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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출판 - 북페뎀 09
강주헌 외 21명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9년 2월
평점 :
번역가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투잡(two-job)'이다. 전문적이긴 하지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자기계발과 더불어 수입이 생기는 그런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TV에서 본 주인공이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서 밤에 스탠드불 아래서 사전을 뒤적거리며 번역작업하는 이미지가 나에게 박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처음 다가왔던 번역가는 '김난주'씨다.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를 통해 일본 문학을 접하게 되면서 알게 된 그녀의 번역후기는 일반 작가 못지 않았고, 저자와도 감수성이 비슷했기 때문에 같은 책이면 일부러 그녀의 책을, 처음 접하는 작가라면 번역가의 이름만으로 책을 선택하기도 했다.
일본 소설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본어를 배우고 원서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 다 읽은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래도 꽂혀있는 책을 보면 흐뭇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소유욕인가보다. 책을 읽다 보면 맘에 드는 표현이나 생소한 단어가 있으면 써먹을 데도 없으면서 원서로 읽고 알고 싶은 마음은 혼자만의 비밀스런 놀이라고나 할까.
혼자서 원서를 읽다가 보면 머리로는 문맥을 이해하지만 한국어로 옮기려고 하면 어휘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글로 표현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내가 번역하는 느낌으로 직접 글로 옮겨적은 것을 봤다면 스스로에게 완전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번역가들이 하나같이 강조하는 점이 외국어 구사력보다는 우리말 어휘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역과 직역 중에서 어느 것이 옳다고 할 것이 아니라 같은 문장이라도 문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그 어감의 미묘한 차이는 번역가 자신의 능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잘된 번역으로 책이 살기도 하고, 잘못된 번역이 오히려 원작을 해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가의 책임은 막중하다고 여겨진다.
갈수록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누구나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에 많은 사람들이 덤비지만 노력과 시간에 비해 박봉인 번역을 직업으로 하기에는 번역자 자신들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예전에 봤던 글에서도 유명인을 내세운 대리번역이나 초벌번역원고를 싸게 사들여서 편집능력으로 덮은 번역의 문제를 지적한 것 같은데, 현재 번역일을 하는 전문가(객관적인 입장에서도,,,)의 입에서도 같은 문제가 지적되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상황은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번역가들은 현재의 대우에 대해서는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자신이 선택했다는 점에서 다들 천직으로 받아들이는 면이 신기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들어온 기회를 받아들였지만(걔중에는 적극적으로 선택한 사람도 있지만,,,) 우연히 만난 번역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얼마나 자신에게 맞는 일인지를 얘기하는데, 다들 번역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사용하는 언어와 책의 장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일에 대한 자긍심이 느껴져서 좋았다.
남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낯가리지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원서를 구해서 읽다가 번역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좋은 책을 소개하는 일, 어찌보면 고독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권선희 번역가는 딸이라는 팬이 있으니까 예외로 둘 수 있겠다 ㅎㅎ) 스스로 이만큼 뿌듯한 일도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번역는 엉덩이로 한다는 말이 있을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할텐데 그 인내력과 어깨결림의 결과물이 책이라는 것으로 나오면 얼마나 뿌듯할지 상상이 갔다. 책에 다가가는 방법이 꼭 작가의 방법만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번역가야 말로 제 2의 저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에 좋은 점은 현직에 있는 번역가의 경험을 통해서 여러가지 조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난주씨의 남편이기도 하고 같은 일본번역에 종사해서 전부터 이름은 알고 있었던 양억관씨는 본인이 한국어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고 경고한다. 너도나도 갔다온 유학의 경험 혹은 외국에서 태어나서 유창하게 외국어를 잘한다고 해서 번역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황보석씨의 말처럼 외국어 해득능력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우리말 어휘력이기 때문이다. 사전을 친구처럼 하는 방법 중에 우리가 잘 볼 일이 없는 국어 사전을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보라는 조언이 있다. 아는 단어는 그냥 휙휙 넘기고 모르는 단어는 찬찬히 보면 내가 생각보다 한정된 언어는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고, 어휘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도 잡을 수 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여기에서도 당연히! 적용된다. 제 2회 유영번역상 수상자인 김진준씨는 번역가를 농사꾼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고독한 직업이긴 하지만 씨앗을 멋지게 키워낸다는 점에서 적절한 비유라고 감탄했다. 프로네시스의 김정민대표는 독자의 요구를 쫓아갈 것이 아니라 독자를 리드를 할 책을 만들어내는 것도 번역가에게 필요한 능력이라고 보고 있는데, 번역가에에 요구되는 능력으로 책 볼 줄 아는 능력과 더불어 기획력을 꼽은 김선희 번역가와 뜻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운명, 인연.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당당하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그들은 눈부시다.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적합한지 어떤지 알 수 없다. 다행히 번역가의 입구는 열려있고, 그렇게 좁지도 않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도 아니지만 (언어가 일단 필수다!) 매력적인 직업인 것만은 사실이다. 번역을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 없는 나에게는 번역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번역가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어떤 방향을 중심으로 자기계발을 해야 하는지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