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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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화방의 매커한 연기 속에서 버거운 현실과 비루한 나를 잠시나마 망각하고 싶은 때가 있다. 답답한 현실에서 환상으로 도피하고 싶은 때가 있다. 날품팔이 인생들이 유전하는 만화방마저도 상업화의 바람 속에서 대부분 현대화되었다. 노곤한 인생살이를 쉬어가던 아니 마지막 자존심을 부여잡고 버티던 이들이 대화를 나누던 만화방의 헛꿈들은 이제 매끄러운 상품의 외양을 갖추고 있다.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의 거짓 대립 속에서 대중소설의 역량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지경이다. 희대의 히트를 친 대중소설들은 기초적 형식과 양심마저도 갖추지 못한 짜깁기의 남루함을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자의 글은 대중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뭔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잔뜩 폼만 잡는 이들의 허랑한 위세를 뻔뻔스레 까발린다. 천박함에 대한 솔직함의 미덕. 저자의 강점이다.

미학적 권위주의에 휘둘려 비루한 언저리 인생들의 지리한 일상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 저자는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니들이 폼생폼사 어떻게 말해두 쫀쫀하고 야비한 3류인생들이란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구? 아뿔사!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자는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스스로 닫아걸고 말았다. 한없이 가볍게 살아가려는 저자의 노력은 근엄한 영웅주의에 가려지고 만다. 허접한 형식으로 반영웅주의의 일상을 그려내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뭐 해두 천재인 잘난 척만 가득하다. 뭐, 천재의 동기가 가당치도 않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카프카의 성두 읽고 다양한 고전을 섭렵한 놈이 어떻게 이토록 성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옥의 한철을 보낸 주인공은 교육에서 아무것도 전유하지 못한다. 상처와 학대 속에서 힘겨워하든 가족을 통해서도 주인공은 성장하지 않는다. 조울증의 보호고치에 갇힌 고독한 영웅은 스스로의 말처럼 소통할 줄 모르는 바보, 천지이다. 친구와 세상과의 만남에서 성장하지 않는 독특한 바보천재는 시대와 삶의 풍경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흔한 상투적 영웅주의의 대중문화적 반복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가족과도 친구와의 우정에서도, 여자친구와의 사랑에서도 강박적 우울증에서 부유한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직조하는 솜씨는 유쾌한 탈주를 그려내는데 쓰이지 않는다. 암기교육, 계급투쟁의 용광로, 도시락과 신발, 가장의 구별짓기 등으로 첨철된 우울한 교육환경과 산업재해와 사기로 건실한 가정에서 폭력 가장으로, 착한 것이 아니라 못난 아버지, 행상하는 어머니 등의 힘겨운 가족 환경은 주인공으로부터 튕겨나간다. 주인공을 관통하고 육체와 정신에 스며들지 않고 망망대해를 떠돈다.

심각한 고통과 아픔을 웃어넘기는 지혜를 찾아가기에 저자는 겁쟁이다. 두려움과 맞서는 ‘용기’는 어설픈 치기로는 어림도 없는 법이다. 어설픈 치기가 버려내는 시대의 아픔, 상처의 진실이란 허망하기 그지없다.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가슴시린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솜씨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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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라이팅 클래식 3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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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니체의 위험한 책”을 새롭게 읽으려한다. 니체의 텍스트라는 대양에 빠져 수영을 즐기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고전을 읽을 때 권위에 상투적으로 의지하곤 한다. 그런 진부한 권위주의에서 니체에 대한 전유 문제는 비틀어지게 마련이다. 저자는 고전을 현대화하고, 이를 통해 존재능력의 변형을 꿈꾸지 않는 고전독해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성찰한다. 저자는 니체되기를 통해 니체의 가치를 소화하는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고자 한다. 니체주의에 홀린 사람들의 위험을 벗어나 니체의 친구가 되어 니체에게 공감하는 방법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니체의 다양성에 대한 성찰하는 저자의 전략은 생성과 사랑의 창조이다. 니체의 다양한 리듬에 빠져 생성하는 니체의 즐거움을 만끽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니체가 풀어놓은 생성의 축제에서 독자들이 니체의 현재성를 느끼고 체험하길 고대하는 것이다. 니체에 대한 푸코와 들뢰즈적 혹은 고병권적 소개는 상투적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맛깔스럽다. 저자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니체되기의 경험에 빠져볼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문제는 과연 고병권의 니체는 있는가? 아니 제대로 말한다면 고병권의 니체를 읽은 나의 니체는 무엇인가하는 물음일 것이다.

니체는 역사적으로 ‘위대하게’ 악용되었다. 니체 전유의 위험한 역사와 위험의 내재적 근거에 대해 저자는 간과한다. 니체전유의 위험 요인과 가능성이 무엇인지, 어떤 맥락과 지평에서 발생하고 확산되었는지 묻지 않는다. 과연 왜 니체는 위험한 것인가? 왜 지금-여기에서 니체가 위험한가? 위험의 역사적 사례는 무엇인가? 귀족주의, 초인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등과 공모했던 비극적 역사에서 니체의 텍스트는 무엇이었는가? 위험의 구체적 양상과 근거를 드러내지 않은 채 니체에 열광하는 것의 문제가 상식이라면 저자는 역사사회적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있다.

과연 니체되기의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저자는 니체되기의 위험을 감당하고 즐길 가치와 가능성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는가? 새로운 생성과 창조를 향한 화산이 터지기 직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층에서 꿈틀거리는 것들 중 무엇을 분출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개인적 존재능력의 문제로 오그라든다. 제도와 구조 그리고 행위의 상호연관성 그리고 권력구성능력의 정통성 등이 오로지 개인적 존재능력의 탁월성으로 사라지고 만다.

모순과 갈등의 복잡성을 유아적 개인의 소화 능력 문제로 환원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니체를 탁월한 유아의 전유 차원으로 전락시킨 후 니체되기의 기쁨에 빠지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니체되기의 능력에 따라 약이나 독이 될 수 있다는 무책임한 소리가 시적 글쓰기의 형이상학성 혹은 시적 자의성으로 은폐된다. 주류글쓰기의 권력 코드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행복한 체험이지만 너무나 구태에 빠져 지금-여기를 살기에는 무능해보인다. 그래도 니체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히 좋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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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시네마 싸이콜로지
심영섭 지음 / 다른우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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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화장실에서 오래동안 소식이 없으면 그 사람의 건강을 의심한다. 청년기의 남자라면 성적 의심을 받응 것이고 여성이라면 소화계통의 문제로 인한 변비를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퍼세식 화장실에서 서양식으로 변하면서 화장실은 단순히 입에 넣어 남은 쓰레기를 처리하는 평면적인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화장실은 입에 넣어 남은 분비물을 덜어내는 해우소이자 새로운 정신적 욕망을 채우는 이중적 공간이 되었다. '사랑의 그릇은 채움으로써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서 채우는 것'이라는 에로스의 말처럼 화장실은 육체적 긴장을 덜어내고 정신적 충만함을 성찰하는 멋진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여전히 화장실은 비루한 존재의 불필요한 공간으로 치부되기 일수이지만 말이다.

저자는 화장실에 앉아서 프로이트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8) 그런데 아쉽게도 저자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저자의 논쟁들과 매력적인 글향기를 좋아해온 나로서는 참 안타까운 경험이다. 저자는 화장실의 열정과 흥취를 잘 모르는 듯 하다.

영화분석은 표면을 겉돌고, 존재에 대한 분석은 별다른 깊이나 폭을 드러내지 못한다. 다만 재미난 삽화가 너무 가벼운 글들의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있을 뿐이다. 쉽고 편하게 다가오는 영화와 정신분석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가 보자. 영화평도 정신분석도 하지못한채 어중간한 휴지가 되어버렸다. 비데가 없는 집이라면 밑 닦이기도 종이가 너무 질기다. 난 저자와 삼각연애를 해보고 싶었는데 애당초 저자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아! 나의 과대망상은 저자의 다른 모습을 기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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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 현대의 지성 84
강정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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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실증주의의 환상이 지배하는 한반도.

민주주의를 배우면서 복종과 순종의 미덕만을 체화하는 이들에게 법이란 근대적 자율성의 근거가 아니다. 우리에게 법이란 강자의 허울이고, 강자를 정당화하기 위한 강제와 억압일 뿐이다. 서로 동등한 자들간의 자율적 자기지배를 위한 제도적 틀거리가 아니라 권력과 힘 그리고 자본을 가진 자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호, 유지, 확대하기 위한 제도덕 덫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다.

법 권위주의와 테러체제에 길들여진 한반도의 역사에서 법은 단순히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지 왜 지켜져야 하는지 물을 수 없었다. 더구나 모든 이에게 지켜져야 한다는 강제가 동일하게 적용된 것도 아니다. 힘없고 돈없고 빽없는 이들에게 법은 노예법으로 강제되었지만 권력과 돈을 소유한 자들에게는 편법과 탈법, 불법이 허용되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국가발전과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불법은 정당화되었다. 지배자는 법을 어겨도 정당한 명분이 있는 것으로, 피지배자들에게는 억울하더라도 불법적 지배를 견뎌내고, 만약 저항하면 법의 이름으로 제도적 폭력이 행사되었다.

이런 모순적 법의 이중성에서 교과서는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되뇌곤 한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고전 인용에 대해 강정인은 과연 소크라테스의 그런 허접한 말을 했을 것인지, 비슷한 말을 했다면 어떤 근거였는지를 꼼꼼히 따져본다. 진부한 상식을 뒤집는 재미는 물론 공화주의적 참여의 근본적 참여의 문제로 세심하게 다루고 있는 좋은 책이다.

한국 보수주의와 극우를 구분하는 이론적 작업의 초석을 깐 저자의 노력은 반가운 것이다. 법실증주의의 함정은 물론 극우의 담론과 현실의 괴리를 정통 보수주의의 지평을 통해 성찰한다는 점에서 좋은 문제거리를 던져주고 있는 책이다.

만약 하버마스식의 구분인 법의 정당성과 정통성(주류 법학에서는 합법성과 정당성으로 구분하는)의 논의를 충분히 소화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꼭 거쳐야 하는 통과제의의 하나일 것이다. 자유주의적 법학의 탁월한 가치 중 하나는 자기지배의 가능성을 논하는데 있다. 법 정통성 논의는 그리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에서 그 원형적 모델을 수혈받을 수 있기도 하다. 시민불복종의 헌정적 가치를 논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오해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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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 학술총서 52
C.B.맥퍼슨 지음 / 인간사랑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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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는 마치 문학고전과 유사한 운명을 겪고 있다. 누구나 리바이어던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읽지 않는다. 다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전쟁공포와 국가절대화의 경향에 대해 누구나 리바이어던의 괴물을 상투적으로 뇌까리지만 홉스에 대한 내재적 독해도 없는 상황에서 홉스에 대한 논박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홉스와 로크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대표주자인 로크는 내재적으로 독해되어 왔으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로크의 시민정부이론조차도 꼼꼼히 읽혀지지 않는다.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강조한다는 로크의 기본 논의조차도 살펴지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적 소유권 이론의 관점에서 로크와 홉스를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경험일 것이다.

물론 홉스의 절대주의적 (신봉건)국가를 근대국가의 원형으로 바라보는 점, 개인적 소유권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지않고 논의를 전개시키는 등의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근대적 개인의 가장 주요한 문제로 소유권 문제를 논의의 기초에 놓은 점. 그리고 노동과 국가에 대한 역사적 의표성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다. 포스트 논의의 황폐한 이론전략에 대비해서 소유와 노동, 국가에 대한 전면적인 재구성이 절실한 시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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