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은 검찰이 승리를 확신하고 시작한 판이라 어지간해서는 뒤집기 쉽지 않다. 국선변호사는 수사가 끝나고 재판이 개시된 뒤에야 사건을 맡는다. 시간이 꽤 흐른 뒤라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찾으러 돌아다녀봐도 증거가 모두 사라져 있기 일쑤다. CCTV 영상이나 피고인 자신의 휴대폰 통화 기록조차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결국 변호사의 일은 검찰이 조사해놓은 증거를 읽고 또읽으며 치고 들어갈 틈이 없을까 고민하는 식으로 진행된다.장기판에 앉는 순간 이미 주최 측에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는판세, 주최 측이 올려놓은 기물 외에 다른 기물을 판에 올릴수 없는 박보장기인 셈이다.
법률 규정을어느 정도 추상적으로 규정해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체적 사안에서 여러가지 정황을 참조해 탄력적으로 법을 해석 적용하는 것이 법률가의 역할이다.
총기소지가 불법이고 인구밀도가 높으며 경찰서가 비교적가까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정당방위의 범위를 좁게 가져가는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정당방위가 허용될 수도 있다는믿음을 주어 보복성 폭력 행위로 이어지게 하는 것보다, 팔을잡는 등의 현상 유지만 하게 하고 공권력을 빌어 사건을 처리하는 편이 폭력의 총량을 줄일 수 있는 길이다. 물론 몇몇 아쉬운 사건이 있긴 하지만 더 큰 위험을 줄이기 위해선 현행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전 지구적 분업이다.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너트가 우주왕복선에 들어갈지, 교량에 들어갈지, 기차에 들어갈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 너트로 인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걸 예측하기는 더욱 어렵다. 분업을 대규모로 하면 할수록 그 안에 있는 개개인은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어진다. 결국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사건처럼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대규모로 일을 벌이면 벌일수록 일에 가담한 개개인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가능성은 낮아지고, 반면 이로 인한 인명 피해 가능성은 극적으로 높아진다는 것이다.
대형 참사 이상으로위험한 것은 대중의 공포를 자양분으로 삼은 공권력이다.
살인자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살인이나 살인미수 혐의를 받는 피고인들이 고의를 부인하는 걸 변명으로만 봐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피고인들을 접견해보면 피고인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게 아닐까 싶다. 칼이 나올 정도면 굉장히 흥분된 상황 아니겠는가. 본인도 모르는 마음을 제3자가 의심의 여지 없이 입증하는 건 쉬운 일이아니다. 무죄추정의 원칙하에서 살인, 살인미수죄에 유죄판결이 나기 힘든 이유다. 윤일병 사건, 각종 어린이 학대 사건에서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죄가 적용된 이유도 결코 여기가 ‘헬조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학수사는 언제나 과학적이라는 착각
DNA 수사를 제외한 나머지 과학수사에는 제각각 약점이있지만 그럼에도 이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DNA 증거가 발견되는 경우는 전체 범죄의 10%가 채 되지않기 때문이다. 수사 일선에서도 과학적 증거의 한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이를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실제 수사기록을 보면지문 증거 같은 과학적 증거만으로 범인을 특정하는 경우는찾아보기 힘들다. 현장의 족적, CCTV 촬영영상, 목격자의 진술 등 다양한 추가 증거를 통해 혹시 있을지 모르는 과학적·기술적 증거의 오류를 대비하고 있다.
형사처벌이 해결책일까평범한 태만들이 모여 발생하는 대형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선전 사회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얼렁뚱땅 형법에 맡겨지고 말았다. 대형 참사가 벌어지면 언론이나 정부가 나서서 원흉이 누군지를 지목하고, 지목된 사람을 강하게 처벌하면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이런 대형 재난에 형법이 최선의 해결책인 것처럼여겨지는 것은 매우 당혹스럽다. 앞서 두 사건이 보여주었듯 형법이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일단 금지하고자 하는 행위는 미리 법전에 규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소급효금지 원칙이다. 문제가 된 행위가 벌어진 뒤 부랴부랴 법을 만들어봤자 이미 벌어진 행동에대해서는 처벌할 수가 없다. 대형참사에 대한 대비책을 형법에게 맡기는 것은 결국 형법 입법자에게 사회 안전에 대한 예언자의 지위를 맡기는 것과 같다.
그 사회보호법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사회보호법의 잔재 치료감호법의 전신은 사회보호법이다. 삼청교육대에 비해 덜알려졌지만 사회보호법은 삼청교육대와 일란성쌍둥이 같은 법이다. 1980년 7월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삼청 계획5호‘를 만들어 시행했다. 정권은그해 12월 상습범죄자와 정신질환 등의 문제가 있는 범죄자를 형벌과 별도로 장기 구금(보호감호)하거나 강제 입원치료감호시킬 수 있는 ‘사회보호법‘을 제정했다. 그 첫 대상자는 삼청교육대를 출소한 사람들이었다. 삼청교육대를 나오자마자 법원판결도 없이 1년에서 5년 사이의 보호감호 처분을 받게 된 것이다.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은 금전 부담 없이 사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통원치료를 받을 수 있다. 국가로부터 의료비 지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고인은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피고인의 어머니가 집을 소유하고 있고 수입이있어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으로 지정받을 수가 없었기때문이다. 어머니의 수입으로는 딸을 정신병원에 장기 입원시킬 수도 없는 처지라 어머니는 딸이 치료감호소에라도 가있길 바랐던 것이다.
형사처벌이 해결책일까평범한 태만들이 모여 발생하는 대형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선전 사회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얼렁뚱땅 형법에 맡겨지고 말았다. 대형 참사가 벌어지면 언론이나 정부가 나서서 원흉이 누군지를 지목하고, 지목된 사람을 강하게 처벌하면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이런 대형 재난에 형법이 최선의 해결책인 것처럼여겨지는 것은 매우 당혹스럽다. 앞서 두 사건이 보여주었듯 형법이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일단 금지하고자 하는 행위는 미리 법전에 규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소급효금지 원칙이다. 문제가 된 행위가 벌어진 뒤 부랴부랴 법을 만들어봤자 이미 벌어진 행동에대해서는 처벌할 수가 없다. 대형참사에 대한 대비책을 형법에게 맡기는 것은 결국 형법 입법자에게 사회 안전에 대한 예언자의 지위를 맡기는 것과 같다.
아직은 범인이 아니기 때문에
무죄추정은 매우 간단한 원칙이다. 재판정에서 유죄로 확정될 때까지는 피고인을 무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 유죄판결을 하고 싶다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이 유죄임을 입증해야만 한다‘는 검사 입증책임의 원칙도 여기서 도출된다. 피고인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그를처벌할 수 없다는 당연한 원칙이다. 하지만 연일 보도되는 흉악 범죄 뉴스 앞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피고인 보호보다 피해자의 고통이 우선이라는 주장앞에서 피고인의 인권과 무죄추정의 원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관찰함으로써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0에 수렴하지만, 이를 어김으로써 무고한 사람이 받는 고통은 심대하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관찰함으로써 발생하는 불이익은 딱 하나다.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짧으면 몇 개월 길면1~2년 동안 피고인에게 죄를 묻지 않는 것. 그것뿐이다.
때론 법이 죄를 짓기도 한다
어떤 일에 대한 가치판단은 유보한 채 어떤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지 따질 뿐이다. 심지어 재판에서는 죄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조차 하지않는다. 재판에서의 죄는 ‘형법에 죄라고 적혀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법원이 법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을 삼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국민이 선출한 국회가 제정한 법을 행정부나 사법부가 제멋대로 무력화시키는 것은 권력분립이라는 헌법적 가치에 대한 유린이다. 나치 전범 처벌을 위해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가 만든 법에 근거해 재판을 했던 판사들의 "우리는 단지 법대로 재판만 했을 뿐"이란 변명에도 이해할 구석이 없지는 않다.
왜 상습절도범에 대한 중벌 조항만 가장 늦게 위헌 결정을받은 걸까. 아마도 이들의 처지를 공감하고 대변해줄 사람이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부당한 처벌을 받는 자가 정치인, 해직기자, 대학생이 아니라 절도범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 제도가 악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 악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 대한 믿음이다. 물론 여전히 온도 차는 존재하지만 말이다.
형사재판에서 가장 강력한 증거
진단서는 해당 분야의전문가가 자신의 의견을 진술한 감정서의 한 종류다. 결국 의사의 주관이 상당 부분 개입될 수밖에 없다. 진단서의 이러한성격은 최근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백남기 씨 사망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경찰의 물대포가 원인으로 지목될 경우 자연스레 정권의 책임 논란으로 이어질 상황에서, 담당의사가 사망진단서에 기재한 직접 사인은 ‘심폐정지‘였다. 심장과 폐가 멎지 않고도 사망하는 경우가 있나? 심폐정지란 사망 원인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사망의 동어반복일 뿐이다. 당연히 사망진단서의 적절성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고 글을 쓰는 현재까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백씨에 대한 사망진단서의 적절성을 떠나, 이에 대해 논쟁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진단서의 주관적 측면을 잘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진단서에 기재되는 의견은 ‘최종 결론‘이 아니라 ‘추정‘이 대부분이다. 진단서에는 ‘임상적 추정‘ 진단서와 ‘최종진단‘ 진단서 두 종류가 있다. 임상적 추정 진단서는 환자의 말에 기초해 의사가 자신의 추정을 적은 진단서이고, 최종 진단서는 환자의 말뿐만 아니라 객관적 검사 결과가 뒷받침되어야만 발급되는 진단서이다. 둘 중 형사재판에 주로 제출되는 진단서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전자다. 지금껏 형사재판에 최종진단서가 제출되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의심스러운 ‘머리가 울린다‘는 주장에 근거해 작성된 추정적 진단서를 믿고 피해자에게 뇌진탕이 발생했다 인정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기간과 치유까지 걸리는 기간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법정에 제출되는 진단서를 보면 치료 기간과치유 기간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시비 중에 상대방이 밀치는바람에 목을 삐끗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경우 보통 경추염좌2주 진단을 받아 오는데, 진단서만으로는 이 2주가 치료 기간인지 아니면 그냥 놔둬도 자연스럽게 2주 후에 치유된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중대성이 하늘과 땅 차이인데 이를 구분하지 않는 셈이다.
꾀병 환자를 완벽히 골라낼 수 없는 한계가 있다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일단 형사법정에서라도 ‘임상적 추정 진단서‘를 내몰아야 한다. 혹은 검찰, 법원 등과 의료계가논의하여 현재 불분명하게 작성 제출되고 있는 진단서 대신사법기관용 진단서 양식을 마련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 기준은 다시 논의해야 하겠지만, 환자 본인만 주장하는 자각 증세와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타각 증세, 치료기간과 치유기간 정도는 명확히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이었을까 폭력이었을까
마을 사람 전체가 지적장애인을 수년에 걸쳐 성적 착취하는 일이 빈발하는 상황과, 평생 성폭력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지적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런 범죄에는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무죄추정의원칙 그리고 ‘10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는 원칙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그 못지않은 재앙이 발생할수도 있다고 배웠다. 인간 사상의 역사라는 게 전 시대의 도그마를 깨부수며 발전해온 것이라지만 과연 무죄추정의 원칙을버려도 되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사실상 주변 정황만으로 성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지금의 방식은 무죄추정의 원칙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방식이 과연 피고인만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지적장애인 역시 상대를 선택하고 성관계를 즐길 권리가 있다. 그 관계에 대해 국가가 광범위하게 개입한다면 결국 사람들은 지적장애인과의 성적 접촉을 기피하게 될 것이다. 같은 장애인이라고해서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니 이는 비장애인이나장애인이나 매한가지이다. 눈앞의 불행을 막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애인과 그 가족들 앞에서, 멀리 있어 잘보이지도 않는 행복을 얘기하는 건 무책임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궁금한 건 지적장애인 본인들의 얘기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그동안 만났던 연인들이 모두 수사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여전히 심연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피고인
오판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고 그결과 여러 원인이 제시되었다. 그 원인 중 주목할 만한 것이 있었는데, 억울한 유죄 사례 250 건 중 16%에 해당하는 40명이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백했다는 것이다. 그중 2명을 제외한 38명은 모두 진범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었던 범행당시의 구체적 상황에 대해 진술하기까지 했다. 수사 과정에서 이들이 고문이라도 당한 것일까? 상식과 달리 피고인들은 고문이나 폭행의 행사가 없는 상태에서도 허위자백을 하곤 한다. 왜 피고인들은 강요가 없을 때도 스스로를해치는 선택을 하는 것일까.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여러 연구가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한 연구에 따르면고립감, 무력감, 공포감에 사로잡힌 피고인이 수사관을 협력 대상으로 생각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과정에서 허위 자백이 발생한다고 한다. 여전히 그리고 꽤나 자주 피고인들에게 자백을 권유해보곤하지만 항상 조마조마하다. 내가 담당했던 피고인들 중에도 혹시나 때문에 허위 자백을 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무죄를 받을 수 있는 재판
피고인 입장에서 국민참여재판의 진정한 의미는 선택권이다. 행정부, 입법부의 경우 직접 투표를 통해 그 구성에 관여할수 있지만 사법부의 경우 구성에 관여할 직접적 수단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절차에서도 마땅한 민원 제기 수단이 없었다. 재판장이 재판 시작부터 불친절하게 하거나 선입견을 내비쳐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기피 제도가 있긴 하나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되면서나름의 선택권이 생겼다. 내 경우는 이 선택권을, 법원이 판례에 매여 기존 입장을 고수하던 사안에서 다른 판결을 받기 위해 주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시각을 가진 배심원에게 판단할권한이 생겼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물론 국민참여재판에 적합한 사건일 경우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나는 어떤 뉴스에도 댓글을 달지 않는다.
공직선거법을 악법이라 칭한 이유는 선거의 자유, 공정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문제는 공직선거법에는 평범한 시민의 직관에 반하는 내용이 많지만 너무 자주 바뀌고, 그 내용도 제대로 홍보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술김에 선거 벽보에 불을지른다든지, 선거 여론조사를 조작한다든지, 공천 대가로 돈을 받는다면, 그건 누가 봐도 법에 위반되는 일이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선거에 대해 조금만 입을 잘못 놀려도 전과자가 될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앞서 언급한 명함 돌리기, 조명판 설치는 보통 사람과는 그닥 인연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직선거법의 처벌 범위는 이것보다 훨씬 넓다. 선거운동과 거리를두고 살아가는 사람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넓은 처벌 범위 때문에 악용 가능성 역시 높다.
사실 공직선거법 중에 가장 일반인의 직관과 거리가 먼 조항이 바로 위 피고인들에게 적용된 법조항이다. 후보자에 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하면 처벌을 받는다. 그게 인터넷 기사에단 댓글이라도 피할 수가 없다. 심지어 악플이 아니라 피고인을 칭찬하는 내용이라도 그 내용에 허위사실이 포함되어 있으면 처벌대상이 된다(공직선거법 제250조 허위사실공표죄). 댓글을 하나 쓸 때마다 허위사실이 포함되어 있는지 명확히 따져보고 써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댓글로 적은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후보자를 비방하는 내용이면 처벌이 된다(공직선거법 제251조 후보자 비방죄). 놀랍게도 이런저런 사실관계 언급없이 순수하게 욕설만 퍼붓는 것은 공직선거법 위반이 아니다(물론 형법상 모욕죄가 성립할 수는 있다). 결국 선택지는 두 가지가 남는다. 사실관계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이 교장 선생님 훈화말씀처럼 물에 물 탄 듯한 미사여구만 동원해서 댓글을 달거나 아니면 그냥 조용히 기사만 읽고 지나가거나 해당 조항은‘전 국민 전과자 만들기 프로젝트‘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정치관련 기사에 한 번이라도 댓글을 단 기억이 있다면 해당 조항위반 여부를 걱정해야 한다. 이 조항의 악용 가능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근거는,3명의 피고인들이 하나같이 여당 후보이자 당선자인 박근혜후보를 비방했기 때문이었다. 달랑 세 명을 맡으면서 이런 의심을 하게 된 까닭은, 그 수사 과정이 무척 기묘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범죄에 대해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방법은 피해자나 목격자가 고소나 고발을 하거나 아니면 수사관이 범죄 사실을 알게 되서 자체적으로 수사를 개시하는 것, 단 두 경우뿐이다. 이 피고인들의 경우는 수사관이 범죄를 인지하면서 수사가 개시됐다. 수사관이 인터넷 포털 등에 올라온 게시글을 읽어보다 피고인들의 글과 댓글에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보아 수사를 개시한 것이다. 그리고 3개월 정도 지나 피고인들이그동안 작성한 게시글과 댓글 중 공직선거법 위반된 것을 골라 기소했다. 비유를 하자면 도둑을 발견하고도 가만히 지켜본셈이었다. 범죄의 현장을 발견했다면 한시라도 빨리 범죄자를체포해서 범죄가 계속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적법한 수사인가 사이버 미행인가
어찌 됐든 피고인들에 대한 방어를 해야만 했다. 처음 문제 삼아보려 한 것은 독수독과이론이었다. 독나무에서 열린 열매에는 독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위법한 절차를 통해 수집된 증거는 그 내용의 진위를 불문하고 증거능력을 부인해야 한다는이론이다.
수사관들은 3개월 동안 피고인들을 사이버 미행한 것과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수사기관의 이런 증거 수집행태가 부당한 정도를넘어 현행법상 규정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어야 독수독과이론을 적용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범죄를 인지하고도 3개월 간지켜만 본 행위가 현행법의 어떤 규정을 위반했는지 입증해야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공직선거법 자체가 문제였다. 현행법상 사실을 댓글로 달아도 범죄가 성립하니, 수사기관으로선 누구든범죄 혐의자로 지목해놓고 느긋이 지켜볼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셈이다. 나는 현행법을 떠나 헌법정신에 위반된 수사라고 주장했다. 선거를 앞두고 시민이 뭔 댓글을 다는지 면밀히 관찰한 것은 정치사찰 아닌가. 하지만 이정도로는 부족해 보였다. 헌법정신이라는 추상적인 이유로 법원이 쉽사리 수사기관의 수사를 무효화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결국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를 받아냈다. 인정받은 무죄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이 사건은 내 인생에 큰 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맡은 이후로 나는 그 어떤 뉴스에도 댓글을 달지 않는다. 한참을 고민하고 달았던 댓글도 이내 삭제해버리곤 한다. 명색이 변호사인데 유죄를 받을 만한 댓글을 쓰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유무죄가 아니다. 무죄 받기까지 받아야만 하는 스트레스가 두렵다. 특히나 사실을 적시해도 이를 문제 삼아 공권력이 내 댓글을감시할 수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이 사건 이후로 좋아하던 인터넷 정치 댓글을 끊어버린 피고인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난 결과가 바로 위축 효과다.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법안이 무서운 것은 해당 법이 금지하는행위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행위까지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표현물 중에는 저열한 것들이 패섞여 있지만 무턱대고 이를 규제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다. 나이를 먹고 나니 어떤 주장이 나오면 그 주장 자체보다그 주장으로 인해 가장 이익을 볼 사람이 누군지를 생각해는 버릇이 생겼다. 어린 시절 주구장창 들었던 ‘악법도 법이다‘ 는 아마도 사람들이 악법에 저항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당시군사정권이 가장 좋아할 만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요즘은‘악플로 사람 죽인다‘는 주장이 무척 수상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연예인들의 정신건강을 걱정했단 말인가. 이 주장으로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은 연예인이 아니라 정치인들 아닐까.
범죄자 처벌은 국가가 대신하는 복수일까
억울한 마음에 가해자를 고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기에 형사소송의 아이러니가 있다. 피해자는 형사소송의 주인공도 조연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단역 ‘이하‘라 할 수 있다.‘이하‘라고 한 것은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피해자 없이재판을 해도 되는 건지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개인 간의 문제를 처리하는 민사재판과 달리 형사재판은국가가 피고인의 죄를 묻는 구조이다. 형사소송의 일방 당사자는 검사고 그가 상대 당사자인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법원에요청하는 구조다. 이런 구조가 만들어진 근원에는 형벌을 범죄자에 대한 복수로 보지 않는 합목적적 철학이 깔려 있다. 사형폐지론의 주된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사형이 무기징역보다 강력범죄 억제력이 높지 않다는 점 아닌가. 그 기저에는 형벌을 범죄 억제 수단으로 한정하는 사고방식이 있다.
하지만 현대 형법은 기본적으로 이에 무심하다. 사적 복수를 허용하지 않고 국가가 대신하여 형벌권을 행사하는 이유는복수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다. 복수가 복수를 낳아 사회적폭력의 총량이 느는 것을 막는 것이다. 집행유예 역시 이런 고려 하에 마련된 제도다. 실형을 통해 직장과 같은 사회적 기반을 잃은 사람은 다시 한 번 범죄에 빠지기 쉽다. 재범의 위험성이 그리 높지 않다면 실형보다는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편이범죄의 총량을 줄이는 데 더 낫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일 것이다. 얀 필립 림츠마!an Philipp Reemtsma는 독일의 문학 연구가이자철학자이다. 그는 1990년대 후반 독일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납치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유명 담배 회사의 설립자인 조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그를 두고 납치범들은오랫동안 범행을 계획했다. 림츠마는 32일 동안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의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간이 변기에서 용변을 해결해야만 했다. 살해 위협을 받던 그는 결국 3억마르크라는 거액의 석방금을 지불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당시의 경험을 기록한 <지하실에서 Im keller〉라는 수기를 집필했는데 그중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내일 내게 그자의 목을 가져다준다 해도 거기서 내가 얻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가 재판정에 서는것이다. 나에게 위안이 되는 응보는 증오에 있지 않다. (중략)피해자에게 처벌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처벌이 그의 복수욕을 충족시켜주어서가 아니다. 처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이를통해 사회가 피해자와 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형벌은 범죄자를 밀쳐내는 것임과 동시에 피해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피해자에게 ‘귀환을환영한다‘는 편지와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사회가 배제하는 대상
-보수 정권의 대범죄 정책국토건설단, 삼청교육대, 범죄와의전쟁, 떼법청산, 경범죄 처벌 강화, 그동안 보수 정권들이 내걸었던 정책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로 수장의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내용은 하나같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범죄를 근절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형벌은 범죄에 대한 기술적 대응이 아니다. 교도소수감자 수가 범죄발생 빈도와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도 이루어진 바 있다. 형벌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인 갈등주의적 관점 conflict perspective은 형벌제도를 ‘기득권 집단이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는 수단‘이라고 규정한다. 형벌이 피지배 계급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한 도구라고 설명하는 학자도 있다. 민주국가라고 해서 이 같은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지배 계층은 미디어를 통해 범죄의 위험을 환기시키고 대중들이 강력한 공권력의 개입을 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박노자 씨의 글에는 이런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의 구분이 명확하고 피착취자가 주린배조차 메우지 못하는 전근대사회에서 피착취자의저항은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고, 그저항을 미리부터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착취자들의 급선무였다. 저항에 대한 최적의 ‘예방주사‘란 바로 고문과 참혹한 처형을 최대한 가시화함으로써 잠재적 반란자들에게 극심한 신체적 ‘아픔‘에 대한생물적 공포를 자극해 그들의 저항 의지를 미리부터 꺾는것이었다. 생물체라면 불에 달군 대꼬치에 대해 느끼지 않을수 없는 ‘동물적 접‘이야말로 ‘동방예의지국‘이 유지될 수 있는 하나의 비결이었다. (중략)1808년 이전의 ‘자본화의 선진국‘ 영국에는 죽임을 당해야할 사죄만 해도 약 220종에 달했다. "일정한 직업 없이집시의 무리와 한 달 이상 같이 어울려 노는 죄"부터 "실링이상의 가치에 해당하는 물건을 훔친 죄까지다. 값이 좀 나가는 손수건 하나를 훔쳤다가 죽어야 하는 세상이다 보니한 해에 2~3천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도 다반사였다. 예컨대 영국 자본주의의 맹아기라고 할 엘리자베스 1세치세(1558~1603)에 약 8만9천 명의 수형자가 처형됐다. 그때보다 약간 ‘문명화‘됐다는 1770~1830년만 해도 좀도둑과 부랑자 등을 포함한 7천 명이 죽어야 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었지만 19세기 중반까지 공개 처형은 보통 일이었다. 이렇게 주검 더미를 쌓아가면서 신생의 자본계급은 무산자들을순치시켰던 것이다.
○ 박노자,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한겨레출판
처벌이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서 배제해야할 적이 누군지 지목하고 그를 배제하는 행위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사회가 배제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복잡한 일일랑 잊고 그저 사회 안전과 치안에 기대면 되는 건지도 모른다. ‘나쁜 일을 저지른 인간들은 어느 정도의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사회에서 발언권을 상실한 것 역시 자업자득이다‘라고볼 수도 있다. 하지만 범죄와 형벌의 정치적 속성을 잊는 것이항상 안전한 선택만은 아닌 듯 하다. 갈등주의적 관점은 우리에게 불길한 예언 하나를 던지고있다. 대범죄정책은 그 대상을 확대하는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흉악 범죄와 상습범죄를 그 대상으로 삼지만나중에는 사회질서 문란 행위까지 확대를 시도한다고 한다. 법질서를 세우고 처벌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킨다는 발상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번째 국무회의에서 경범죄에 대한 처벌 확대를 선언한 것이 그저 우연일까.
알아서 지켜야 하는 법
몰라서 지은 죄
대학에 가서 법을 공부하고 처음 든 생각은 ‘왜 의무교육과정에서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나‘이다. 세상은 전쟁터라고 하는데 총 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내몰린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덕에 나같은 변호사들이먹고살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심하다.
사람들의 법 지식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일을 하면서 자주느낀다. 범죄 경험이 없는 초범과 전과가 많은 상습범 중 혐의를 순순히 인정할 확률이 높은 쪽은 누구일까? 전과자 쪽이뺀질거리며 뻔한 변명을 늘어놓을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초범에게는 ‘당신의 경우는 왜 정당방위가 아닌가‘, ‘상대가 아무런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어도 성범죄가 성립할 수 있다‘ 같은 법리를 한참 설명해줘야 자신의 죄를 납득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전과가 많은 경우는 거의 염화미소 수준이다. 자신의 죄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유죄라면 어떤 죄에 해당하는지 대체로 잘 안다. 웬만해선 무리한 주장을 하지도 않는다. 초범들의 경우, 지금 얘기해준 걸 그때 알았다면 과연 죄를 지었을까 싶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우리‘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법의 기능 중 하나가 ‘사회 통합 기능‘이라 학교에서 배웠다. 그땐 속으로 ‘무슨 지역 특산물도 아니고 좋은 기능은 다 있다고자랑하네‘ 라고 혀를 끌끌 차고 말았지만 국선변호를 하면서그때 배운 게 맞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법은 규칙이다. 사회생활에 적용되는 이 규칙이 모두가 납득할 만큼 잘 정립되어있다면 법질서와 사회에 대한 충성심이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가끔 이 사회 통합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나 의문이들 때가 있다. 규칙이 아무리 공평하게 정립되어 있다 하더라도그 내용이 사회 구석까지 전달되지 않았다면 과연 이를 공평하다 할 수 있을까. 교육 혜택에서 멀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법의 사회 통합 기능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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