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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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에 또, 광년이란, 듣기에는 시간의 단위 같지만 실은 거리의 단위거든, 빛은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데 그 빛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그마치 1년이나 가는 엄청난 거리, 알겠어?"

  "그것 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럼 왜 물었어?"

  "그런 거리를 실감할 수 있느냐 말예요? 짐작이라도 할 수 있어요? 게다가 몇 천, 몇 만 심지어 몇 억 광년 따위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나 말예요?"

  "무슨 소리야?"

  "뭐라고 지껄이라고 해놓구선……. 별 삼 형제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허망해져서 그래요." 

- 본문 118쪽 中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의 마음과 마음 사이가 마치 광년이라는 단위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마음의 병이 깊은 사람이라면 그런 상태가 ON인 채로 죽 지속되고 있지는 않을까. 소설 속 주인공인 '경아'는 사람들 속에서 광년이라는 단위만큼의 아득한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무섭고 두려운데 그런 두려움을 가시게 해주는 최고의 방법은 사랑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이 존재할까. 옥희도 씨와의 사랑도 이룰 수 없고, 끔찍한 기억을 상기하는 고가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죽은 오빠들만 붙잡고 사는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전쟁.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실행되어서는 안될 미친 짓이다. 사랑이 완전히 부재한 곳에서 전쟁은 벌어질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서 부서지고, 분해된 가정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하필이면 아들들이 아니라 계집애만 살아남았다고 말하던 경아의 어머니를 떠올리면 아들들이 죽기 전에도 그녀가 경아를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아들에게 주던 사랑이 남으면 그녀에게도 마저 주고 그랬던 건 아닐지. 그런 생각은 물론 하기 싫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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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복간할 결심 1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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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이제껏 읽은 추리 소설도 얼마 되지 않는다. 추리 소설은 어쩐지 인물의 심리, 내면 세계를 묘사하는데 힘을 기울이기보다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관계와 벌어진 사건, 상황에 대한 치밀한 묘사에 힘을 기울인다는 편견(?)이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아주 단순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인물들의 속내를 그야말로 속속들이 알 수 있다면 물불가리지 않고 빠져들어 읽는 편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활자잔혹극』은 나의 편견을 깨뜨려준 추리 소설이었다. 치밀하긴 하지만 내가 말하는 치밀함은 인간 심리에 대한 부분이 더 컸으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함이나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의외였다. 그런 게 거의 없는데도 빠져들어 읽을 수 있는 추리 소설이라니. '유니스 파치먼'이라는 살인 사건의 가해자가 지닌 특이한 삶의 이력은 이 소설을 빠져들어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유력한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문맹(!)이다. 읽는 법과 쓰는 법을 거의 모른다. 그런 사람이 사람들과 어울려서 지내려면 읽고 쓰는 법 외에 다른 능력과 감각을 부지런히 익혀야 하는데 실제로 그녀는 그랬다. 하지만 여기서 어울려 지낸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나도 안다.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기보다 사람들을 이용해 먹기를 즐겼다. 끈덕지게 살아남으려는 삶의 의지가 하필이면 그런 식으로 드러난 점이 안타깝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글을 배우지 못했고 배울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방어 능력이나 조심성, 경계심이 깊어졌다. 그녀가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녀는 운 좋게도 커버데일 가(家)에서 가정부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게 되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깊었던 커버데일 사람들 때문에 여러 번 곤혹스러운 일을 당하게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의 배려가 한 사람을 오히려 곤혹스럽게 만들었다니. 


  그 이유는 단순했다. 커버데일 사람들은 글을 알고 유니스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쉽사리 우습게 여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 또 조심하면서 살았다. 커버데일 사람들은 그녀의 조심성과 말 수 없음을 오히려 측은하게 여겨 신경 써서 대해주려 했지만 그런 방식은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리는 짓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좀 무신경한 사람이었더라면 유니스 파치먼을 벼랑 끝으로 내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애초에 그들과 유니스 파치먼은 만나서는 안 될 관계였다. 제일 좋은 가정은 유니스 파치먼이 어렸을 때부터 글을 배워 세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긍정적인 소통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가정이 부질없다는 점을 알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글을 읽고 쓰는 일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람이 두 눈으로 무언가를 보면서 세상을 배울 수도 있고 두 귀로 들으면서 세상을 배울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글을 읽고 쓰게 되면서 발전을 이룬다. 그리고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면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정보를 다량으로 습득할 수 있다. 다른 나라,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서 그들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면 세상을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어느 지점에서 막히게 된다. 저자는 유니스 파치먼이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으며 그것을 배워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며 윽박지르는 어조로 글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글이 가둬버린 세상의 밖의 것을 보고 느낄 줄 알았다는 글을 썼다. 그녀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납득이 가능하게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저지른 살인이 정당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안다. 


  살아온 삶이 극명하게 달랐던 사람들이 서로를 오해하고 착각했구나, 너무 큰 오해와 착각을 했구나, 그런 안타까움이 들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글을 읽고 쓰는 일이 세상을 한정적으로 가둬버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배워야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은 작가도 알고 독자도 알고 그 누구도 모르지 않으리라. 울타리 밖은 무법지대다. 그곳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 관심, 사랑을 배우지 못한 누군가는 몰랐기 때문에 쉽사리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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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반양장)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11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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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마지막 문장, 마침표까지 남김없이 읽고 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읽는 동안에 많은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청준 소설가의 문장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바빴다. 책을 덮고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나만의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읽기를 잘 했다고 속으로 말했다. 쉬운 소설, 쉬운 문장만 받아들여서는 남는 게 별로 없는데 이런 소설을 읽어야지 스스로 사고하고 질문을 하게 된다. 


  예전에 스스로 '천국이란 무엇인가?'하고 물은 적이 몇 번 있었다. 모든 게 풍족하고 아픔도 없어서 더 바랄 것이 없는 상태가 천국일까, 그러면 인간은 정말 행복할까, 지겹지 않을까, 아무런 이야기도 더 만들어지지 않는 그런 상태가 정말 천국일 수 있을까. 함부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천국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만족할 수 있다면 이따금 지루해도 뭐 어떤가 싶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의 천국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다시 다른 천국을 꿈꾸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아니면 천국을 버리고 계속 꿈을 꾸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곳을 찾는 사람이 있을 수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아픈 사람의 천국을 떠올려 본 적은 없었다. 아프지 않으니까(정신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신체적으로는)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청준 소설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는 동안에 조백헌 원장은 나환자(문둥병을 앓는 환자)들의 천국을 진심으로 꿈꾼, 말 그대로 좋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소설을 다 읽기 전에는 그랬다. 만약 이 소설이 나환자들이 결국 천국을 얻고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식의 결말을 맺었다면 나도 눈물을 흘렸을 테고 별다른 생각과 질문도 가질 수 없었을 테다. 


  하지만 이건 결국 소설이다. 드라마, 주말 연속극이 아니다. 물론 동화도 아니다. 소설은 작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책을 읽는 사람도 계속 질문하게 만든다. 이청준 소설가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질문했다. 나환자들의 천국은 무엇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알 수 있듯이 나환자들이 섬 안에서만 머물면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게 결코 천국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욕구가 해소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조백헌 원장의 상당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들의 천국』은 독자가 함부로 눈물을 낭비하게 하지 않는다. 바닷길에 돌을 날라다 둑을 만드는 공사를 하던 원생들이 기어코 돌둑이 바닷물 위로 솟아 오르는 모습을 보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핑 돌기는 했으나. 


  그 둑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급한 눈물로는 깊게 생각해 볼 여지가 생기지 않는다. 조백헌 원장과 원생들, 이상욱 과장, 황희백 장로, 그 외에 많은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둑을 쌓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다시 둑을 쌓아 올리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천국으로 가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해나간다. 나는 그 에너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너무 힘들 때엔 천국조차도 꿈꾸기가 어렵고 굳어버린 감정과 사고를 가지게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 소설은 인간으로서 가지는 그 에너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건강한 사람이든, 아픈 사람이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의 불씨를 결코 꺼지게 만들지 않는 에너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자꾸만 소록도에서 바다를 건너 탈출을 하려고 한 원생들도 그들 나름의 에너지로 삶의 불씨를 지펴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조백헌 이전의 원장들이 보기엔 답답하고 화나기 그지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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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시선 437
황인찬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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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부터 비가 많이 온다. '온다'는 표현보다 퍼붓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빗물이 차고 쪽으로 난 지붕을 쉬지도 않고 때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외할머니 댁은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빗물이 양철 지붕을 때리는 소리 때문에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한여름의 장마 기간에 그 허술한 집이 비바람을 어떻게 견뎌내는지 모르겠다.


  아파트에 살 적에는 비가 많이 와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생각도 많아지지 않았다. 빗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부실 공사로 짓는다고 해도 튼튼하기 그지없는 집이었다. 우리 가족의 형편처럼 약한 집에 들어앉아 있으니 빗소리도 잘 들리고 생각도 많아진다. 나는 얼마 전부터 황인찬 시인의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읽었다. 


  시집 중간에 「죄송한 마음」이라는 시가 있다. 오늘 같은 날에 읽으니 명확하게 잘 읽히는 시다. 사람이 슬픔 속에 들어 앉아 있다가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 속에서 슬픔은 불어난다.(빗소리의 한가운데 들어앉아 있으면 생각이 많아지듯이)  시에서는 물에 불린 미역이나 흰 쌀이 나온다. 그리고 시인은 그것으로 미역국을 만들고, 흰 쌀밥을 지어 먹는다. 사람은 불어난 슬픔을 먹고 더 슬퍼지다가 시간이 흐르면 그 슬픔도 서서히 식는다. 미역국이나 흰 쌀밥도 따뜻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식듯이. 


  슬픔이 식었을 때엔 슬픔을 느끼기가 어렵고 생각도 많이 정리가 된 상태다. 당신을 떠올릴 때 들던 슬픔이나 생각 따위가 마치 뜨거운 미역국과 흰 쌀밥이 식듯이 식어버렸을 때 시인은 죄송하다는 표현을 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도 쉽고, 또 사람의 인생이 떠오르기도 한다. 온기를 가지고 태어나 사랑을 하는 순간에 몹시 뜨거워지고 열심히 움직일 때(살 때)에도 뜨거워진다. 


 그러다가 나중엔 온기를 잃는다. 온기를 가졌다가 온기를 잃는 과정이 사람의 삶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죄송한 마음」이라는 시는 읽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긴 해도 이 시에서는 찬란한 생애보다 슬픈 생애를 떠올리기가 더 쉽다고 생각한다. 슬픔이 계속 불어나는 이미지가 연상 되는 시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여러 편의 시를 두고 리뷰를 쓸까 했는데, 좋은 시가 많아서 리뷰도 너무 길어질 것 같고, 또 이 시 한 편만 해도 충분히 좋기 때문에 욕심을 낼 필요가 없어졌다. 음, 다른 독자 분들도 비가 많이 오는 날이나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이 시를 읽어 보시면 좋겠다. 그런 날에 읽기에 제격인 시다.


  그리고 이전에 읽은 황인찬 시인의 시집에서 동성애를 떠올리게 만드는 시를 읽었을 때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나? 하고 자문한 적이 있었는데,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읽고 나니 잘못 읽은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사랑은 육체를 가진 무엇에라도 줘버리면 된다는 시인의 생각대로 라면 동성애는 사랑의 한 방식일 뿐이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죄가 아니다. 사랑은 그냥 사랑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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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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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은 고향이 있으나 온통 아픈 기억 뿐인 고향을 가지고 있고, '자흔'은 고아이며 정확한 고향을 모른다. 자흔은 어려서부터 전국 각지를 떠돌면서 살았다. 그녀에게 과연 정 붙일 만한 곳과 사람이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정선의 내면에는 고통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자흔이 기댈 곳이 없었다. 정선에게 있어서 집은 쉴 틈도 없이 쓸고 닦아야만 하는 곳이고, 자흔에겐 진득하게 붙어있을 정도로 정을 붙일 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어둠의 사육제」는 냉혹한 서울살이를 하면서 스스로 척박하고 냉정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주인공의 심리를 세심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기가 제일 힘들었다. 지독하게 아픈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자기 집 하나 장만할 꿈을 가지고 있던 '나'는 친한 언니에게서 금전적으로 상당한 손해를 입었고, 인생에게 등을 돌려버림으로써 마음은 한없이 식어 갔다. 그런 그녀가 친척이 사는 아파트에 머물다가 만난 '명환'이란 사내에겐 다리가 한쪽 없었다.


  교통사고 때문에 아내와 아이, 그리고 자신의 다리 한쪽을 잃은 사내에겐 나와 달리 집이 있었다. 그것도 피의자가 준 위로금으로 마련한 집이었으며, 피의자의 가족이 사는 곳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는 집이었다. 그는 피의자와 그의 가족 곁을 맴돌며 그들에게 정신적인 압박을 가했다. 어떤 협박도 없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는 비로소 집과 위로금 따위의 욕망을 모두 버리고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한 뒤 주인공에게 집을 양도하려고 마음 먹는다. 나는 그를 미친놈 취급한다. 


  집이 없어서 친척 집의 베란다에서 자는 여자와 널찍한 집이 있으나 사랑하는 가족이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 이 소설에서 명환은 요즘 젊은이들이 잘 쓰지 않는 말투를 쓴다. 말 끝마다 '~했소.'라는 그의 말은 쓸쓸함과 씁쓸함을 더욱 짙게 만드는 분위기를 풍겼다. 「야간열차」에서 '동걸'은 무거운 책임감을 덮어 씌우는 집에서 탈출할 꿈을 은밀히 꾸며 열심히 생활하는 자다. 그에겐 생계를 책임져야 할 동생들과 어머니가 있다. 


  그와 얼굴이 똑 닮은 동생인 '동주'는 학창 시절 돈을 벌러 나섰다가 몸을 크게 다쳐 장애를 입었다. 동주는 한 자리에 누워서 일어설 수도 없는 몸이었다. 동걸에게는 언제든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나, '나'에게는 떠나는 일과 머무르는 일이 매한가지였다.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에서 멀리 벗어나거나 전혀 떠오르지 않는 곳으로 떠났을 때 불면증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있다. '나'는 형수와 함께 머무는 집이 아닌 동걸의 집에서 비로소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동걸은 아직 떠나지 못했으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질주」에는 이런 문장이 실렸다. <저 병동의 팔층에 어머니가 누워 있으리라. 인규는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인생은 그의 상처 난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의 운명도 그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본문 225쪽) 나는 미신이나 사주 팔자, 민간신앙, 풍수지리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어쩌다 한 번씩 손금을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인터넷에 나와 있던 손금에 따른 사람의 성향이나 운세 등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내가 정말 그렇게 될까?'하고 질문하기도 한다. 안 믿는다고 여기면서도 그쪽에 대한 정보를 들을 때 잠시 귀가 솔깃해진다. 내가 믿든, 안 믿든 그런 것들이 사람들의 생활 깊숙이 침투하여 떠도는 것 같다. 「진달래 능선」에서 '정환'에게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툭하면 학대를 하는 아버지가 있는 집은 집이 아니었고, 딸아이가 심장병을 앓다가 일찍 세상을 뜨고 남은 처자식마저 떠나가 버린 뒤의 집은 '황씨'에게 있어서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집 아닌 집들이 있다. 그래서 집을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집을 그리워할 수 있다. 마지막에 실린 「붉은 닻」은 한강 소설가의 데뷔작이다. '동식'의 아버지도 동생인 '동영'도 집안에 가만히 붙어 앉아 있지를 못하고 나다녔다. 아버지는 술에 절어 집에 들어오곤 했다. 동식은 아버지의 혼령이라도 찾아올 것만 같은 집(문방구 안쪽)과 동네를 떠나길 간절히 원했으나, 동영이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 과연 그 일이 가능할 것인가, 자문하게 된다. 


  동식은 아버지, 동생과는 다르게 귀소 본능이 유난히 깊었는데, 황혼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만 봐도 불안할 정도였다. 핏줄이면서도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 속에 전혀 다른 꿈을 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동식의 집. 마음 붙일 구석이 없는 공간, 잠을 편히 잘 수 없는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지독하게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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