 경험을 통해 발견되는 장애화 요인을제거해 나가며 인간 모두가 보다 유리한 생존을담보할 수 있게 된다.
‘장애‘를 중심으로 돌봄사회를 구상하는 일은 결국 장애인으로 등록된 사람들의 문제를 인간 보편의 필연적인 문제로 직시하는 일이며, 자연의 필연이자 인간 세계의 수많은 우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야 스스로의자기 보존과 더 큰 완전성에 유리해질 수 있는 것인가를 탐구하는 일이다.
* 일부러 ‘유리한 생존‘이라는 표현을 쓴다. 돌봄은 도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생명의 조건에 유리한 원리여야 한다. 가령, 장애인을 고려하는 방역체계는 도덕적으로그것이 옳기 때문에 추가적인 비용을 투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모든 몸들을 고려해 나가는 방역의 설계가 애당초 사회 전체의 유지와 인간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안전‘과 ‘정의‘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워야 더 안전하다. 나는 ‘돌봄사회‘에 관한 논의가 고고해서는 안 되며, 돌봄 윤리 혹은 돌봄 정의 역시 매우세속적이어야만 사회를 바꾸는 힘이 조직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권리>
의존과 질병의 ‘정상성‘ : ‘셀프서비스‘의 시대에서 돌봄이 흐르는 사회로
조한진희(다른몸들 활동가)
민원을 제기한 당시 <한겨레>에 <잘 아플 권리>라는 칼럼을 연재하던 중이었고, 해당 지면에 민원 제출 내용을 언급하며 사회적 이슈화를 시도했다. 그 덕분인지 한국철도공사 사장의 지시라며 곧장 면담을 요청해 왔다. 여러 차례 논의 끝에 결국 2021년 7월 청량리역에알기 쉬운 표지판이 설치됐으며 안내데스크 운영을 시작했다. 이는 나 같은 이들뿐 아니라 노인, 경계성 발달장애인, 이주민, 비서울지역시민 등의 이동권이 다소나마 나아졌음을의미한다. 살아 있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동한다. 그 이동은 단순히 물리적 움직임 자체를넘어서, 시민으로서 사회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동 정의 Mobility Justice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삶의 가능성과 시민권을 제한한다는 뜻이다. *
"셀프서비스가 손상을 장애로 만든다"라고 답하며 웃는다. 이말은 "손상은 손상일 뿐인데 특정한 조건이 손상을 장애로 만든다"라는 장애인권운동의 오래된 구호를 적용한 것이다.
누구나 무언가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나같은 청인들은음성언어에 의존하고, 농인들은 문자나 수어에 의존한다.
그런데 특정 의존 행위 혹은 의존하지 못하는 행위는‘문제‘가 된다. 나 같은 청인이 음성언어에 의존하는 것은 ‘정상‘으로 여겨져 소리 없이 방송되는 드라마는 곧 ‘사고‘이지만,문자나 수어에 의존하는 농인들에게 자막이나 수어통역이 제공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의 ‘의존‘이다. 그래서 수어나 자막이 제공되더라도 권리가 아니라 시혜로서 주어지고, 예산이나 상황에 따라 언제든 제공되지 않을수 있는 ‘선택지‘로 남는다.
돌봄에 의존하는 것이 강한 남성성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주장도 사실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 혼자서는 넥타이도제대로 못 매는 남편을 위해 아내가 아침마다 넥타이를 매주고, 아내가 건네주는 영양제를 입에 털어 넣고, 집을 나설 때는아내가 신기 편한 방향으로 놓아준 구두를 신고 출근하는 모습. 이는 남성성 훼손이 아니라, 남성 혹은 남편으로 ‘대우받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강조하지만 특정 의존만이 문제가된다. 문제는 의존하고 돌봄받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돌봄을둘러싼 권력과 통제권이 그 핵심이다.
의존과 자립에 관해 일본의 경제학자 나카무라 히사시는 "많은 사람에게 의존해야 자립할 수 있으며, 다양한의존이 가능해야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연결해서 일본 도쿄대학교 교수이자 뇌성마비장애인 구마가야 신이치로熊谷晉-3의 말을 살펴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이 장애인용으로 되어 있지 않으니 장애인은 의존할 수 있는 것이 무척 적습니다. 장애인이 너무 의존하는 게 아니라 의존할 게 부족하기 때문에 자립이 어려운 겁니다. 인간은 약함을 서로 보충하고 의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서 강해졌어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를 잘 돌보는 사회가 좋은사회이다"라는 말은 재사유되어야 한다. 이 말은 코로나19 초기 청도대남병원 등에서 발생한 집단감염과 장애인 돌봄 공백등이 드러나면서 사회적으로 새삼 강조된 말이었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사회에 필요한 말이다. 그러나 보호는통제를 동반한다. 보호 담론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상‘에서 비켜난 모든 몸들을 약자화하는 현실을 ‘문제화‘해야한다. 우리는 이제 그 너머를 질문해야 한다. 어떤 조건이 특정존재를 약자로 만드는가? 약자를 약자로 만들지 않는 사회는어떻게 가능한가?
건강권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하면 인류가 더 건강한 삶을영위하도록 할 것인가에 있다면, 질병권은 아픈 몸을 극복하지 않거나 못해도 어떻게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아픈 몸이 기본값인 사회를 주장한다. 질병권은 아픈 몸이 예외와 특수가 아닌 보편이자 정상임을 주장하며, 아픈 몸을 기본으로 사회를 설계할 때 모두에게 더 이롭고 편리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본다.
질병권에서는 인류 역사에서 질병과 아픈 이들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그에 대한 사회적태도는 시대마다 달랐음을 주시한다. 과거 질병은 불운으로 여겨졌지만, 현재 질병은 실패가 됐다. 즉, 건강이 스펙의 한 요소가 되면서, 질병이 건강관리의 실패로 규정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산재, 기후위기, 성폭력과 성차별, 관리되지 않는 유해물질, 극심한 빈부격차, 차별과 같은 ‘독성물질‘로 인해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 그런데 의료비 보장률은 OECD 국가 중 바닥이고 여전히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이동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의료비이다. 노동시간은 세계적으로 길고 산재는 빈번하며, 유급병가 없는 회사가 상당수이고, 상병 수당도 아직 제도화되지 않아서 아파도 일해야 하고 일해서 더 아프게 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결국 건강하기도 아프기도 힘든 사회이다. ‘질병권‘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동녘, 2019)를 참조하라. *
그러나 일상에서 누가 어떻게 돌볼 것인가는 복잡한 정치적 문제이고, 많은 이에게 돌봄은 여전히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주제이다. 시장화된 돌봄과 취약한 돌봄의 공공성, 여전히 강고한 돌봄의 성별성,돌봄이 보편이 아닌 특수로 규정되는 현실, 사회적으로 저평가된 돌봄의 가치, 돌봄노동자의 저임금과 낮은 처우 등은 제대로 된 돌봄을 수행하는 것도, 받는것도 어렵게 만든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는 누군가를 돌볼수록 그 자신도 취약해지는 구조에 놓이게 된다.
공적제도로서 돌봄이 보장되고, 제도가 다 수행할 수 없는 돌봄이 가족 내에서 성별과 상관없이 민주적으로분배되고, 돌봄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게 평가되며, 돌보는 사람도 적절한 쉼과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사회 안에서는 돌봄노동이 마모의 과정이 아닐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