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초가 차지하는 면적은 지구 표면의 0.1%에도 못 미치지만, 이곳은 전체 해양생물의 4분의 1이 서식하는 안식처이다.

세계 경제에서 420조 원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우리는 산호초를 죽게 내버려 두고 있다.
4분의 1 정도가 이미 사라졌고 현재 남아있는 산호초도 3분의 2가량은 심각한 위협에 놓여있다.

섬세한 균형

산호의 구조를 보면, 광합성을 할 수 있는 단세포 생물인와편모조류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와편모조류는 산호에게 당과 아미노산을 공급하고 그댓가로 안전한 서식 장소를 제공받는다. 그러나 바닷물의온도가 올라가면 와편모조류가 산호에서 떨어져 나가고그 결과 산호가 탈색되어 하얗게 변하는 "백화 현상"이발생한다. 주된 먹이 공급원인 조류가 빠져나가 탈색된산호는 병에 걸리기 쉽고 생존도 힘들어진다. 2016년 한해 동안에만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의 산호 90%가 백화현상으로 피해를 입었고, 20%는 폐사했다.
역사를 통틀어 지구에는 다섯 번의 대멸종 사건이 있었다.
멸종이 있을 때마다 파괴된 산호초가 회복되는 데 수백만년이 걸렸고, 지질학적 연표에는 "산호초 공백기가표시되었다. 선사시대에 발생한 대멸종(마지막인 다섯번째에 공룡이 멸종했다)의 주요 원인으로 해수면 상승과해양 산성도 변화, 수온 변화 등을 들 수 있는데, 오늘날이 모든 현상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여섯 번째 대멸종을피하기 위해서는 "바다의 열대우림"을 지켜야 한다.

기후 변화는 ‘항아리곰팡이‘라 알려진 치명적인곰팡이균의 확산을 가속하기도 한다. 저지대의 숲은점점 따뜻해지지만, 습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산위쪽에는 두꺼운 구름이 만들어지고 개구리의 서식지는현저히 서늘해진다. 개구리는 외부 온도에 영향을 받는변온동물이기 때문에 기온이 변화하면 면역 체계가약해지면서 곰팡이균이 체내로 침입해 번성한다.
‘항아리곰팡이병‘은 전 세계의 양서류에 심각한 영향을끼쳤을 뿐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척추동물종을 감염시키고 멸종시킨 질병으로 기록되었다. 오늘날양서류 종의 3분의 1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고, 약120종은 이미 멸종되었다.

가슴 아픈 사랑
황금빛을 띤 쟁기거북의 반구형 등껍질은 보기에도멋있지만 매우 희소하기 때문에 암시장에서 엄청난가치를 지닌다. 무장한 경비원들이 생기거북 사육센터를지키고 있지만 이를 훔치려는 시도가 지속되면서, 결국환경보전론자들이 거북의 등껍질을 일부러 훼손하는상황에 이르렀다. 거북의 등껍질에 글씨를 새기는 행위는거북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 암시장에서의 가치를떨어뜨리고 연구자들에게는 개체를 쉽게 식별할 수있게 해 준다. 등에 새긴 표식을 보는 것이 불편할 수도있겠으나, 이는 같은 세상을 공유하는 두 종인 인간과쟁기거북 사이에 건강하고 진전된 관계가 형성되었음을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때로는 보전을 위해서 격리가아닌 창조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영원 깨끗한 물 반드시 필요
액솔로틀 고대 아즈텍 신화에 등장한 솔로틀이 현현한 모습. 포유류에 비해 1000배 이상 암에 대한 저항력

소리 없는 몰락
2007~2017년 사이, 불법으로 거래된 천산갑이 100만마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면서 이들은 공식적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불법 거래된 포유동물이 되었다.
천산갑은 수줍음이 많고, 이빨이 없으며, 대부분야행성이다. 또한 케라틴으로 만들어진 비늘이 갑옷처럼몸을 감싸고 있으며, 두려움을 느끼면 몸을 공처럼 둥글게만다. 천산갑은 이러한 방어 능력 덕분에 포식 동물로부터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지만, 인간에게는 이 방법이 통하지않는다. 인간은 그저 이들을 집어 들고 가져가기만 하면되기 때문이다.
공룡 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포유동물에서 분화된천산갑은 "비늘을 지닌 유일한 포유류"라는 독특한진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 아프리카와 아시아에각각 4종씩 총 8종이 존재하는데, 모두 취약종에서절멸종으로 분류되며 이 중 2종은 위급종에 속한다.
천산갑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톤 단위로 거래되지만,
오늘날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파괴되는 서식지
전통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천산갑을 사냥하는 이유는식용 고기를 얻기 위해서이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주로비늘을 얻기 위해 천산갑이 거래되는데, 이곳에서는천산갑의 비늘을 벗겨내 건조한 후 가루로 만들어 효능이입증되지 않은) 민간요법 약제로 이용한다. 동아시아의많은 지역에서 천산갑 고기가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면서,현지 종들은 눈 깜짝할사이에 멸종 위기에 놓이고말았다.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기업들은 아프리카에 최신식 도로와철도를 건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반시설이 천산갑의서식지를 관통해 조성되면서 아시아의 불법 거래상들은더 많은 천산갑을 사냥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외진 곳까지손길을 뻗쳤고, 이로 인해 현지에서 천산갑 가격이치솟았으며, 천산갑 개체 수는 곤두박질쳤다. 천산갑 한마리는 매일 약 20만 마리의 곤충을 잡아먹는다. 이들이없어지면 농장과 숲 역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고릴라, 침팬지, 맨드릴, 오랑우탄

벌목, 화전 농업.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서 행해지는 원시적 농법

오늘날 보노보의 개체 수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보노보 살생을 금기시하는 외딴 지역의 원주민 공동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 지역 역시 밀렵꾼에노출되고 말았다. 정글 깊은 곳에 살고 있는 보노보가인간을 피할 수 있는 날은 그리 오래 남지 않은 것 같다.
팜유 생산을 위한 대규모 벌목과 불법 화전 농업으로동남아시아의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나자 중앙아프리카지역이 새로운 팜유 재배지로 떠오르고 있는데, 보노보서식지의 99.2%가 바로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지의류. 1년에 1mm채 안되는 속도로 성장
공기ㅈ토양 물이 깨끗한 장소에서만 자람.
환경상태 파악하는 척도

얼루무늬타마린, 검은들창코원숭이, 황금들창코원숭이
레서판다, 필리핀뿔매 사우스필리핀뿔매 필리핀수리

이동 경로가 조각남. 생태통로 필요.

악어가죽 이면의 현실
악어가죽을 얻기 위한 사냥이 시작된 지 100년 만에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샴악어는 수백 마리밖에 남지않게 되었다. 악어는 번식 속도가 느리고 성체가 되는확률도 매우 낮은데, 이는 기후 변화로 인해 강의 수위가높아지면서 산란 장소가 물에 잠길 위험이 커졌기때문이다. 홍수와 삼림 파괴, 밀렵의 영향으로 악어 알이성체로 자라는 확률은 10%가 채 되지 않는다. 길이가 4m정도 되는 거대한 악어(사진)를 비롯해 대부분의 악어는인간에게 위협적이지 않으며, 지역 토착민과의 충돌이없는 곳에서는 개체 수도 안정적이다. 야생절멸종으로분류될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몇몇국가에서는 신발과 가방 지갑을 만들기 위해 수십만마리의 샴악어를 농장에서 사육한다. 악어 농장은 악어를보전하기 위해 존재해야 하지만 실상은 다양한 종류의가죽을 만들기 위해 종을 섞어 교배시키기 때문에, 이들을야생으로 재도입시킨다면 유전적 순수성이 위태로워질것이다. 일반적으로 악어는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위치하고 있어 하위 단계에 있는 모든 생물의 개체 수를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이 사라진다면 생태계에재앙이 닥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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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나 《심리정치》 같은제 저서들의 바탕에 깔린 통찰은 푸코의 규율사회 분석이 우리의 현재를더는 설명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규율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구별합니다. 규율 체제는 명령과 금지를 통해 작동하죠. 그 체제는 억압적이에요. 자유를 억누릅니다. 반면에 신자유주의 체제는 억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유혹적이고 허용적입니다. 이 체제는 자유를 억압하는 대신에 착취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고 믿으면서 자발적으로 또 열정적으로 우리 자신을 착취하죠. 요컨대 우리는 규율사회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성과사회에서 살아요. 이것을 푸코는 보지 못했어요. 자기가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신자유주의적 성과 주체는 실은 노예입니다. 주인 없이 자발적으로 자기를 착취한다는 점에서 그 주체는 절대적인 노예죠.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과 짝을 이루기 때문에 외래적인 착취보다 더 효과적이에요. 이 역설적인 노예의 자유를 카프카의 다음과 같은 경구가 아주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동물이 주인에게서 채찍을 빼앗아 자기를 채찍질한다. 주인이 되기 위해서." 이 꾸준한 자기 채찍질은 피로와 우울감을 일으켜요. 노동 그 자체는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심각한 피로를 유발하지 않습니다. 노동하고 나면 기력이 소진될 수야 있겠지만, 이 소진은 파괴적인 피로와 다릅니다. 노동은 언젠가 끝나요. 반면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과하는 성과 강제는 노동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되죠. 그 성과 강제는 잠들었을 때도 우리를 괴롭히고 드물지 않게 불면증을 일으킵니다. 노동에서 회복하는 것은 가능해요. 그러나 성과 강제에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내적 압력, 이성과 압력과 최적화 압력이 우리를 피로하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시대의 병적 징후는 억압이 아니라 우울이에요. 오직 억압적 체제만이 저항을 유발합니다. 반면에 자유를 억누르지 않고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저항에 직면하지않아요. 지배가 자유로 자처하는 순간, 지배는 완성되죠.
이것이 저의 사회비판적 에세이들의 바탕에 깔린 깨달음들입니다. 이 깨달음들을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요. ‘타자가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땅에게 고유의 신비와 마법을 돌려줘야 하고 경탄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땅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일 거예요. 절대적지위를 점한 인간적 행위는 땅을 파괴합니다. 우리는 행위하지 않는 능력을 발견해야 해요. 지구는 자원이 아닙니다.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한낱 수단이 아니라고요. 오늘날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은 경탄하며 바라보기가 아니라 오로지 도구를 다루는 행위에 의해 규정되지요. 인류세는 바로 지구자연이 인간 행위의 법칙들에 철저히 종속된 결과입니다. 지구자연은 인간 행위의 구성 요소로 격하될 거예요. 인간의 행위는 인간들 사이의 영역을 넘어 자연을 침범합니다.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뜻에 완전히 종속시키니까요. 그러면서 인간은 자신의 개입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과정들이 고삐에서 풀려나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죠
오로지 무위爲, Untätigkeit의 천사만이 그 폭풍에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위의 능력, 행위하지 않을 능력을 되찾아야해요. 그래서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새 책의 제목은 《관조하는 삶: 무위에 관하여>입니다.이 책은 인간의 행위를찬양하는 한나 아렌트의 책 《능동적인 삶 행위하는 삶에관하여>의 맞수, 혹은 해독제입니다.

리추얼들이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삶의 철저한 유동화는 상실을 동반해요. 리추얼은 그저 자유를 제한하기만 하지 않아요. 리추얼은 삶을 구조화하고 안정화합니다. 리추얼은 공동체를 창출하는 가치들과 상징적 질서들을 몸에 정박해요. 리추얼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공동체의 가까움을 몸으로 체험합니다. 반면에 디지털화는 세계를 탈신체화합니다. 
자아를 중심에 놓은 진정성 문화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신자유주의예요. 진정성 문화는 리추얼화된 상호작용 형식들에 대한 불신을 조장합니다. 오직 자발적인 느낌의 동요만, 바꿔 말해 주관적 상태만 진정성이 있다는식이죠. 형식화된 행동은 진정성이 없다거나 겉치레라는이유로 제거됩니다. 예컨대 공손함이 그래요. 나르시시즘적 진정성 숭배는 사회의 야만화를 심화하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제 책에서 저는 진정성 숭배에 맞서 아름다운형식들의 윤리를 옹호합니다. 공손한 형식들은 한낱 겉치레가 아니에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바꾸고 새로운 상태를 창출합니다. 바로 이것이 리추얼의 힘이에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의식은 더는 사물들에 정박해있지 않습니다. 외적인 것으로서의 사물은 의식을 아주 효과적으로 안정화할수 있어요. 반면에 정보로 의식을 안정화하기는 아주 어려워요. 왜냐하면 정보는 덧없고 현재성을 띠는 기간이아주 짧거든요.

선생님은 <사물의 소멸》의 끄트머리에서 아름답게도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인용하면서, 오늘날 위태로워진 신뢰, 결속, 책임 같은 가치들을언급합니다. 

신뢰, 충실Treue, 결속, 책임을 비롯한 모든 시간집약적 실행들이 지금 사라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단기화 短期化되고 있어요. 
그 덕분에 우리가 더 자유로워졌다고 우리는 말하죠. 그러나 이 단기성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들에 매어둘 수는있지만 정보에 매어둘 수는 없어요. 우리는 정보를 잠깐만 알아둡니다. 그 잠깐이 지나면 정보의 존재지위는 이미 다 들은 자동응답기 메시지와 같아져요. 가치가 0에수렴한다는 거죠. 예컨대 신뢰는 오늘날 투명성과 정보에 치여 해체되고 있는 사회적 관행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뢰는 앎이 부족하더라도 타자와 긍정적 관계를맺을 능력을 우리에게 제공해요. 투명사회에서 사람들은 대뜸 타자에 관한 정보를 요구합니다. 사회적 관행으로서의 신뢰는 불필요해져요. 투명한 정보사회는 불신의사회를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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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국자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질투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아이들은 과거에 관심이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였고, 결말도 닫힌문처럼 명료했다. 그런데 가끔 그 단단하게 닫힌 줄 알았던 문이 아귀가맞지 않아 살짝 열려 있을 때도 있었다. 역사 선생님의 이야기처럼, 역사선생님은 학교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선생님이었는데 바싹 말라비틀어진 노송처럼 얼굴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했다. 눈빛도 마치 나무 옹이처럼깊고 어두웠다. 선생님은 말할 때마다 기침을 멈추지 못했는데, 옛날이야기를 할 때는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아이들도 딴짓을 멈췄다.

"공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결함을 입증하기 위해서정치에 무지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선거권도 필요가 없겠습니다."

"네, 우생학만큼 유구한 전통이 있는 학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떡잎이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어떤 나무는 자라기도 전에 베어내야 하는 건가요?"
"국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저해한다는 사실이 입증되기라도 한 겁니까?"
"이보세요. 아주 쉬운 문제입니다." 여당 대표는 아이 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매스게임을 생각해봐요. 한 사람이라도 제멋대로굴면 그림이 영 보기 좋지 않잖습니까."
"보기 좋은 게 사회입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공부도 잘한 양반이 왜 이러실까? 정부를 우습게 보는 것도 어지간해야지. 응? 오합지졸로 구성되어 있으면 누가 정부를 믿고 따르겠습니까? 이 난세를 뚫고 나갈 선장과 선원들을 뽑는데, 응?"
"무슨 미스코리아 대회입니까? 정부에 토 달지 않고, 장애 없이 그럴싸한 능력자만 골라서 뽑는다니." 단체장은 여당 대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에 비하면 국회의원 뽑는 기준은 한참 낮은 모양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를 모욕했다며 의원들이 삿대질과 욕설을 퍼부어대는가운데 경찰들이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단체장은 어떤 저항도 없이 끌려갔다.
씨앗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당한 후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세간에는 단체장이 반동 세력과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횡행했다. 텔레비전에 나온 기능력직 공무원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편 언론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어느 신문사에서는 정부의 비난에 동조하여 씨앗을 비방했으나 다른 신문사에서는 정부의 위선이 참담하기 그지없다고 표명했다. 정부측 심리학 전문가의주장에 반발하는 전문가들이 성명문을 발표했으나 이 역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단체장은 항소했으나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이유로삼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수감중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교도관들은 유가족에게 그가 죄수 간 싸움에 휘말렸다고 통보했다.

정부는 다중능력검사의 평가 방식이 매년 바뀐다고 발표했지만, 매해나오는 예상 문제집은 베스트셀러 목록 안에 꾸준히 들곤 했다. 숨겨진능력을 끌어내 능력자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불법 시술도 판을 쳤다. 공직에 지원한 적합 판정자들은 등급이 낮아 국가기관에 배정받지 못하더라도 연수만 마치면 노후는 보장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로또라고 표현했다.
행운아들이 조명받을수록 적합 판정을 받지 못한 아이들 위로 드리운그늘은 더 두터워졌다. 의무교육과정에 인권 교육이 포함되었으나 형식에 불과했다. 학교는 작은 사회였다. 아이들은 그 안에서 계급을 나누고인정을 구했다. 부끄러워하는 대신 정당화하는 편이 더 낫다고 믿었다.미지는 그렇게 믿는 아이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함께 임용고시를 준비했던 동기들도 동의했다. "어른들이 가르쳤지."
교육부는 능력자가 시비에 휘말렸을 때 학교측의 일방적인 판단을 막기 위해서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역시 부적합 판정을 받은 아이들을 더 불리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의원 대다수는 부적합 판정자라면 괜히 원한을 품고 누군가를 해코지할 수 있다는결론을 내렸다. 설령 피해자라도 다른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강제전학을 보냈다. 다수결의 원칙은 부적합 판정자들을 더 손쉽게 사회반경에서 밀어내는 데 쓰였다.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모두가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소문처럼 실례가 떠돌았다. 연금 지급 제한 조치는 그러려니 할 수 있었지만, 무고한 가족에게도 여파가 미쳤다.등급이 높고 배정받을 예정이었던 부서가 중앙에 가까울수록 괴롭힘은더 치밀하고 교묘했다.
미래를 본들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국자와 글로리아는 너무 일찍 그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능력은 그들이 모르는 새 다가와 맴도는 사자와 같았다. 누구도 다가올 수 없도록 막아주는 한편 방심한 순간을 틈타 자신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국자와 글로리아가 등급 심사를 조작한 이유이기도 했다.

영웅은 국가에서 고르는 도구였다. 기능력직 공무원으로 뽑힌 시시콜콜 반발하거나 친정부적이지 않으면 도구로 적합하지 않았다. 국가는위험 요소를 철저하게 배제했다. 국자는 텔레비전에 영웅이라며 몇몇 기능력직 공무원들이 나올 때마다 채널을 돌렸다. 그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의심 하나 없이 환한 그들의 미소가 불편했다. 국자는 반장의 확신이 깨지지 않길 바랐다. 확신은 소망에서 비롯하고, 소망은 아무리 강력해도 언제든 허상처럼 흩어질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떤 확신도 근거가 부족한 믿음에 불과했다. 그리고 확신은 무력해지는 순간 모든 걸망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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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소통도취와 정보 도취다. 정보 곧 반사물事物, Unding이 사물의 앞을 가로막고 
사물을 완전히 빛바래게한다. 우리는 폭력의 지배가 아니라 정보의 지배 아래 산다. 정보의 지배는 자유로 가장된다.

오가와의 디스토피아와 달리 우리의 정보사회는 그리단조롭지 않다. 정보는 사건Ereignis 인 척한다.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 Reiz der Uberraschung을 먹고 산다. 그러나흥분은 오래가지 않는다. 금세 새로운 흥분을 향한 욕구가 생긴다. 우리는 흥분을, 놀람을 목적으로 실재를 지각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정보 사냥꾼으로서 우리는 고요하고 수수한 사물들을 곧 평범한 것들, 부수적인 것들, 혹은 통상적인 것들을 못 보게 된다. 자극성이 없지만 우리를 존재에 정박하는 것들을.

사물에서 반사물로

탈사물화 디지털세계
탈사실적 자극 문화에서 소통을 지배하는 것은 흥분과 감정이다.
매우 불안정.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인간의 삶을 안정화하는 모든 것은 시간집약적이다.
신뢰하기, 맹세하기, 책임지기, 충실, 결속, 결속, 의무
하염없이 머무르기
모두 시간 집약적 관행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두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우리는 
차를 타고 온갖 곳으로 달려가지만farhen, 단 하나의 경험 Erfahrung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공동체에속하지 못한다. 우리는 엄청난 데이터를 저장하지만 기억을 되짚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와 팔로워를 쌓아가지만타자와 마주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정보는 존속과 지속이없는 삶꼴을 발전시킨다.

소유에세 체험으로

 "내가 더 많이 소유할수록 나는 더 많이 존재한다"라는 오래된 소유격언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새로운 체험 격언은 이러하다. "내가 더 많이 체험할수록 나는더 많이 존재한다."

한 사물은 느낌과 기억을 담은 그릇이다. 오래 사용됨을통해 사물에 축적되는 역사는 사물에 영혼을 불어넣어 충심의 사물로 만든다. 그러나 오직 은은한 사물 diskrete Ding만 집약적인 리비도적 결속을 통해 충심의 사물로 살아날 수 있다. 오늘날의 소비재들은 은은하지 않다. 추근거리고 조잘거린다. 그것들은 미리 제작된 표상과감정을이미 너무 많이 담고 있다. 그 표상과 감정이 소비자에게봇물 터지듯 밀려든다. 소비자 자신의 삶은 그것들 안에거의 깃들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소유는 "사람이 사물과 맺을 수있는 가장 깊은 관계다." 

스마트폰

스마트폰을 통한 소통은 탈신체화된 바라봄Blick이 없는 소통이다. 공동체는 신체적 차원을 지녔다. 신체성이빠져 있다는 점만으로도 디지털 소통은 공동체를 약화한다. 바라봄도 공동체를 굳건히 다진다. 디지털화는 바라봄으로서의 타인을 소멸시킨다. 바라봄의 부재는 디지털 시대에 공감의 상실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다. 심지어 어린아이도 바라봄을 허용받지 못한다. 어린아이를 돌보는사람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어머니의 바라봄에서 어린아이는 멈춤을, 자기입증Selbstbestätigung과 공동체를 발견한다. 바라봄이 근원적 신뢰를 건설한다. 바라봄의 결핍은 자기 및 타인과 맺는 관계의 장애를 유발한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우리의 지각을 그 장치에 위임한다. 우리는 그 화면을 통해실재를 지각한다. 그 디지털 창은 실재를 정보로 희석하고, 우리는 그 정보를 등록한다. 실재와의 사물적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실재는 ‘지금 여기에 있음 Prasenz‘을 박탈당한다. 우리는 실재의 물질적 울림 materielle Schwingung을 더는 지각하지 않는다. 지각은 탈신체화된다. 스마트폰은세계를 탈실재화한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플랫폼들은 새로운 영주들이다.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그들의 밭을 갈아 소중한 데이터를 생산하고, 그들은 그 데이터를 최대한으로 써먹는다. 우리는 철저히 착취당하고 감시당하고 조종당하는데도 자유롭다고 느낀다. 자유를 착취하는 시스템 안에서 저항은 형성되지 않는다. 지배가 자유와 합쳐지는 순간, 지배는 완성된다.

자폐적 대상은 이행 대상과 마찬가지로 결여된 모범인물의 대체물이지만 그 모범 인물을 대상화한다. 자폐적대상은 모범 인물에게서 다름을 제거한다. "대상이 사람을 대체하고,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불가피하게 동반하는 가늠할 수 없는 부분과 늘 가능한 헤어짐을 회피하는 데, 심지어 더 급진적으로 타인을 아예타인으로 지각하지 않는 데 노골적으로 기여하는 상황의 극단적인 예를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폐적 대상‘
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33 스마트폰과 자폐적 대상은 간과할 수 없게 유사하다. 이행 대상과 달리 스마트폰은 딱딱하다. 스마트폰은 디지털 곰 인형이 아니다. 오히려 스마트폰은 나르시시즘적, 자폐적 대상이며, 사람들은스마트폰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느낀다. 그리하여 스마트폰은 또한 공감을 파괴한다. 스마트폰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는 타자의 가늠할 수 없음을 막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나르시시즘적 영역 안으로 움츠러든다. 스마트폰은 타자를 대상화함으로써 처분 가능하게 만든다.
스마트폰은 ‘너‘를 ‘그것‘으로 만든다. 스마트폰이 우리를외롭게 만드는 존재론적 이유는 다름 아니라 타자의 사라짐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그야말로 강박적이고 과도하게 소통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외로우며 공허를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도소통은 공허를 채우지못한다. 과도소통은 외로움을 심화할 따름이다. 왜냐하면과도소통은 타자의 지금 여기에 있음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셀피

아날로그 사진은 하나의 사물이다.

취약한 사물로서 사진은 비록 죽음에 내맡겨져 있지만 또한 동시
에 부활의 매체다. 사진은 피사체에서 나온 광선들을 포획하여 은가루 속에 가둔다. 사진은 단지 죽은 것들을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내기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은그것들을 다시 생동하게 함으로써 여기 있음 경험을 가능케한다. 

 사진이라는 천사는 부활의 약속을 항상 갱신한다. 그 천사는 기억과 구원의 천사다. 그는 우리를 삶의 연약함 위로 들어올린다.
아날로그 사진은 대상에서 유래한 빛 흔적을 화를 거쳐 종이에 옮겨놓는다. 본질적으로 아날로그 사진은 빛그림Lichtbild이다. 빛은 암실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므로 아날로그 사진은 밝은 방이다. 반면에 디지털 매체는 광선을 데이터로, 곧 수들의 비율로 변환한다. 데이터는 빛이 없다. 데이터는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다. 데이터누 삶의 빛을 차단한다

아날로그 사진은 기억 매체로서 역사를, 운명을 이야기한다. 소설적인 지평이 그 사진을 둘러싼다. "날짜는 사진의 일부다.[…] 왜냐하면 삶, 죽음, 세대들의 불가피한소멸을 숙고하게 하기 때문이다. 케르테스(헝가리 사진 작가옮긴이)가 1931년에 촬영한 어린 학생에르네스트는지금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살까?이건 대단한 소설이다!) "45 디지털 사진은 소설적
이지 않고 일화적이다. 스마트폰은 전혀 다른 시간성을 지닌 사진, 시간적 깊이와 소설적 너비가 없는 사진, 운명과 기억이 없는사진, 요컨대 순간 사진 Augenblicksfotographie의 발생을 허용한다

셀피는 일차적으로 메시지이기 때문에 수다스런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셀피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극단적인 자세들이다. 반면에 아날로그 초상 사진은 대개고요하다. 그 사진은 주목을 구걸하지 않는다. 바로 이 고요함이 아날로그 초상 사진에 표현력을 부여한다. 셀피는요란하지만 표현이 빈곤하다. 과장된 표현 때문에 셀피는가면처럼 느껴진다. 디지털 이미지 소통이 인간의 얼굴을침범함에 따라 여러 귀결이 발생한다. 그 침범은 인간의얼굴이 상품의 형태를 띠게 만든다. 벤야민이라면 인간의얼굴이 마침내 아우라를 상실하는 중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공지능

생각하기가 적용되는 전체 안의 존재자는 우선 기분Stimmung을 비롯한 감정적(피자극성) 매체 안에서 열려 있다. "기분은 세계-안에있음을 언젠가 이미 전체로서 열어놓았으며 무언가를 향함을 비로소 가능하게 만든다."48생각하기가 무언가를 향하기에 앞서, 생각하기는 이미근본기분 Grundstimmung 안에 처해 있다. 이 처해 있음이인간의 생각하기를 구별 짓는 특징이다. 기분은 객관적세계를 향해 출발하는 주관적 상태가 아니다. 기분은 세계이다. 생각하기는 근본기분 안에서 이미 열린 세계를나중에 개념들로 명확히 발설한다.

 ‘기분에 처해 있음 Gestimmtsein‘으로서의 현존재는 ‘의식 있음 Berwusstsein‘에 선행한다. 애초의 움켜쥐어졌음에서 생각하기는 말하자면 자기 바깥에있다. 근본기분은 생각하기를 바깥으로 옮겨놓는다. 인공지능은 생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은 절대로 자기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Geist은 원래 ‘자기 바깥에 있음‘ 혹은 ‘움켜쥐어졌음‘을 뜻한다. 인공지능은 아주빠르게 계산할지는 몰라도 정신이 없다. 계산을 위해서라면 움켜쥐어졌음(감동)은 방해물일 따름이다.

빅데이터는 초보적인 앎을 제공한다. 그 앞은 상관관계와 패턴 인식에 국한된 채로 머물며 아무것도 개념화하지 못한다. 개념은 전체이며, 그 전체는 자신의 계기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품어 맺고cin-schliepen) 포괄한다(품어 붙잡는다ein-begreifen). 전체는 맺음 형식이다. 개념은 맺음(추론)Schluß이다. "모든 것은 맺음이다"라는 말은 "모든 것은 개념이다"라는 뜻이다. 이성도 맺음이다. "모든 이성적인것은 맺음이다." 빅데이터는 가산적加算이다. 가산적인것은 전체를, 맺음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것에게는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바꿔 말해, 부분들을 전체로 함께 맺는zusammenschließen 붙잡음이 결여되어 있다. 인공지능은 개념 수준의 삶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인공지능은 자신이 계산하는 결과를 개념화하지 못한다. 계산하기는 개념을 구성하지 못하며 한 맺음에서 다음 맺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생각하기와 구별된다

 인공지능에게 결여된 것은 다름 아니라 확실한 의미의 새로움이 시작되게 하는 단절의 부정성이다. 인공지능은 미리 주어진 것에서 벗어나 다녀보지 않은 곳으로 가지 못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은 "바보처럼 굴기"에서 시작된다. 지능이 아니라 바보짓이 생각하기의 특징이다. 새로운 문구, 새로운 생각,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모든 철학자는 바보다. 그는 기존의 모든 것과 결별한다. 그*는 저 순결한,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생각하기의 내재층Immanenzebene에 거주한다. 생각하기는 "바보처럼 굴기"를 통해 전혀 다른 곳, 다닌 적 없는 곳으로의 도약을 감행한다. 

"인공지능은 생각할 능력이 없다. 인공지능은 "바보처럼 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너무지능적이어서 바보일 수 없다.

사물은 면모들

사물의 심술

사물들의 심술은 필시 과거의 일이다. 우리는 이제 더는 사물들에게 괴롭힘당하지 않는다. 사물들은 파괴적이고 저항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사물들은 위협적인 가시를 잃는다. 우리는 사물들의 다름이나 낯섦을 지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실재감Wirklichkeitsgefühl 이 약해진다.

더는 사물적 실재와 맞부딪치지 않는다. 그는 사물들의저항에 직면하지 않는다. 이처럼,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이들에게 흠뻑 주입된다. 모든 것에 대하여 신속한해법이(옳거니, 바로 앱이) 존재한다는 생각, 삶 자체가 다름아니라 문제 풀이라는 생각이 말이다.

사물의 등

그는 우리가 사물들을 도구로 대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는 인간 문화를"사물들의 등"에 얹혀 있는 아주 연약한 시설로 본다. 우리는 사물들의 "앞면 혹은 윗면만, 사물들의 기술적 친절함과 우호적 통합만 익히 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들의"밑면"도 보지 못하고 "사물 전체를 둘러싸고 띄우는 원소도 보지 못한다."
블로흐는 사물들의 친절함이 우리 쪽으로 놓인 앞면에불과할 가능성을, 사물들이 -실은 단지 경계벽을 부수고 인간 세계에 침입
했을 따름인-다른 세계에 속해 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사물들의 
친절함 뒤에는 비합리적인 고유의 삶이 있고, 그 고유의 삶이 인간의 의도들을 가로막는다고 추측

그 시절에는 바라봄으로서의 타자, 목소리로서의 타자가 늘 함께 있었다. 사르트르도 사물들에 의해 건드려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익히 안다. 《구토》의 주인공은자꾸 사물들과 접촉하게 되고, 이 때문에 소스라치게 당황

오늘날 세계는 바라봄과 목소리가 몹시 부족하다. 세계는 우리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는다. 세계는다름을 상실한다. 우리의 세계 경험을 규정하는 디지털화면은 우리를 실재로부터 격리한다. 세계는 탈실재화되고 탈사물화되고 탈신체화된다. 강해지는 자아는 이제더는 타자에 의해 건드려지지 않는다. 자아는 사물의 등을거울로 삼아 자신을 본다.
타자가 사라지는 것은 실은 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이사건은 워낙 은밀하게 일어나서, 우리는 이 사건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다. 
세계가 처분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객체들로만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세계와 관계 맺을 수 없다. 정보와 관계맺는 것도 불가능하다. 관계는 독립적인 상대를, 맞은편(상호성)Gegenseitigkeit을, ‘너‘를 전제한다. ‘너‘라고 말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고있지 않다. 다만 그는 관계 안에 있다." 처분 가능하고소비 가능한 객체는 ‘Du‘가 아니라 ‘그것‘이다. 관계와 결속의 결여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세계의 빈곤으로 이어진다. 다름 아니라 디지털 객체들의 홍수가 세계 상실을 가져온다. 화면에는 세계와 실재가 몹시 결핍되어 있다. 어떤 상대도, 어떤 ‘너‘도 없다면, 우리는 그저우리 주위를 돌 뿐이다. 우울증이란 다름 아니라 병적으로 심화한 세계 결핍을 뜻한다. 디지털화는 우울증을 확산시키는 한 요인이다. 정보권은 우리의 자기관계를 심화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의 욕구에 종속시킨다. 오로지 타자의 부활만이 우리를 세계 결핍으로부터 해방할수 있다.

유령

 편지 쓰기는 유령들을 상대하기다. 사람은 멀리있는 사람을 생각하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붙잡을 수있다. 다른 모든 것은 사람의 능력을 벗어난다. 글로 쓴입맞춤은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유령들이그 입맞춤을 가로채 깡그리 마셔버린다. 인류는 이를 느끼고 맞서 싸운다. 유령이 사람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최대한 배제하고 영혼의 평화를 이뤄내기 위하여 인류는철도, 자동차, 비행기를 발명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추락하는 와중에 제작한 발명품들에 불과하다. 상대편이 훨씬 더 강하다. 상대편은 우편에 이어 전보, 전화, 무선전신을 발명했다. 유령들은 굶어 죽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인류는 몰락할 것이라고 카프카는 결론 내린다.

디지털 소통은 인간관계를 심각하게 저해한다. 오늘날우리는 어디에서나 연결망에 속해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결합되어 있지 않다. 디지털 소통은 외연적이다. 그 소통은 집약성을 결여하고 있다. 연결망에 접속하기는 관계 맺기와 다르다. ‘너‘는 오늘날 어디에서나 ‘그것‘으로 대체된다. 디지털 소통은 인간적인 상대, 얼굴, 바라봄, ‘지금 여기에 몸소 있음 körperliche Gegenwart‘을 없앤다. 그렇게 디지털소통은 타자의 사라짐을 가속한다. 유령들은 같음의 지옥에거주한다.
인간은 가까움에 의지하는 근접 존재Nahwesen다. 그런데가까움은 거리 없음이 아니다. 가까움에는 멀리 있음이기입되어 있다. 가까움과 멀리 있음은 서로의 맞찍이다. 따라서 인간은 근접 존재이면서 또한 멀리 있음에 의지하는 원격 존재Fernwesen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붙잡거나 멀리 있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으며 다른 모든 것은 사람의 능력을 벗어난다고 카프카가 말하는 것이다. 디지털 소통은 모든 것을 거리 없게 만듦으로써 가까움과 멀리 있음을 모두 파괴한다. 타자와 관계 맺기는 거리를 전제한다. 거리는 ‘너‘가 ‘그것‘으로 전락하지 않게 해준다. 거리 없음의 시대인 오늘날 관계는거리 없는 접촉에 밀려난다.

실재 앞을 슬며시 가로막는 다량의 정보는 실재의 사물적인 층을 침식한다. 일찍이 후고 폰 호프만슈탈은 이렇게 일갈했다. "사물들 앞에 단어들이 자리잡았다. 주워들은 이야기가 세계를 삼켜버렸다."
사물에 대한 주의 향상은 자기 망각 및 상실과 짝을 이룬다. 내가 약화되면, 나는 저 고요한 사물 언어를 수용하게 된다. 여기 있음 경험은 바깥에 놓여 있음을, 상처받을 수 있음을 전제한다. 상처가 없으면 나는 궁극적으로 오직 나 자신의 메아리만 듣는다. 상처는 구멍, 곧 타자를 향해 열린 귀다. 오늘날 저 현현적 순간은, 자아가 점점 더강해진다는 이유만으로도 벌써 불가능하다. 사물들은 자아를 거의 건드리지 못한다.

예술에서의 사물 망각

예술품은 사물이다
기표들 곧 언어적 기호들로 이루어진 형태 구조물로서의 시는 의미들로 용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물이다. 물론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시를 읽을 수도 있지만, 의미는 시의전부가 아니다. 시는 감각적 - 신체적 차원을 지녔으며, 그차원은 의미 
곧 기의를 벗어난다. 다름 아니라 기표의 과잉이 시를 농축하여 사물로 만든다. 시는 우리의 포르노적 소비주의시대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날 우리는 시를 거의 읽지
않는다.
단어들은 "생각 없이" 또 "쉽게 잊히게" 종이에 적힌다. 요컨대 쓰기는 단어들에 명확한 뜻을 부여하려는 의도로부터 해방된다. 시인은 거의 무의식적인 과정에 자신을 내맡긴다. 시는 뜻을 생산하는 고역으로부터 해방된 기표들로 직조된다. 
오늘날 예술의 문제점은, 예술이 미리 품은 견해를, 이를테면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신념을 전달하는 경향이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오늘날의 예술은 정보를 전달하는 경향이 있다. 구상이 실행에 선행한다. 그리하여예술은 예시로 전락한다. 불특정한 열기가 표현 과정을규정하지 않는다. 이제 예술은 물질을 의도 없이 사물로조형하는 수작업이 더는 아니며, 오히려 미리 제작한 생각을 소통하는 생각 작업이다. 사물 망각이 예술을 휩쓸고있다. 소통이 예술을 독차지한다. 예술이 정보와 담론을 싣게 된다. 예술이 유혹하는 대신에 가르치려 든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죗값을 치르고 죄를 씻어내는 대신에 빚을 지게 만드는 숭배문화의 첫 사례입니다. 디지털화 초기에 사람들은 노동을 놀이로 대체하는 것을 꿈꿨지요. 하지만 현실에서 디지털 자본주의는 인간의 놀이 충동을 무자비하게착취합니다. 게임의 요소들을 집어넣어 사용자를 중독되게 만드는 소셜미디어들을 보세요.

스마트폰은 오늘날 디지털 강제노동수용소이거나 아니면 디지털 고해소이거나 둘 중 하나예요. 모든 지배 장치, 지배 기술은 고유한 성물들을 만들어내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데 동원하죠. 그런 성물들은 지배를 안정화합니다. 스마트폰은 디지털 지배체제의 성물이에요.
복종을 유도하는 장치로서 스마트폰은 묵주와 비슷한 역할을 해요. 묵주는 휴대하기 쉽고 다루기 쉽다는 점에서일종의 ‘핸디Handy‘ (‘핸드폰‘을 뜻하는 독일어 - 옮긴이)예요.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죠, 우리는 계속 고해告解해요.
자발적으로 발가벗지요. 그러면서 애원하는 것은 용서가아니라 주목이고요.

오직 억압적 체제만 저항을 유발합니다. 반면에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저항에 직면하지 않아요. 이 체제는 억압하지 않고 유혹해요.지배가 자유로 자처하는 순간, 지배는 완성됩니다.

인간 실존은 오늘날 행위에 철저히 흡수되어버립니다. 그렇게 실존이 완전히 착취 가능하게 되죠. 무위無는 자본주의적 지배질서의 내부에서 갇힌 바깥으로서다시 등장해요. 그 부위를 일컬어 여가라고 하죠. 노동으로부터의 회복에 종사한다는 점에서 여가는 여전히 노동에 매여 있습니다. 노동의 파생물로서의 여가는 생산 내부의 기능적 요소를 이루죠. 무위의 정치가 필요합니다.무위의 정치는 시간을 생산 강제로부터 해방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시간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진짜이고자 해요. 바꿔 말해,타인들과 다르고자 해요.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들과 비교하죠. 바로 이 비교하기 (같게 만들기)VerGleichen가 우리 모두를 같아지게 합니다. 요컨대 진정성강박이 같음의 지옥을 초래합니다.

자본주의는 실제로 인간의 충동구조들과 잘 어울려요. 하지만 인간은 충동 존재에 불과하지않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길들이고 문명화하고 인간화해야 해요.실제로 우리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죠. 사회적시장경제가 그 증거예요. 지금 우리의 경제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속가능성의 시대로 말이죠.

그렇게 스마트폰은 우리의 자아를 강화합니다. 손가락을 놀리면서 우리는 세계를 우리의 욕구들에 종속시키죠. 세계는 총체적 처분 가능성이라는 디지털 가상을띠고 우리에게 나타나요. 이를 통해 타자들이 사라집니다. 바로 처분 불가능성이 타자의 타자성을 이루거든요.오늘날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기고 단지 소비 가능한 놈으로 됩니다. 

저는 옛날의 아름다웠던 사물들을 떠올리게 할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사물의소멸》은 철학적인 책이 전혀 아니겠죠. 제가 사물을 삶의안식처라고 표현한 것은 사물이 인간의 삶을 안정화하기때문이에요. 같은 의자와 같은 탁자는 그것들 자신으로머무르면서 무상한 인간의 삶에 안정성과 연속성을부여하죠. 사물들 곁에서 우리는 하염없이 머무를 수 있어요. 반면에 정보 곁에서는 그러지 못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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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사재판은 검찰이 승리를 확신하고 시작한 판이라 어지간해서는 뒤집기 쉽지 않다. 국선변호사는 수사가 끝나고 재판이 개시된 뒤에야 사건을 맡는다. 시간이 꽤 흐른 뒤라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찾으러 돌아다녀봐도 증거가 모두 사라져 있기 일쑤다. CCTV 영상이나 피고인 자신의 휴대폰 통화 기록조차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결국 변호사의 일은 검찰이 조사해놓은 증거를 읽고 또읽으며 치고 들어갈 틈이 없을까 고민하는 식으로 진행된다.장기판에 앉는 순간 이미 주최 측에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는판세, 주최 측이 올려놓은 기물 외에 다른 기물을 판에 올릴수 없는 박보장기인 셈이다.

법률 규정을어느 정도 추상적으로 규정해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체적 사안에서 여러가지 정황을 참조해 탄력적으로 법을 해석 적용하는 것이 법률가의 역할이다.

총기소지가 불법이고 인구밀도가 높으며 경찰서가 비교적가까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정당방위의 범위를 좁게 가져가는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정당방위가 허용될 수도 있다는믿음을 주어 보복성 폭력 행위로 이어지게 하는 것보다, 팔을잡는 등의 현상 유지만 하게 하고 공권력을 빌어 사건을 처리하는 편이 폭력의 총량을 줄일 수 있는 길이다. 물론 몇몇 아쉬운 사건이 있긴 하지만 더 큰 위험을 줄이기 위해선 현행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전 지구적 분업이다.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너트가 우주왕복선에 들어갈지, 교량에 들어갈지, 기차에 들어갈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 너트로 인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걸 예측하기는 더욱 어렵다. 분업을 대규모로 하면 할수록 그 안에 있는 개개인은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어진다. 결국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사건처럼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대규모로 일을 벌이면 벌일수록 일에 가담한 개개인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가능성은 낮아지고, 반면 이로 인한 인명 피해 가능성은 극적으로 높아진다는 것이다.

대형 참사 이상으로위험한 것은 대중의 공포를 자양분으로 삼은 공권력이다.

살인자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살인이나 살인미수 혐의를 받는 피고인들이 고의를 부인하는 걸 변명으로만 봐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피고인들을 접견해보면 피고인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게 아닐까 싶다. 칼이 나올 정도면 굉장히 흥분된 상황 아니겠는가. 본인도 모르는 마음을 제3자가 의심의 여지 없이 입증하는 건 쉬운 일이아니다. 무죄추정의 원칙하에서 살인, 살인미수죄에 유죄판결이 나기 힘든 이유다. 윤일병 사건, 각종 어린이 학대 사건에서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죄가 적용된 이유도 결코 여기가
‘헬조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학수사는 언제나 과학적이라는 착각

DNA 수사를 제외한 나머지 과학수사에는 제각각 약점이있지만 그럼에도 이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DNA 증거가 발견되는 경우는 전체 범죄의 10%가 채 되지않기 때문이다. 수사 일선에서도 과학적 증거의 한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이를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실제 수사기록을 보면지문 증거 같은 과학적 증거만으로 범인을 특정하는 경우는찾아보기 힘들다. 현장의 족적, CCTV 촬영영상, 목격자의 진술 등 다양한 추가 증거를 통해 혹시 있을지 모르는 과학적·기술적 증거의 오류를 대비하고 있다.

형사처벌이 해결책일까평범한 태만들이 모여 발생하는 대형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선전 사회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얼렁뚱땅 형법에 맡겨지고 말았다. 대형 참사가 벌어지면 언론이나 정부가 나서서 원흉이 누군지를 지목하고, 지목된 사람을 강하게 처벌하면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이런 대형 재난에 형법이 최선의 해결책인 것처럼여겨지는 것은 매우 당혹스럽다. 앞서 두 사건이 보여주었듯 형법이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일단 금지하고자 하는 행위는 미리 법전에 규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소급효금지 원칙이다. 문제가 된 행위가 벌어진 뒤 부랴부랴 법을 만들어봤자 이미 벌어진 행동에대해서는 처벌할 수가 없다. 대형참사에 대한 대비책을 형법에게 맡기는 것은 결국 형법 입법자에게 사회 안전에 대한 예언자의 지위를 맡기는 것과 같다.

그 사회보호법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사회보호법의 잔재
치료감호법의 전신은 사회보호법이다. 삼청교육대에 비해 덜알려졌지만 사회보호법은 삼청교육대와 일란성쌍둥이 같은 법이다. 1980년 7월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삼청 계획5호‘를 만들어 시행했다. 
정권은그해 12월 상습범죄자와 정신질환 등의 문제가 있는 범죄자를 형벌과 별도로 장기 구금(보호감호)하거나 강제 입원치료감호시킬 수 있는 ‘사회보호법‘을 제정했다. 그 첫 대상자는 삼청교육대를 출소한 사람들이었다. 삼청교육대를 나오자마자 법원판결도 없이 1년에서 5년 사이의 보호감호 처분을 받게 된 것이다.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은 금전 부담 없이 사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통원치료를 받을 수 있다. 국가로부터 의료비 지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고인은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피고인의 어머니가 집을 소유하고 있고 수입이있어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으로 지정받을 수가 없었기때문이다. 
어머니의 수입으로는 딸을 정신병원에 장기 입원시킬 수도 없는 처지라 어머니는 딸이 치료감호소에라도 가있길 바랐던 것이다.

형사처벌이 해결책일까평범한 태만들이 모여 발생하는 대형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선전 사회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얼렁뚱땅 형법에 맡겨지고 말았다. 대형 참사가 벌어지면 언론이나 정부가 나서서 원흉이 누군지를 지목하고, 지목된 사람을 강하게 처벌하면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이런 대형 재난에 형법이 최선의 해결책인 것처럼여겨지는 것은 매우 당혹스럽다. 앞서 두 사건이 보여주었듯 형법이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일단 금지하고자 하는 행위는 미리 법전에 규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소급효금지 원칙이다. 문제가 된 행위가 벌어진 뒤 부랴부랴 법을 만들어봤자 이미 벌어진 행동에대해서는 처벌할 수가 없다. 대형참사에 대한 대비책을 형법에게 맡기는 것은 결국 형법 입법자에게 사회 안전에 대한 예언자의 지위를 맡기는 것과 같다.

아직은 범인이 아니기 때문에

무죄추정은 매우 간단한 원칙이다. 재판정에서 유죄로 확정될 때까지는 피고인을 무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 유죄판결을 하고 싶다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이 유죄임을 입증해야만 한다‘는 검사 입증책임의 원칙도 여기서 도출된다. 피고인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그를처벌할 수 없다는 당연한 원칙이다. 하지만 연일 보도되는 흉악 범죄 뉴스 앞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피고인 보호보다 피해자의 고통이 우선이라는 주장앞에서 피고인의 인권과 무죄추정의 원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관찰함으로써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0에 수렴하지만, 이를 어김으로써 무고한 사람이 받는 고통은 심대하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관찰함으로써 발생하는 불이익은 딱 하나다.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짧으면 몇 개월 길면1~2년 동안 피고인에게 죄를 묻지 않는 것. 그것뿐이다.

때론 법이 죄를 짓기도 한다

어떤 일에 대한 가치판단은 유보한 채 어떤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지 따질 뿐이다.
심지어 재판에서는 죄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조차 하지않는다. 재판에서의 죄는 ‘형법에 죄라고 적혀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법원이 법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을 삼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국민이 선출한 국회가 제정한 법을 행정부나 사법부가 제멋대로 무력화시키는 것은 권력분립이라는 헌법적 가치에 대한 유린이다. 나치 전범 처벌을 위해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가 만든 법에 근거해 재판을 했던 판사들의 "우리는 단지 법대로 재판만 했을 뿐"이란 변명에도 이해할 구석이 없지는 않다.

왜 상습절도범에 대한 중벌 조항만 가장 늦게 위헌 결정을받은 걸까. 아마도 이들의 처지를 공감하고 대변해줄 사람이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부당한 처벌을 받는 자가 정치인, 해직기자, 대학생이 아니라 절도범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 제도가 악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 악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 대한 믿음이다. 물론 여전히 온도 차는 존재하지만 말이다.

형사재판에서 가장 강력한 증거

진단서는 해당 분야의전문가가 자신의 의견을 진술한 감정서의 한 종류다. 결국 의사의 주관이 상당 부분 개입될 수밖에 없다. 진단서의 이러한성격은 최근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백남기 씨 사망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경찰의 물대포가 원인으로 지목될 경우 자연스레 정권의 책임 논란으로 이어질 상황에서, 담당의사가 사망진단서에 기재한 직접 사인은 ‘심폐정지‘였다. 심장과 폐가 멎지 않고도 사망하는 경우가 있나? 심폐정지란 사망 원인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사망의 동어반복일 뿐이다. 당연히 사망진단서의 적절성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고 글을 쓰는 현재까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백씨에 대한 사망진단서의 적절성을 떠나, 이에 대해 논쟁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진단서의 주관적 측면을 잘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진단서에 기재되는 의견은 ‘최종 결론‘이 아니라
‘추정‘이 대부분이다. 진단서에는 ‘임상적 추정‘ 진단서와 ‘최종진단‘ 진단서 두 종류가 있다. 임상적 추정 진단서는 환자의 말에 기초해 의사가 자신의 추정을 적은 진단서이고, 최종 진단서는 환자의 말뿐만 아니라 객관적 검사 결과가 뒷받침되어야만 발급되는 진단서이다. 둘 중 형사재판에 주로 제출되는 진단서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전자다. 지금껏 형사재판에 최종진단서가 제출되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의심스러운 ‘머리가 울린다‘는 주장에 근거해 작성된 추정적 진단서를 믿고 피해자에게 뇌진탕이 발생했다 인정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기간과 치유까지 걸리는 기간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법정에 제출되는 진단서를 보면 치료 기간과치유 기간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시비 중에 상대방이 밀치는바람에 목을 삐끗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경우 보통 경추염좌2주 진단을 받아 오는데, 진단서만으로는 이 2주가 치료 기간인지 아니면 그냥 놔둬도 자연스럽게 2주 후에 치유된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중대성이 하늘과 땅 차이인데 이를 구분하지 않는 셈이다.

꾀병 환자를 완벽히 골라낼 수 없는 한계가 있다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일단 형사법정에서라도 ‘임상적 추정 진단서‘를 내몰아야 한다. 혹은 검찰, 법원 등과 의료계가논의하여 현재 불분명하게 작성 제출되고 있는 진단서 대신사법기관용 진단서 양식을 마련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 기준은 다시 논의해야 하겠지만, 환자 본인만 주장하는 자각 증세와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타각 증세, 치료기간과 치유기간 정도는 명확히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이었을까 폭력이었을까

마을 사람 전체가 지적장애인을 수년에 걸쳐 성적 착취하는 일이 빈발하는 상황과, 평생 성폭력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지적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런 범죄에는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무죄추정의원칙 그리고 ‘10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는 원칙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그 못지않은 재앙이 발생할수도 있다고 배웠다. 인간 사상의 역사라는 게 전 시대의 도그마를 깨부수며 발전해온 것이라지만 과연 무죄추정의 원칙을버려도 되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사실상 주변 정황만으로 성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지금의 방식은 무죄추정의 원칙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방식이 과연 피고인만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지적장애인 역시 상대를 선택하고 성관계를 즐길 권리가 있다. 그 관계에 대해 국가가 광범위하게 개입한다면 결국 사람들은 지적장애인과의 성적 접촉을 기피하게 될 것이다. 같은 장애인이라고해서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니 이는 비장애인이나장애인이나 매한가지이다. 눈앞의 불행을 막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애인과 그 가족들 앞에서, 멀리 있어 잘보이지도 않는 행복을 얘기하는 건 무책임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궁금한 건 지적장애인 본인들의 얘기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그동안 만났던 연인들이 모두 수사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여전히 심연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피고인

오판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고 그결과 여러 원인이 제시되었다. 그 원인 중 주목할 만한 것이 있었는데, 억울한 유죄 사례 250 건 중 16%에 해당하는 40명이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백했다는 것이다. 그중 2명을 제외한 38명은 모두 진범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었던 범행당시의 구체적 상황에 대해 진술하기까지 했다.
수사 과정에서 이들이 고문이라도 당한 것일까? 상식과 달리 피고인들은 고문이나 폭행의 행사가 없는 상태에서도 허위자백을 하곤 한다. 왜 피고인들은 강요가 없을 때도 스스로를해치는 선택을 하는 것일까.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여러 연구가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한 연구에 따르면고립감, 무력감, 공포감에 사로잡힌 피고인이 수사관을 협력 대상으로 생각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과정에서 허위 자백이 발생한다고 한다.
여전히 그리고 꽤나 자주 피고인들에게 자백을 권유해보곤하지만 항상 조마조마하다. 내가 담당했던 피고인들 중에도 혹시나 때문에 허위 자백을 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무죄를 받을 수 있는 재판

피고인 입장에서 국민참여재판의 진정한 의미는 선택권이다. 행정부, 입법부의 경우 직접 투표를 통해 그 구성에 관여할수 있지만 사법부의 경우 구성에 관여할 직접적 수단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절차에서도 마땅한 민원 제기 수단이 없었다. 재판장이 재판 시작부터 불친절하게 하거나 선입견을 내비쳐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기피 제도가 있긴 하나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되면서나름의 선택권이 생겼다. 내 경우는 이 선택권을, 법원이 판례에 매여 기존 입장을 고수하던 사안에서 다른 판결을 받기 위해 주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시각을 가진 배심원에게 판단할권한이 생겼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물론 국민참여재판에 적합한 사건일 경우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나는 어떤 뉴스에도 댓글을 달지 않는다.

공직선거법을 악법이라 칭한 이유는 선거의 자유, 공정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문제는 공직선거법에는 평범한 시민의 직관에 반하는 내용이 많지만 너무 자주 바뀌고, 그 내용도 제대로 홍보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술김에 선거 벽보에 불을지른다든지, 선거 여론조사를 조작한다든지, 공천 대가로 돈을 받는다면, 그건 누가 봐도 법에 위반되는 일이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선거에 대해 조금만 입을 잘못 놀려도 전과자가 될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앞서 언급한 명함 돌리기, 조명판 설치는 보통 사람과는 그닥 인연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직선거법의 처벌 범위는 이것보다 훨씬 넓다. 선거운동과 거리를두고 살아가는 사람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넓은 처벌 범위 때문에 악용 가능성 역시 높다.

사실 공직선거법 중에 가장 일반인의 직관과 거리가 먼 조항이 바로 위 피고인들에게 적용된 법조항이다. 후보자에 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하면 처벌을 받는다. 그게 인터넷 기사에단 댓글이라도 피할 수가 없다. 심지어 악플이 아니라 피고인을 칭찬하는 내용이라도 그 내용에 허위사실이 포함되어 있으면 처벌대상이 된다(공직선거법 제250조 허위사실공표죄). 댓글을 하나 쓸 때마다 허위사실이 포함되어 있는지 명확히 따져보고 써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댓글로 적은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후보자를 비방하는 내용이면 처벌이 된다(공직선거법 제251조 후보자 비방죄). 놀랍게도 이런저런 사실관계 언급없이 순수하게 욕설만 퍼붓는 것은 공직선거법 위반이 아니다(물론 형법상 모욕죄가 성립할 수는 있다). 결국 선택지는 두 가지가 남는다. 사실관계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이 교장 선생님 훈화말씀처럼 물에 물 탄 듯한 미사여구만 동원해서 댓글을 달거나 아니면 그냥 조용히 기사만 읽고 지나가거나 해당 조항은‘전 국민 전과자
만들기 프로젝트‘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정치관련 기사에 한 번이라도 댓글을 단 기억이 있다면 해당 조항위반 여부를 걱정해야 한다.
이 조항의 악용 가능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근거는,3명의 피고인들이 하나같이 여당 후보이자 당선자인 박근혜후보를 비방했기 때문이었다. 달랑 세 명을 맡으면서 이런 의심을 하게 된 까닭은, 그 수사 과정이 무척 기묘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범죄에 대해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방법은 피해자나 목격자가 고소나 고발을 하거나 아니면 수사관이 범죄 사실을 알게 되서 자체적으로 수사를 개시하는 것, 단 두 경우뿐이다. 이 피고인들의 경우는 수사관이 범죄를 인지하면서 수사가 개시됐다. 수사관이 인터넷 포털 등에 올라온 게시글을 읽어보다 피고인들의 글과 댓글에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보아 수사를 개시한 것이다. 그리고 3개월 정도 지나 피고인들이그동안 작성한 게시글과 댓글 중 공직선거법 위반된 것을 골라 기소했다. 비유를 하자면 도둑을 발견하고도 가만히 지켜본셈이었다. 범죄의 현장을 발견했다면 한시라도 빨리 범죄자를체포해서 범죄가 계속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적법한 수사인가 사이버 미행인가

어찌 됐든 피고인들에 대한 방어를 해야만 했다. 처음 문제 삼아보려 한 것은 독수독과이론이었다. 독나무에서 열린 열매에는 독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위법한 절차를 통해 수집된 증거는 그 내용의 진위를 불문하고 증거능력을 부인해야 한다는이론이다. 

수사관들은 3개월 동안 피고인들을 사이버 미행한 것과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수사기관의 이런 증거 수집행태가 부당한 정도를넘어 현행법상 규정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어야 독수독과이론을 적용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범죄를 인지하고도 3개월 간지켜만 본 행위가 현행법의 어떤 규정을 위반했는지 입증해야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공직선거법 자체가 문제였다. 현행법상 사실을 댓글로 달아도 범죄가 성립하니, 수사기관으로선 누구든범죄 혐의자로 지목해놓고 느긋이 지켜볼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셈이다.
나는 현행법을 떠나 헌법정신에 위반된 수사라고 주장했다. 선거를 앞두고 시민이 뭔 댓글을 다는지 면밀히 관찰한 것은 정치사찰 아닌가. 하지만 이정도로는 부족해 보였다. 헌법정신이라는 추상적인 이유로 법원이 쉽사리 수사기관의 수사를 무효화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결국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를 받아냈다. 인정받은 무죄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이 사건은 내 인생에 큰 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맡은 이후로 나는 그 어떤 뉴스에도 댓글을 달지 않는다. 한참을 고민하고 달았던 댓글도 이내 삭제해버리곤 한다. 명색이 변호사인데 유죄를 받을 만한 댓글을 쓰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유무죄가 아니다. 무죄 받기까지 받아야만 하는 스트레스가 두렵다.
특히나 사실을 적시해도 이를 문제 삼아 공권력이 내 댓글을감시할 수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이 사건 이후로 좋아하던 인터넷 정치 댓글을 끊어버린 피고인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난 결과가 바로 위축 효과다.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법안이 무서운 것은 해당 법이 금지하는행위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행위까지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표현물 중에는 저열한 것들이 패섞여 있지만 무턱대고 이를 규제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다.
나이를 먹고 나니 어떤 주장이 나오면 그 주장 자체보다그 주장으로 인해 가장 이익을 볼 사람이 누군지를 생각해는 버릇이 생겼다. 어린 시절 주구장창 들었던 ‘악법도 법이다‘
는 아마도 사람들이 악법에 저항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당시군사정권이 가장 좋아할 만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요즘은‘악플로 
사람 죽인다‘는 주장이 무척 수상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연예인들의 정신건강을 걱정했단 말인가. 이 주장으로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은 연예인이 아니라 정치인들 아닐까.

범죄자 처벌은 국가가 대신하는 복수일까

억울한 마음에 가해자를 고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기에 형사소송의 아이러니가 있다. 피해자는 형사소송의 주인공도 조연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단역 ‘이하‘라 할 수 있다.‘이하‘라고 한 것은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피해자 없이재판을 해도 되는 건지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개인 간의 문제를 처리하는 민사재판과 달리 형사재판은국가가 피고인의 죄를 묻는 구조이다. 형사소송의 일방 당사자는 검사고 그가 상대 당사자인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법원에요청하는 구조다. 이런 구조가 만들어진 근원에는 형벌을 범죄자에 대한 복수로 보지 않는 합목적적 철학이 깔려 있다. 사형폐지론의 주된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사형이 무기징역보다 강력범죄 억제력이 높지 않다는 점 아닌가. 그 기저에는 형벌을 범죄 억제 수단으로 한정하는 사고방식이 있다.


하지만 현대 형법은 기본적으로 이에 무심하다. 사적 복수를 허용하지 않고 국가가 대신하여 형벌권을 행사하는 이유는복수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다. 복수가 복수를 낳아 사회적폭력의 총량이 느는 것을 막는 것이다. 집행유예 역시 이런 고려 하에 마련된 제도다. 실형을 통해 직장과 같은 사회적 기반을 잃은 사람은 다시 한 번 범죄에 빠지기 쉽다. 재범의 위험성이 그리 높지 않다면 실형보다는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편이범죄의 총량을 줄이는 데 더 낫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일 것이다.
얀 필립 림츠마!an Philipp Reemtsma는 독일의 문학 연구가이자철학자이다. 그는 1990년대 후반 독일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납치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유명 담배 회사의 설립자인 조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그를 두고 납치범들은오랫동안 범행을 계획했다. 림츠마는 32일 동안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의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간이 변기에서 용변을 해결해야만 했다. 살해 위협을 받던 그는 결국 3억마르크라는 거액의 석방금을 지불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당시의 경험을 기록한 <지하실에서 Im keller〉라는 수기를 집필했는데 그중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내일 내게 그자의 목을 가져다준다 해도 거기서 내가 얻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가 재판정에 서는것이다. 나에게 위안이 되는 응보는 증오에 있지 않다. (중략)피해자에게 처벌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처벌이 그의 복수욕을 충족시켜주어서가 아니다. 처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이를통해 사회가 피해자와 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형벌은 범죄자를 밀쳐내는 것임과 동시에 피해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피해자에게 ‘귀환을환영한다‘는 편지와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사회가 배제하는 대상

-보수 정권의 대범죄
 정책국토건설단, 삼청교육대, 범죄와의전쟁, 떼법청산, 경범죄 처벌 강화, 그동안 보수 정권들이 내걸었던 정책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로 수장의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내용은 하나같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범죄를 근절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형벌은 범죄에 대한 기술적 대응이 아니다. 교도소수감자 수가 범죄발생 빈도와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도 이루어진 바 있다. 형벌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인 갈등주의적 관점 conflict perspective은 형벌제도를 ‘기득권 집단이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는 수단‘이라고 규정한다. 형벌이 피지배 계급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한 도구라고 설명하는 학자도 있다. 민주국가라고 해서 이 같은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지배 계층은 미디어를 통해 범죄의 위험을 환기시키고 대중들이 강력한 공권력의 개입을 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박노자 씨의 글에는 이런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의 구분이 명확하고 피착취자가 주린배조차 메우지 못하는 전근대사회에서 피착취자의저항은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고, 그저항을 미리부터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착취자들의 급선무였다. 저항에 대한 최적의 ‘예방주사‘란 바로 고문과 참혹한 처형을 최대한 가시화함으로써 잠재적 반란자들에게 극심한 신체적 ‘아픔‘에 대한생물적 공포를 자극해 그들의 저항 의지를 미리부터 꺾는것이었다. 생물체라면 불에 달군 대꼬치에 대해 느끼지 않을수 없는 ‘동물적 접‘이야말로 ‘동방예의지국‘이 유지될 수 있는 하나의 비결이었다. (중략)1808년 이전의 ‘자본화의 선진국‘ 영국에는 죽임을 당해야할 사죄만 해도 약 220종에 달했다. "일정한 직업 없이집시의 무리와 한 달 이상 같이 어울려 노는 죄"부터 "실링이상의 가치에 해당하는 물건을 훔친 죄까지다. 값이 좀 나가는 손수건 하나를 훔쳤다가 죽어야 하는 세상이다 보니한 해에 2~3천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도 다반사였다. 예컨대 영국 자본주의의 맹아기라고 할 엘리자베스 1세치세(1558~1603)에 약 8만9천 명의 수형자가 처형됐다. 그때보다 약간 ‘문명화‘됐다는 1770~1830년만 해도 좀도둑과 부랑자 등을 포함한 7천 명이 죽어야 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었지만 19세기 중반까지 공개 처형은 보통 일이었다. 이렇게 주검 더미를 쌓아가면서 신생의 자본계급은 무산자들을순치시켰던 것이다.

○ 박노자,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한겨레출판

처벌이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서 배제해야할 적이 누군지 지목하고 그를 배제하는 행위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사회가 배제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복잡한 일일랑 잊고 그저 사회 안전과 치안에 기대면 되는 건지도 모른다. ‘나쁜 일을 저지른 인간들은 어느 정도의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사회에서 발언권을 상실한 것 역시 자업자득이다‘라고볼 수도 있다. 하지만 범죄와 형벌의 정치적 속성을 잊는 것이항상 안전한 선택만은 아닌 듯 하다.
갈등주의적 관점은 우리에게 불길한 예언 하나를 던지고있다. 대범죄정책은 그 대상을 확대하는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흉악 범죄와 상습범죄를 그 대상으로 삼지만나중에는 사회질서 문란 행위까지 확대를 시도한다고 한다. 법질서를 세우고 처벌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킨다는 발상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번째 국무회의에서 경범죄에 대한 처벌 확대를 선언한 것이 그저 우연일까.

알아서 지켜야 하는 법

몰라서 지은 죄

대학에 가서 법을 공부하고 처음 든 생각은 ‘왜 의무교육과정에서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나‘이다. 세상은 전쟁터라고 하는데 총 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내몰린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덕에 나같은 변호사들이먹고살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심하다.

사람들의 법 지식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일을 하면서 자주느낀다. 범죄 경험이 없는 초범과 전과가 많은 상습범 중 혐의를 순순히 인정할 확률이 높은 쪽은 누구일까? 전과자 쪽이뺀질거리며 뻔한 변명을 늘어놓을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초범에게는 ‘당신의 경우는 왜 정당방위가 아닌가‘, ‘상대가 아무런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어도 성범죄가 성립할 수 있다‘ 같은 법리를 한참 설명해줘야 자신의 죄를 납득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전과가 많은 경우는 거의 염화미소 수준이다. 자신의 죄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유죄라면 어떤 죄에 해당하는지 대체로 잘 안다. 웬만해선 무리한 주장을 하지도 않는다. 초범들의 경우, 지금 얘기해준 걸 그때 알았다면 과연 죄를 지었을까 싶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우리‘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법의 기능 중 하나가 ‘사회 통합 기능‘이라 학교에서 배웠다. 그땐 속으로 ‘무슨 지역 특산물도 아니고 좋은 기능은 다 있다고자랑하네‘ 라고 혀를 끌끌 차고 말았지만 국선변호를 하면서그때 배운 게 맞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법은 규칙이다. 사회생활에 적용되는 이 규칙이 모두가 납득할 만큼 잘 정립되어있다면 법질서와 사회에 대한 충성심이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가끔 이 사회 통합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나 의문이들 때가 있다. 규칙이 아무리 공평하게 정립되어 있다 하더라도그 내용이 사회 구석까지 전달되지 않았다면 과연 이를 공평하다 할 수 있을까. 교육 혜택에서 멀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법의 사회 통합 기능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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