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나 《심리정치》 같은제 저서들의 바탕에 깔린 통찰은 푸코의 규율사회 분석이 우리의 현재를더는 설명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규율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구별합니다. 규율 체제는 명령과 금지를 통해 작동하죠. 그 체제는 억압적이에요. 자유를 억누릅니다. 반면에 신자유주의 체제는 억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유혹적이고 허용적입니다. 이 체제는 자유를 억압하는 대신에 착취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고 믿으면서 자발적으로 또 열정적으로 우리 자신을 착취하죠. 요컨대 우리는 규율사회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성과사회에서 살아요. 이것을 푸코는 보지 못했어요. 자기가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신자유주의적 성과 주체는 실은 노예입니다. 주인 없이 자발적으로 자기를 착취한다는 점에서 그 주체는 절대적인 노예죠.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과 짝을 이루기 때문에 외래적인 착취보다 더 효과적이에요. 이 역설적인 노예의 자유를 카프카의 다음과 같은 경구가 아주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동물이 주인에게서 채찍을 빼앗아 자기를 채찍질한다. 주인이 되기 위해서." 이 꾸준한 자기 채찍질은 피로와 우울감을 일으켜요. 노동 그 자체는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심각한 피로를 유발하지 않습니다. 노동하고 나면 기력이 소진될 수야 있겠지만, 이 소진은 파괴적인 피로와 다릅니다. 노동은 언젠가 끝나요. 반면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과하는 성과 강제는 노동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되죠. 그 성과 강제는 잠들었을 때도 우리를 괴롭히고 드물지 않게 불면증을 일으킵니다. 노동에서 회복하는 것은 가능해요. 그러나 성과 강제에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내적 압력, 이성과 압력과 최적화 압력이 우리를 피로하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시대의 병적 징후는 억압이 아니라 우울이에요. 오직 억압적 체제만이 저항을 유발합니다. 반면에 자유를 억누르지 않고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저항에 직면하지않아요. 지배가 자유로 자처하는 순간, 지배는 완성되죠. 이것이 저의 사회비판적 에세이들의 바탕에 깔린 깨달음들입니다. 이 깨달음들을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요. ‘타자가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땅에게 고유의 신비와 마법을 돌려줘야 하고 경탄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땅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일 거예요. 절대적지위를 점한 인간적 행위는 땅을 파괴합니다. 우리는 행위하지 않는 능력을 발견해야 해요. 지구는 자원이 아닙니다.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한낱 수단이 아니라고요. 오늘날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은 경탄하며 바라보기가 아니라 오로지 도구를 다루는 행위에 의해 규정되지요. 인류세는 바로 지구자연이 인간 행위의 법칙들에 철저히 종속된 결과입니다. 지구자연은 인간 행위의 구성 요소로 격하될 거예요. 인간의 행위는 인간들 사이의 영역을 넘어 자연을 침범합니다.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뜻에 완전히 종속시키니까요. 그러면서 인간은 자신의 개입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과정들이 고삐에서 풀려나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죠 오로지 무위爲, Untätigkeit의 천사만이 그 폭풍에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위의 능력, 행위하지 않을 능력을 되찾아야해요. 그래서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새 책의 제목은 《관조하는 삶: 무위에 관하여>입니다.이 책은 인간의 행위를찬양하는 한나 아렌트의 책 《능동적인 삶 행위하는 삶에관하여>의 맞수, 혹은 해독제입니다.
리추얼들이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삶의 철저한 유동화는 상실을 동반해요. 리추얼은 그저 자유를 제한하기만 하지 않아요. 리추얼은 삶을 구조화하고 안정화합니다. 리추얼은 공동체를 창출하는 가치들과 상징적 질서들을 몸에 정박해요. 리추얼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공동체의 가까움을 몸으로 체험합니다. 반면에 디지털화는 세계를 탈신체화합니다. 자아를 중심에 놓은 진정성 문화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신자유주의예요. 진정성 문화는 리추얼화된 상호작용 형식들에 대한 불신을 조장합니다. 오직 자발적인 느낌의 동요만, 바꿔 말해 주관적 상태만 진정성이 있다는식이죠. 형식화된 행동은 진정성이 없다거나 겉치레라는이유로 제거됩니다. 예컨대 공손함이 그래요. 나르시시즘적 진정성 숭배는 사회의 야만화를 심화하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제 책에서 저는 진정성 숭배에 맞서 아름다운형식들의 윤리를 옹호합니다. 공손한 형식들은 한낱 겉치레가 아니에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바꾸고 새로운 상태를 창출합니다. 바로 이것이 리추얼의 힘이에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의식은 더는 사물들에 정박해있지 않습니다. 외적인 것으로서의 사물은 의식을 아주 효과적으로 안정화할수 있어요. 반면에 정보로 의식을 안정화하기는 아주 어려워요. 왜냐하면 정보는 덧없고 현재성을 띠는 기간이아주 짧거든요.
선생님은 <사물의 소멸》의 끄트머리에서 아름답게도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인용하면서, 오늘날 위태로워진 신뢰, 결속, 책임 같은 가치들을언급합니다.
신뢰, 충실Treue, 결속, 책임을 비롯한 모든 시간집약적 실행들이 지금 사라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단기화 短期化되고 있어요. 그 덕분에 우리가 더 자유로워졌다고 우리는 말하죠. 그러나 이 단기성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들에 매어둘 수는있지만 정보에 매어둘 수는 없어요. 우리는 정보를 잠깐만 알아둡니다. 그 잠깐이 지나면 정보의 존재지위는 이미 다 들은 자동응답기 메시지와 같아져요. 가치가 0에수렴한다는 거죠. 예컨대 신뢰는 오늘날 투명성과 정보에 치여 해체되고 있는 사회적 관행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뢰는 앎이 부족하더라도 타자와 긍정적 관계를맺을 능력을 우리에게 제공해요. 투명사회에서 사람들은 대뜸 타자에 관한 정보를 요구합니다. 사회적 관행으로서의 신뢰는 불필요해져요. 투명한 정보사회는 불신의사회를 낳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