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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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없이 복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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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되고 싶어 네버랜드 우리 걸작 그림책 19
한병호 글.그림 / 시공주니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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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빌딩 페인트를 칠하는 아저씨

걷기도 차타기도 힘들어 새가 되고 싶어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새가 되어 있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어, 정말 새가 되었어”

 

차가 막힐 일도 없고

높은 곳도 쉽게 갈 수 있고

넓은 바다 위를 마음껏 날 수도 있고

멀리 여행도 갈 수 있어

 

그런데 막상 되고 나니

부리로 먹어야 하고

멈추어 쉴 때 조금 외롭기도 하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아요

 

비가 오면 날개가 젖어 날 수 없고

눈이 오면 더 힘들어지고

고양이에게 쫒기는 건 참을 수 없어

 

그럼 이번에는 고양이가 되어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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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고 힘들게 쌓여갈 때

무언가가 되고 싶어져요

그걸 한껏 누리고 나면

그것 때문에 불편한 게 생겨요

한번 되고 나면 다른 게 되고 싶어져요

욕망이 실현되고 나면 그 욕망을 불편하게 하는 걸 해결해 줄 다른 욕망을 꿈꿔요

 

오늘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가요?

되고 나면 또 바뀌겠지만

오늘 내가 꿈꾸는 것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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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정치학과 교육
마이클 W. 애플 외 지음, 김미숙.이윤미.임후남 옮김 / 우리교육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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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에 홀린 사람들

홉스의 공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타인을 잡아먹고 싶으면서도, 혹 자신이 잡아먹힐까 두려워한다던 노신의 말처럼 사람들은 죽고 죽이는 유혈경쟁의 틈바구니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이제 더이상, 사랑과 우정 그리고 연대, 자율과 참여, 민주주의, 포용과 배려의 가치가 논의의 전제가 되지 않는 홉스의 세상이 오고 있다. 자본시장의 효율성이 절대적 가치가 되어 잘난 놈만의 세상을 유토피아로 그려지고 있다. 잘난 놈이 잘사는 불평등은 더이상 정의의 관점에서 논할 일이 아니라 진화의 자연적 사실이자 발전의 동력이라 뻔뻔스레 이야기되고 있다. 지배와 불평등은 사회적 불가피성이 아니라 경제적 발전의 정당한 필요조건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자본이라는 성에 홀린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한 채 유형살이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모든 문제는 교육의 책임?

애플은 이런 세상에서 교육의 문제와 가능성을 총체적 시야 속에서 성찰하고 있다. 사회/정치/경제/문화의 문제를 (공)교육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교육의 문제를 교사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신자유주의의 퇴행적 천박함을 깊이 파고 든다.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위험한 결함이 가져오는 비극적 사실을 육감적으로 묘파하고 있는 것이다. 애플의 논의는 맥도날드의 값싼 감자튀김이 되어버린 교육의 비극을 정면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과연 교육이란 것이 잘난 놈의 횡포를 정당화하고, 공정성을 효율성으로 대체하는 것인지 묻는다. 이제 다시 교육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이지만 소박한 물음 앞에 다시 서게 만들어 줄 것이다.

문화적 논의?

애플은 탈근대 논의의 장점으로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애플은 '나는 대중문화의 중요성을 밝힐 것이며, 문화 정치학을 이해하고 사회적으로 더 공정한 교육과정과 교수 모형을 만드는 데 대중문화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도록 촉구할 것'(20)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먼산위에서 북새통의 저자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교육의 성찰적 논의가 에세이(물론 몽테뉴에서 보듯 에세도 훌륭하고 고급스런 논의이지만)에만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애플의 논의는 '현학적'(?) 담론장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육현실을 몸으로 체험하고 분노를 토로하는 사람치고는 조금은 무기건조하고 불친절하다. 소통의 배려는 부족하지만 물론 사람에 대한 넘치는 애정과 선의를 느끼고 싶은 이들이라면 애플의 이야기는 좋은 소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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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팔지 마세요! 청년사 고학년 문고 1
위기철 지음, 이희재 그림 / 청년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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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인권의 바다로

이런 말들을 자주 써보곤 한다. 그런데 기실 평화와 인권을 이야기할 소재거리(매개들)들은 참으로 부족하기 그지 없다. 더욱이 아이들과 함께 평화와 인권의 가치와 힘을 나누기에는 버겁기 그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들과 잡무에 치이다보면 통제와 감독의 효율성이라는 늪에 빠져들뿐 아이들의 인권과 호혜와 배려에 기초한 사랑이란 말은 저 하늘의 뜬 구름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마치 윤리나 도덕 그리고 정치경제 시간에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권위주의를 일상화하는 잠재적 교육과정처럼, 평화와 인권의 구체적 일상성은 철저하게 무시되곤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소재거리가 될 수 있을 듯 하다. 결코 쉬운 내용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해볼 가치가 있는 듯하다. 이제 전쟁놀이(?)라는 형용모순의 비극에 대해 아이들에게 배워야 하지 않을까!

평면성을 넘어

아마 동화의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평면성을 넘어서지 못하곤 한다. 어떤 사건이나 좋은 사람에게 감화되어 한 단계의 깨달음과 성숙으로 다시 태어나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주위 배경이 될 뿐 오로지 주인공만이 조금 사람다운 냄새를 풍길 뿐이다. 그런데 저자의 동화는 그렇지 않다. 많은 주인공들이 입체적이고 살아있는 생동감으로 뿜어내고 있다. 단순한 적의에서 출발해서 사랑과 이해 그리고 평화와 연대에 다다르는 성찰의 여로에는 많은 주인공들의 깨침과 깨임이 드러난다. 관계의 얽힘을 풀어내는 매끄러운 솜씨에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누가 비극을 파는가?

보미의 말처럼 이런 평화와 인권을 말하는 동화가 비극을 멈출수는 없을 것이다. '벽보 한장 붙여 놓고 아이들 생각이 하루 아침에 바뀌기를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거나 욕심쟁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며칠 지나자 아이들은 벽보를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고, 남자 아이들은 여전히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았다. 겉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평화와 인권의 씨앗은 천천히 소리없이 하지만 근본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우리와 아이들이 전쟁의 비극성을 깨닫고 평화와 인권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세상은 조금씩 변해가지 않을까! 아마 평화와 인권의 시작은 전쟁을 팔아 이득을 챙기는 음흉한 괴물들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한다는 저자의 우화를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기 바래본다. 저자가 시작한 평화와 인권의 작은 걸음. 그 걸음이 평화의 우주를 만드는 씨앗이 되길 바래본다. '처음에는 작은 풀씨 하나가 바위 틈에 쌀짝 내려앉아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썩어 거름이 되면 풀씨가 뿌리를 내릴 토양을 만든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흐르면 아무리 단단한 바위산 위에도 생명이 자라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는 것이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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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학생 사이 우리 사이 시리즈 3
하임 기너트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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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의지와 의도가 항상 선한 결과를 낳지는 않습니다. 만약 좋은 의도가 의도하지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이라면 명분으로 혹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아픔과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이야기입니다.

교육과 민주주의의 힘과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인간 자체를 신뢰합니다. 이들은 진정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야 교육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움과 교육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들은 가르침이란 지식을 많이 소유한 자가 높은 위치에 서서 일방적으로 훈육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교육이란 가르치는 순간 스스로 배우게 되는 상호배움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이들에 지켜내고자 하는 사랑에 대한 충만한 열정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지요.

하지만 혹여 '따듯한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소중한 가치가 타자를 죽이는 독화살이 된다면 어쩌지요? 타자를 주체화하고자 하는 고귀한 시도가 타자를 '복종주체'로 대상화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주체화가 복종주체로 치닫을 수 있으며, 선한 의도가 파괴적인 결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 진실이지 않은지요? 진정 만남과 사귐의 교육과정에 민감한 이들이라면 이러한 교육의 한계와 위험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열정에 불타던 이들은 이제 진이 파지고 풀이 죽여 비관과 절망에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인격적인 소통과 '순수한 관계'(기든스)의 창출을 꿈꾸던 이들이 교육의 불신하고 냉소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절망은 '사랑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지요? 사랑의 기술을 배우지 못한 자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프롬의 말처럼 우리는 교육의 가능성을 믿으면서도 교육의 기술을 미쳐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의 악순환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소통의 기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좋은 이야기를 들려 줄 것입니다. 존재의 자율성과 소통의 선순환을 열망하는 이들에게 행복한 만남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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