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소통도취와 정보 도취다. 정보 곧 반사물事物, Unding이 사물의 앞을 가로막고 사물을 완전히 빛바래게한다. 우리는 폭력의 지배가 아니라 정보의 지배 아래 산다. 정보의 지배는 자유로 가장된다.
오가와의 디스토피아와 달리 우리의 정보사회는 그리단조롭지 않다. 정보는 사건Ereignis 인 척한다.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 Reiz der Uberraschung을 먹고 산다. 그러나흥분은 오래가지 않는다. 금세 새로운 흥분을 향한 욕구가 생긴다. 우리는 흥분을, 놀람을 목적으로 실재를 지각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정보 사냥꾼으로서 우리는 고요하고 수수한 사물들을 곧 평범한 것들, 부수적인 것들, 혹은 통상적인 것들을 못 보게 된다. 자극성이 없지만 우리를 존재에 정박하는 것들을.
사물에서 반사물로
탈사물화 디지털세계 탈사실적 자극 문화에서 소통을 지배하는 것은 흥분과 감정이다. 매우 불안정.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인간의 삶을 안정화하는 모든 것은 시간집약적이다. 신뢰하기, 맹세하기, 책임지기, 충실, 결속, 결속, 의무 하염없이 머무르기 모두 시간 집약적 관행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두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우리는 차를 타고 온갖 곳으로 달려가지만farhen, 단 하나의 경험 Erfahrung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공동체에속하지 못한다. 우리는 엄청난 데이터를 저장하지만 기억을 되짚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와 팔로워를 쌓아가지만타자와 마주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정보는 존속과 지속이없는 삶꼴을 발전시킨다.
소유에세 체험으로
"내가 더 많이 소유할수록 나는 더 많이 존재한다"라는 오래된 소유격언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새로운 체험 격언은 이러하다. "내가 더 많이 체험할수록 나는더 많이 존재한다."
한 사물은 느낌과 기억을 담은 그릇이다. 오래 사용됨을통해 사물에 축적되는 역사는 사물에 영혼을 불어넣어 충심의 사물로 만든다. 그러나 오직 은은한 사물 diskrete Ding만 집약적인 리비도적 결속을 통해 충심의 사물로 살아날 수 있다. 오늘날의 소비재들은 은은하지 않다. 추근거리고 조잘거린다. 그것들은 미리 제작된 표상과감정을이미 너무 많이 담고 있다. 그 표상과 감정이 소비자에게봇물 터지듯 밀려든다. 소비자 자신의 삶은 그것들 안에거의 깃들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소유는 "사람이 사물과 맺을 수있는 가장 깊은 관계다."
스마트폰
스마트폰을 통한 소통은 탈신체화된 바라봄Blick이 없는 소통이다. 공동체는 신체적 차원을 지녔다. 신체성이빠져 있다는 점만으로도 디지털 소통은 공동체를 약화한다. 바라봄도 공동체를 굳건히 다진다. 디지털화는 바라봄으로서의 타인을 소멸시킨다. 바라봄의 부재는 디지털 시대에 공감의 상실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다. 심지어 어린아이도 바라봄을 허용받지 못한다. 어린아이를 돌보는사람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어머니의 바라봄에서 어린아이는 멈춤을, 자기입증Selbstbestätigung과 공동체를 발견한다. 바라봄이 근원적 신뢰를 건설한다. 바라봄의 결핍은 자기 및 타인과 맺는 관계의 장애를 유발한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우리의 지각을 그 장치에 위임한다. 우리는 그 화면을 통해실재를 지각한다. 그 디지털 창은 실재를 정보로 희석하고, 우리는 그 정보를 등록한다. 실재와의 사물적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실재는 ‘지금 여기에 있음 Prasenz‘을 박탈당한다. 우리는 실재의 물질적 울림 materielle Schwingung을 더는 지각하지 않는다. 지각은 탈신체화된다. 스마트폰은세계를 탈실재화한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플랫폼들은 새로운 영주들이다.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그들의 밭을 갈아 소중한 데이터를 생산하고, 그들은 그 데이터를 최대한으로 써먹는다. 우리는 철저히 착취당하고 감시당하고 조종당하는데도 자유롭다고 느낀다. 자유를 착취하는 시스템 안에서 저항은 형성되지 않는다. 지배가 자유와 합쳐지는 순간, 지배는 완성된다.
자폐적 대상은 이행 대상과 마찬가지로 결여된 모범인물의 대체물이지만 그 모범 인물을 대상화한다. 자폐적대상은 모범 인물에게서 다름을 제거한다. "대상이 사람을 대체하고,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불가피하게 동반하는 가늠할 수 없는 부분과 늘 가능한 헤어짐을 회피하는 데, 심지어 더 급진적으로 타인을 아예타인으로 지각하지 않는 데 노골적으로 기여하는 상황의 극단적인 예를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폐적 대상‘ 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33 스마트폰과 자폐적 대상은 간과할 수 없게 유사하다. 이행 대상과 달리 스마트폰은 딱딱하다. 스마트폰은 디지털 곰 인형이 아니다. 오히려 스마트폰은 나르시시즘적, 자폐적 대상이며, 사람들은스마트폰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느낀다. 그리하여 스마트폰은 또한 공감을 파괴한다. 스마트폰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는 타자의 가늠할 수 없음을 막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나르시시즘적 영역 안으로 움츠러든다. 스마트폰은 타자를 대상화함으로써 처분 가능하게 만든다. 스마트폰은 ‘너‘를 ‘그것‘으로 만든다. 스마트폰이 우리를외롭게 만드는 존재론적 이유는 다름 아니라 타자의 사라짐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그야말로 강박적이고 과도하게 소통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외로우며 공허를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도소통은 공허를 채우지못한다. 과도소통은 외로움을 심화할 따름이다. 왜냐하면과도소통은 타자의 지금 여기에 있음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셀피
아날로그 사진은 하나의 사물이다.
취약한 사물로서 사진은 비록 죽음에 내맡겨져 있지만 또한 동시 에 부활의 매체다. 사진은 피사체에서 나온 광선들을 포획하여 은가루 속에 가둔다. 사진은 단지 죽은 것들을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내기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은그것들을 다시 생동하게 함으로써 여기 있음 경험을 가능케한다.
사진이라는 천사는 부활의 약속을 항상 갱신한다. 그 천사는 기억과 구원의 천사다. 그는 우리를 삶의 연약함 위로 들어올린다. 아날로그 사진은 대상에서 유래한 빛 흔적을 화를 거쳐 종이에 옮겨놓는다. 본질적으로 아날로그 사진은 빛그림Lichtbild이다. 빛은 암실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므로 아날로그 사진은 밝은 방이다. 반면에 디지털 매체는 광선을 데이터로, 곧 수들의 비율로 변환한다. 데이터는 빛이 없다. 데이터는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다. 데이터누 삶의 빛을 차단한다
아날로그 사진은 기억 매체로서 역사를, 운명을 이야기한다. 소설적인 지평이 그 사진을 둘러싼다. "날짜는 사진의 일부다.[…] 왜냐하면 삶, 죽음, 세대들의 불가피한소멸을 숙고하게 하기 때문이다. 케르테스(헝가리 사진 작가옮긴이)가 1931년에 촬영한 어린 학생에르네스트는지금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살까?이건 대단한 소설이다!) "45 디지털 사진은 소설적 이지 않고 일화적이다. 스마트폰은 전혀 다른 시간성을 지닌 사진, 시간적 깊이와 소설적 너비가 없는 사진, 운명과 기억이 없는사진, 요컨대 순간 사진 Augenblicksfotographie의 발생을 허용한다
셀피는 일차적으로 메시지이기 때문에 수다스런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셀피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극단적인 자세들이다. 반면에 아날로그 초상 사진은 대개고요하다. 그 사진은 주목을 구걸하지 않는다. 바로 이 고요함이 아날로그 초상 사진에 표현력을 부여한다. 셀피는요란하지만 표현이 빈곤하다. 과장된 표현 때문에 셀피는가면처럼 느껴진다. 디지털 이미지 소통이 인간의 얼굴을침범함에 따라 여러 귀결이 발생한다. 그 침범은 인간의얼굴이 상품의 형태를 띠게 만든다. 벤야민이라면 인간의얼굴이 마침내 아우라를 상실하는 중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공지능
생각하기가 적용되는 전체 안의 존재자는 우선 기분Stimmung을 비롯한 감정적(피자극성) 매체 안에서 열려 있다. "기분은 세계-안에있음을 언젠가 이미 전체로서 열어놓았으며 무언가를 향함을 비로소 가능하게 만든다."48생각하기가 무언가를 향하기에 앞서, 생각하기는 이미근본기분 Grundstimmung 안에 처해 있다. 이 처해 있음이인간의 생각하기를 구별 짓는 특징이다. 기분은 객관적세계를 향해 출발하는 주관적 상태가 아니다. 기분은 세계이다. 생각하기는 근본기분 안에서 이미 열린 세계를나중에 개념들로 명확히 발설한다.
‘기분에 처해 있음 Gestimmtsein‘으로서의 현존재는 ‘의식 있음 Berwusstsein‘에 선행한다. 애초의 움켜쥐어졌음에서 생각하기는 말하자면 자기 바깥에있다. 근본기분은 생각하기를 바깥으로 옮겨놓는다. 인공지능은 생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은 절대로 자기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Geist은 원래 ‘자기 바깥에 있음‘ 혹은 ‘움켜쥐어졌음‘을 뜻한다. 인공지능은 아주빠르게 계산할지는 몰라도 정신이 없다. 계산을 위해서라면 움켜쥐어졌음(감동)은 방해물일 따름이다.
빅데이터는 초보적인 앎을 제공한다. 그 앞은 상관관계와 패턴 인식에 국한된 채로 머물며 아무것도 개념화하지 못한다. 개념은 전체이며, 그 전체는 자신의 계기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품어 맺고cin-schliepen) 포괄한다(품어 붙잡는다ein-begreifen). 전체는 맺음 형식이다. 개념은 맺음(추론)Schluß이다. "모든 것은 맺음이다"라는 말은 "모든 것은 개념이다"라는 뜻이다. 이성도 맺음이다. "모든 이성적인것은 맺음이다." 빅데이터는 가산적加算이다. 가산적인것은 전체를, 맺음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것에게는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바꿔 말해, 부분들을 전체로 함께 맺는zusammenschließen 붙잡음이 결여되어 있다. 인공지능은 개념 수준의 삶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인공지능은 자신이 계산하는 결과를 개념화하지 못한다. 계산하기는 개념을 구성하지 못하며 한 맺음에서 다음 맺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생각하기와 구별된다
인공지능에게 결여된 것은 다름 아니라 확실한 의미의 새로움이 시작되게 하는 단절의 부정성이다. 인공지능은 미리 주어진 것에서 벗어나 다녀보지 않은 곳으로 가지 못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은 "바보처럼 굴기"에서 시작된다. 지능이 아니라 바보짓이 생각하기의 특징이다. 새로운 문구, 새로운 생각,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모든 철학자는 바보다. 그는 기존의 모든 것과 결별한다. 그*는 저 순결한,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생각하기의 내재층Immanenzebene에 거주한다. 생각하기는 "바보처럼 굴기"를 통해 전혀 다른 곳, 다닌 적 없는 곳으로의 도약을 감행한다.
"인공지능은 생각할 능력이 없다. 인공지능은 "바보처럼 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너무지능적이어서 바보일 수 없다.
사물은 면모들
사물의 심술
사물들의 심술은 필시 과거의 일이다. 우리는 이제 더는 사물들에게 괴롭힘당하지 않는다. 사물들은 파괴적이고 저항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사물들은 위협적인 가시를 잃는다. 우리는 사물들의 다름이나 낯섦을 지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실재감Wirklichkeitsgefühl 이 약해진다.
더는 사물적 실재와 맞부딪치지 않는다. 그는 사물들의저항에 직면하지 않는다. 이처럼,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이들에게 흠뻑 주입된다. 모든 것에 대하여 신속한해법이(옳거니, 바로 앱이) 존재한다는 생각, 삶 자체가 다름아니라 문제 풀이라는 생각이 말이다.
사물의 등
그는 우리가 사물들을 도구로 대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는 인간 문화를"사물들의 등"에 얹혀 있는 아주 연약한 시설로 본다. 우리는 사물들의 "앞면 혹은 윗면만, 사물들의 기술적 친절함과 우호적 통합만 익히 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들의"밑면"도 보지 못하고 "사물 전체를 둘러싸고 띄우는 원소도 보지 못한다." 블로흐는 사물들의 친절함이 우리 쪽으로 놓인 앞면에불과할 가능성을, 사물들이 -실은 단지 경계벽을 부수고 인간 세계에 침입 했을 따름인-다른 세계에 속해 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사물들의 친절함 뒤에는 비합리적인 고유의 삶이 있고, 그 고유의 삶이 인간의 의도들을 가로막는다고 추측
그 시절에는 바라봄으로서의 타자, 목소리로서의 타자가 늘 함께 있었다. 사르트르도 사물들에 의해 건드려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익히 안다. 《구토》의 주인공은자꾸 사물들과 접촉하게 되고, 이 때문에 소스라치게 당황
오늘날 세계는 바라봄과 목소리가 몹시 부족하다. 세계는 우리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는다. 세계는다름을 상실한다. 우리의 세계 경험을 규정하는 디지털화면은 우리를 실재로부터 격리한다. 세계는 탈실재화되고 탈사물화되고 탈신체화된다. 강해지는 자아는 이제더는 타자에 의해 건드려지지 않는다. 자아는 사물의 등을거울로 삼아 자신을 본다. 타자가 사라지는 것은 실은 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이사건은 워낙 은밀하게 일어나서, 우리는 이 사건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다. 세계가 처분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객체들로만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세계와 관계 맺을 수 없다. 정보와 관계맺는 것도 불가능하다. 관계는 독립적인 상대를, 맞은편(상호성)Gegenseitigkeit을, ‘너‘를 전제한다. ‘너‘라고 말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고있지 않다. 다만 그는 관계 안에 있다." 처분 가능하고소비 가능한 객체는 ‘Du‘가 아니라 ‘그것‘이다. 관계와 결속의 결여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세계의 빈곤으로 이어진다. 다름 아니라 디지털 객체들의 홍수가 세계 상실을 가져온다. 화면에는 세계와 실재가 몹시 결핍되어 있다. 어떤 상대도, 어떤 ‘너‘도 없다면, 우리는 그저우리 주위를 돌 뿐이다. 우울증이란 다름 아니라 병적으로 심화한 세계 결핍을 뜻한다. 디지털화는 우울증을 확산시키는 한 요인이다. 정보권은 우리의 자기관계를 심화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의 욕구에 종속시킨다. 오로지 타자의 부활만이 우리를 세계 결핍으로부터 해방할수 있다.
유령
편지 쓰기는 유령들을 상대하기다. 사람은 멀리있는 사람을 생각하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붙잡을 수있다. 다른 모든 것은 사람의 능력을 벗어난다. 글로 쓴입맞춤은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유령들이그 입맞춤을 가로채 깡그리 마셔버린다. 인류는 이를 느끼고 맞서 싸운다. 유령이 사람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최대한 배제하고 영혼의 평화를 이뤄내기 위하여 인류는철도, 자동차, 비행기를 발명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추락하는 와중에 제작한 발명품들에 불과하다. 상대편이 훨씬 더 강하다. 상대편은 우편에 이어 전보, 전화, 무선전신을 발명했다. 유령들은 굶어 죽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인류는 몰락할 것이라고 카프카는 결론 내린다.
디지털 소통은 인간관계를 심각하게 저해한다. 오늘날우리는 어디에서나 연결망에 속해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결합되어 있지 않다. 디지털 소통은 외연적이다. 그 소통은 집약성을 결여하고 있다. 연결망에 접속하기는 관계 맺기와 다르다. ‘너‘는 오늘날 어디에서나 ‘그것‘으로 대체된다. 디지털 소통은 인간적인 상대, 얼굴, 바라봄, ‘지금 여기에 몸소 있음 körperliche Gegenwart‘을 없앤다. 그렇게 디지털소통은 타자의 사라짐을 가속한다. 유령들은 같음의 지옥에거주한다. 인간은 가까움에 의지하는 근접 존재Nahwesen다. 그런데가까움은 거리 없음이 아니다. 가까움에는 멀리 있음이기입되어 있다. 가까움과 멀리 있음은 서로의 맞찍이다. 따라서 인간은 근접 존재이면서 또한 멀리 있음에 의지하는 원격 존재Fernwesen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붙잡거나 멀리 있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으며 다른 모든 것은 사람의 능력을 벗어난다고 카프카가 말하는 것이다. 디지털 소통은 모든 것을 거리 없게 만듦으로써 가까움과 멀리 있음을 모두 파괴한다. 타자와 관계 맺기는 거리를 전제한다. 거리는 ‘너‘가 ‘그것‘으로 전락하지 않게 해준다. 거리 없음의 시대인 오늘날 관계는거리 없는 접촉에 밀려난다.
실재 앞을 슬며시 가로막는 다량의 정보는 실재의 사물적인 층을 침식한다. 일찍이 후고 폰 호프만슈탈은 이렇게 일갈했다. "사물들 앞에 단어들이 자리잡았다. 주워들은 이야기가 세계를 삼켜버렸다." 사물에 대한 주의 향상은 자기 망각 및 상실과 짝을 이룬다. 내가 약화되면, 나는 저 고요한 사물 언어를 수용하게 된다. 여기 있음 경험은 바깥에 놓여 있음을, 상처받을 수 있음을 전제한다. 상처가 없으면 나는 궁극적으로 오직 나 자신의 메아리만 듣는다. 상처는 구멍, 곧 타자를 향해 열린 귀다. 오늘날 저 현현적 순간은, 자아가 점점 더강해진다는 이유만으로도 벌써 불가능하다. 사물들은 자아를 거의 건드리지 못한다.
예술에서의 사물 망각
예술품은 사물이다 기표들 곧 언어적 기호들로 이루어진 형태 구조물로서의 시는 의미들로 용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물이다. 물론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시를 읽을 수도 있지만, 의미는 시의전부가 아니다. 시는 감각적 - 신체적 차원을 지녔으며, 그차원은 의미 곧 기의를 벗어난다. 다름 아니라 기표의 과잉이 시를 농축하여 사물로 만든다. 시는 우리의 포르노적 소비주의시대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날 우리는 시를 거의 읽지 않는다. 단어들은 "생각 없이" 또 "쉽게 잊히게" 종이에 적힌다. 요컨대 쓰기는 단어들에 명확한 뜻을 부여하려는 의도로부터 해방된다. 시인은 거의 무의식적인 과정에 자신을 내맡긴다. 시는 뜻을 생산하는 고역으로부터 해방된 기표들로 직조된다. 오늘날 예술의 문제점은, 예술이 미리 품은 견해를, 이를테면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신념을 전달하는 경향이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오늘날의 예술은 정보를 전달하는 경향이 있다. 구상이 실행에 선행한다. 그리하여예술은 예시로 전락한다. 불특정한 열기가 표현 과정을규정하지 않는다. 이제 예술은 물질을 의도 없이 사물로조형하는 수작업이 더는 아니며, 오히려 미리 제작한 생각을 소통하는 생각 작업이다. 사물 망각이 예술을 휩쓸고있다. 소통이 예술을 독차지한다. 예술이 정보와 담론을 싣게 된다. 예술이 유혹하는 대신에 가르치려 든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죗값을 치르고 죄를 씻어내는 대신에 빚을 지게 만드는 숭배문화의 첫 사례입니다. 디지털화 초기에 사람들은 노동을 놀이로 대체하는 것을 꿈꿨지요. 하지만 현실에서 디지털 자본주의는 인간의 놀이 충동을 무자비하게착취합니다. 게임의 요소들을 집어넣어 사용자를 중독되게 만드는 소셜미디어들을 보세요.
스마트폰은 오늘날 디지털 강제노동수용소이거나 아니면 디지털 고해소이거나 둘 중 하나예요. 모든 지배 장치, 지배 기술은 고유한 성물들을 만들어내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데 동원하죠. 그런 성물들은 지배를 안정화합니다. 스마트폰은 디지털 지배체제의 성물이에요. 복종을 유도하는 장치로서 스마트폰은 묵주와 비슷한 역할을 해요. 묵주는 휴대하기 쉽고 다루기 쉽다는 점에서일종의 ‘핸디Handy‘ (‘핸드폰‘을 뜻하는 독일어 - 옮긴이)예요.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죠, 우리는 계속 고해告解해요. 자발적으로 발가벗지요. 그러면서 애원하는 것은 용서가아니라 주목이고요.
오직 억압적 체제만 저항을 유발합니다. 반면에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저항에 직면하지 않아요. 이 체제는 억압하지 않고 유혹해요.지배가 자유로 자처하는 순간, 지배는 완성됩니다.
인간 실존은 오늘날 행위에 철저히 흡수되어버립니다. 그렇게 실존이 완전히 착취 가능하게 되죠. 무위無는 자본주의적 지배질서의 내부에서 갇힌 바깥으로서다시 등장해요. 그 부위를 일컬어 여가라고 하죠. 노동으로부터의 회복에 종사한다는 점에서 여가는 여전히 노동에 매여 있습니다. 노동의 파생물로서의 여가는 생산 내부의 기능적 요소를 이루죠. 무위의 정치가 필요합니다.무위의 정치는 시간을 생산 강제로부터 해방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시간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진짜이고자 해요. 바꿔 말해,타인들과 다르고자 해요.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들과 비교하죠. 바로 이 비교하기 (같게 만들기)VerGleichen가 우리 모두를 같아지게 합니다. 요컨대 진정성강박이 같음의 지옥을 초래합니다.
자본주의는 실제로 인간의 충동구조들과 잘 어울려요. 하지만 인간은 충동 존재에 불과하지않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길들이고 문명화하고 인간화해야 해요.실제로 우리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죠. 사회적시장경제가 그 증거예요. 지금 우리의 경제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속가능성의 시대로 말이죠.
그렇게 스마트폰은 우리의 자아를 강화합니다. 손가락을 놀리면서 우리는 세계를 우리의 욕구들에 종속시키죠. 세계는 총체적 처분 가능성이라는 디지털 가상을띠고 우리에게 나타나요. 이를 통해 타자들이 사라집니다. 바로 처분 불가능성이 타자의 타자성을 이루거든요.오늘날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기고 단지 소비 가능한 놈으로 됩니다.
저는 옛날의 아름다웠던 사물들을 떠올리게 할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사물의소멸》은 철학적인 책이 전혀 아니겠죠. 제가 사물을 삶의안식처라고 표현한 것은 사물이 인간의 삶을 안정화하기때문이에요. 같은 의자와 같은 탁자는 그것들 자신으로머무르면서 무상한 인간의 삶에 안정성과 연속성을부여하죠. 사물들 곁에서 우리는 하염없이 머무를 수 있어요. 반면에 정보 곁에서는 그러지 못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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