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성공‘을 하려면,
누군가를 돌보지 않아야 한다. ‘성공한 사람들 중 돌봄 책임을다하며,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자신의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이로부터 무수한 돌봄을 받고 의존은 하되, 자신의 돌봄책임은 평생 누군가에게 전가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기존의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이 임금노동은 하지만가사노동은 하지 않는 남성을 표준 시민으로 설계한 것이라면,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은 임금노동도 하고 가사노동도하는 여성을 표준 시민으로 설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집 밖에서는 임금노동을, 집 안에서는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시민을보편으로 설정해서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본질적으로 상호 의존적 존재로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누구나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며, 시민의 핵심 자격요건에 돌봄 수행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돌봄이 필요한 몸은 열등한 몸이 아니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돌봄을 원한다! 돌봄에는 시장이 아니라 국가가 필요하다! 돌봄의 공공성 강화하라! [생활동반자법」 제정하라! 가족이 아닌 개인을 전제로 돌봄을 제도화하라! 1인 가구를 위한 돌봄제도를 강화하라! 독박돌봄이 아닌 평등한 돌봄을 원한다! 돌봄의 성별성을 해체하라! 안전하고 정의로운 돌봄노동 환경을 마련하라! 돌봄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적절한 임금을 지급하라! 돌봄 노동자의 국적에 따른 차별 철폐하라! 자본은 재생산 비용을 지불하라! 돌보고 연대하는 삶을위해 노동시간 단축하라! 괴물 같은 성장이 아니라 탈성장과돌봄을 원한다! 돌봄을 중심으로 체제를 전환하자!"

돌봄의 공공성은 국가의 역할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되레 거대 국가를 강조하는 담론은 경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탈가족, 탈시장, 탈국가적 돌봄영역을 작게라도 지속적으로 구축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

돌봄이 노동이 될 때
: 사회적 돌봄노동의 현실과 과제

오승은(민주노총 부설 민주노동연구원 연구위원)

가족 내 여성 구성원이 아니고는 누구와도분담하지 못했던 돌봄을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에게맡기게 되면서 발생하는 긴장과 불안, 기대, 그리고억압은 돌봄위기의 새로운 증상이 되었다.

이처럼 여성에게 가족 돌봄을 강요하는 불평등한 현실은 여성이 단시간노동을 선호한다는 근거로 이용되며, 돌봄노동자를 낮은 임금이나 임금을 빼앗기는 노동조건으로 간편하게 몰아넣고 있다. 결국 가족 돌봄이 여성의 일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압력은 가족 바깥의 돌봄 일자리마저 여성의 노동으로 채울 뿐 아니라, 그 처우를 저해하는 가장 확실한 핑계로까지 활용되는 셈이다.

장기요양제도는 공적 재원이 투입되고 국가가 이용자와 노동자의 자격을 관리하며 여러 지침을 정한다는 점에서분명 사회적 돌봄이다. 하지만 정작 그 돌봄이 이뤄지는 현장을 들여다보면 이렇게나 개인적이다. 이용자와 노동자를 덜컥만나게 하고 덩그러니 남겨두니 ‘복불복 돌봄‘과 다름없다. 돌봄시설의 아동학대나 노인학대, 돌봄 이용자의 ‘갑질‘ 사건이때마다 언론에 보도되는 와중에도 돌봄 이용자와 노동자가 정작 어떠한 기준과 누구의 책임 아래 서로 신뢰 관계를 맺을 수있는지는 관심을 받지 못한다. 나는 이제껏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이 서로 좋은 마음으로 눈치껏, 요령껏 맞추며 도우라는 식으로 정부가 사회적 돌봄을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돌봄은 한국사회에서 단 한순간도 사회적이었던 적이 없다.

돌봄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는데 왜 돌봄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자는 목소리에는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을까? 첫 단추부터 돌아봐야 한다. 저출생과 고령화가 가속되자 급한 대로 "여성의 돌봄 걱정을 덜어주자"라며 급격히 시행한 것이 지금의 사회적 돌봄제도이다. 더좋은 돌봄을 위해 가족, 직장, 지역 등 사회 전반의 정책을 함께 바꿔나가려는 고민과 시도는 없이 그저 여성이 떠맡던 돌봄의 일부를 다른 여성에게 외주화하고 국가가 그 비용을 충당하는 가장 손쉬운 카드를 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서비스 제공과 고용의 책임을 민간에 떠넘김으로써 사회적 돌봄을 시장화하기도 했다. 이때, 민간사업자들은 인건비와 급식비를 아껴 수익을 남긴다. 부족한 지원과 부당한 대우로 요약되는 가족 돌봄의 문제와 소규모사업장에 흔히 나타나는나쁜 노동조건이 사회적 돌봄 일자리로 고스란히 전이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오랫동안 집 안에 갇혀 여성에게 짊어졌던 돌봄이 갑자기 임금노동이 되면서 그 노동자는 엄마, 아내, 딸의 역할을 일정 시간 대행하는 사람, 그래서 ‘가족처럼‘ 일하도록 얼마든지요구받고 감시당하고 통제될 수 있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되었다. 

사회적 돌봄은 ‘엄마‘의 확장이나 돌봄 이용자와 노동자 간의 개별 관계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사회적관계이자 사회적 실천, 그 자체로 조망되어야 한다.

돌봄은 경쟁중심사회를 끝장내고 젠더, 인종, 기후 정의에 다가가는, 밀려난 연대의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핵심 가치이자 실천으로 조명된다. 돌봄을 집집마다덜어줘야 할 ‘걱정거리‘로 바라보기를 멈추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제안이다. 돌봄으로 체제를 바꾸고 지구를 구하자는 외침이 지금 세계 곳곳에 퍼지고 있다.

<의료>

의료에는 돌봄이 없다
: 시장과 상품을 넘어, 돌봄을 회복한 새로운 의료

김창엽(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시민건강연구소 이사장)


의료는 돌봄과는 다른 것으로 분리되었으며돌봄은 사소하고 의미 없는 일, 무가치한 일혹은 아예 없는 일처럼 여겨진다.문제는 병원과 의사만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환자와 그의 가족들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교육>

돌봄 없이는 교육도 없다
: 교육과 돌봄의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학교‘를 상상하기

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스스로 서서 서로를 돕는 교육"은
"서로를 도와서 스스로 서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참된 돌봄의 관계 속에서만 참된 교육과인간의 성장이 가능하다.

돌봄교실 지자체 이전 찬반 토론회를 마치고 나니 교사가 갑이면 돌봄 전담사가 을, 학부모가 갑이면 학교는 을이었다. 그날의 장면은, 교육이 서비스산업이 되면서 공교육 안에서도 교육 주체들의 관계가 서비스 공급자와 소비자로 변형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신분처럼 나눠진 ‘노동신분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급할 때 기댈 수 있는 곳, 엄마들의 세계에선 그 장치를 ‘쿠션‘이라고 불렀다. 대부분 그 쿠션은 여자들의 사적관계에 대한 의존이었다.
누구나 기댈 수 있는 ‘사회적 쿠션‘이 필요했지만, 우리는 그걸 만들지 못했다. 경제가 성장하고, OECD에 가입하고,이제는 선진국 대열에 오른 국가가 되었다고 하지만, 돌봄은아직도 전쟁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교육목표에도 ‘돌봄‘을넣어본 적이 없다. 교육의 목표는 언제나 인재 양성이었다. 사람이 곧 자원이고 인재를 키워야 나라가 산다는 ‘자원빈국의성장전략‘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지만, 그 ‘인재상‘에 ‘잘 돌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라는 널리 알려진 교육학적 명제에 나오는 그 마을이 돌봄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간과한다. 교육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의 이름조차 ‘교육인적자원부‘인 나라이니, 그런 사고방식 속에서 돌봄은 계속 교육에서 외부화될 수밖에 없다.

사람을 사회의 ‘인적자원‘으로 본다는 것은 자연을 경제성장에 필요한 ‘물질자원‘으로 규정하고 대해왔던 것과 같은방식으로 인간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추출과 채굴, 전유에 기반한 약탈 경제에는 돌봄의 세계관이 없다. 

환경 경제학에서 ‘외부화externalization‘ 개념을 설명할 때,
흔히 ‘개수대의 비유‘를 사용한다. 우리는 개수대에서 물을 틀고 사용하면서도 쏟아지는 물이 어디서 오는지, 다 쓴 물이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는다. 외부로 내보내면 어딘가에서 다시 정화되어 깨끗한 물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이치‘라고 생각한다. 생산 영역에서 자연을 외부화하고 자연의 무상노동을당연한 듯 공짜로 전유했듯이, 재생산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마다 공장으로 콸콸 쏟아져 오는 노동자들은 하루의 노동을 끝내면 다시 어디로 흘러들어 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씻고 쉬는 걸까? ‘사회의 재생산을 위한 교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침이면 말간 얼굴로 학교에 쏟아져 들어온 어린이들은 일과가 끝나면 지친 얼굴로 쏟아져 나갔다가 어딘가에서 먹고 자고 쉬고 난 후에 다음 날 아침 학교로 돌아온다. 노동자든 아이들이든 어딘가로 내보내기만 하면 다시 살아 돌아오는 마법 같은 일은 누가 담당하고 있었을까? 기업과 사회가무상으로 전유해 온 돌봄노동이 없었다면, 고용도 교육도 가능하지 않다. 지금까지의 성장과 교육 모델은 전적으로 돌봄을 무상으로 착취하고 무가치화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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