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의지와 의도가 항상 선한 결과를 낳지는 않습니다. 만약 좋은 의도가 의도하지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이라면 명분으로 혹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아픔과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이야기입니다.교육과 민주주의의 힘과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인간 자체를 신뢰합니다. 이들은 진정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야 교육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움과 교육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들은 가르침이란 지식을 많이 소유한 자가 높은 위치에 서서 일방적으로 훈육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교육이란 가르치는 순간 스스로 배우게 되는 상호배움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이들에 지켜내고자 하는 사랑에 대한 충만한 열정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지요.하지만 혹여 '따듯한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소중한 가치가 타자를 죽이는 독화살이 된다면 어쩌지요? 타자를 주체화하고자 하는 고귀한 시도가 타자를 '복종주체'로 대상화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주체화가 복종주체로 치닫을 수 있으며, 선한 의도가 파괴적인 결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 진실이지 않은지요? 진정 만남과 사귐의 교육과정에 민감한 이들이라면 이러한 교육의 한계와 위험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사랑의 열정에 불타던 이들은 이제 진이 파지고 풀이 죽여 비관과 절망에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인격적인 소통과 '순수한 관계'(기든스)의 창출을 꿈꾸던 이들이 교육의 불신하고 냉소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절망은 '사랑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지요? 사랑의 기술을 배우지 못한 자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프롬의 말처럼 우리는 교육의 가능성을 믿으면서도 교육의 기술을 미쳐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의 악순환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소통의 기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좋은 이야기를 들려 줄 것입니다. 존재의 자율성과 소통의 선순환을 열망하는 이들에게 행복한 만남이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