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학의 자리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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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Daum)에 접속했을 때 어떤 책 한 권을 추천하는 글을 읽었다. 책을 추천하는 글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홍보성 글일 수도 있다는 의심 때문에), 글이 담백했으며 그저 순수하게 재밌어서 올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기에 관심이 갔다. 그렇게 추천 받은 책이 정해연 소설가의 『홍학의 자리』였다. 기억하기로 글쓴이는 결말을 읽은 다음에 믿을 수 없어서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했다. 그런 다음 처음 장면을 다시 읽었다고 했나?


  2. 


  18세의 고등학생을 사랑하는 40대의 남(男) 교사가 있다. 고등학생의 이름은 '채다현'이고 교사의 이름은 '김준후'다. 준후에게는 아내도 있고 아들도 있는데 완벽주의자인 아내에게 질렸고 더 이상 사랑하는 감정도 없다. 반면 다현과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다. 다만 미성년자와의 만남이고 자신에겐 아내와 아이도 있어서 주변에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비밀 연애를 한다.


  소설에서 다현이가 일찍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은 초반부터 나오기 때문에 소설에 대한 스포가 될 수는 없다. 다현이의 가슴 아픈 가정사는 그 아이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고 쓸쓸하게 만든다. 다현이의 죽음 앞에서 그 아이의 담임이자 애인이었던 김준후는 어떤 행동과 감정을 드러냈나? 그는 자신에 대한 사회적인 평판이 더 중요했기에 아이의 죽음을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형사들이 아이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성년자를 상대로 만남을 지속한 사실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 했다. 그래서 아이의 죽음에 속임수를 끼얹기로 했다. 이야기는 그렇게 전개된다. 형사들이 그의 속임수를 파헤쳐 나가고 다현이의 개인적인 사정, 그리고 김준후의 비밀까지 알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이야기는 매끄럽고 군더더기 없이 진행된다. 


  추리 소설, 장르 소설로서 이 소설은 그야말로 '재밌었다.' 느슨해지는 부분이 없었으며 문장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반전은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 반전은 읽다 보면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고 두 번째 반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두 번째 반전 때문에 나도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갔다. 한두 장 정도 소설을 다시 읽었다. 이 책을 추천한 글쓴이와 마찬가지의 행동을 나도 하고 있었다. 


3. 


  준후는 달려들듯 캐리어를 잡고 바닥에 눕혔다. 한쪽 면에 붙은 두 개의 검은 버튼을 양손으로 누르자 덜컥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비밀번호는 걸려 있지 않았다. 캐리어를 열고 깔끔하게 개켜진 옷가지들을 성마르게 헤쳤다. 뭘 찾으려는 뚜렷한 목적은 없었지만 자신이 들여다 보려 생각한 적 없던 영주를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본문 236쪽)


  여기서 말하는 영주는 준후의 부인이다. 그가 들여다 보려 생각한 적이 없던 이유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의심 때문에 그녀의 물건을, 그녀를 제대로 확인하려고 한다. 추리 소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관심을 줄 일이 없었거나, 관심이 없어졌던 인물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의 비밀을 파헤치려 한다는 점. 


  어쩐지 스탠드 조명의 불빛,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불빛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던 물체에 그런 불빛들이 환히 비추면서 물체의 정체를 알게 되는 과정까지도. 추리 소설에서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의심스럽다. 모두가 다 의미심장한 사람이고 그의 말도 그렇다.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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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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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은 것들의 신'은 역사라는 거대한 물살을 바라보며 그것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길 수밖에 없는 개인, 한 사람에 깃든 신을 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안전하게 어느 곳에 안착하든지, 온몸이 부서져서 발견되든지. 그저 그렇게 되는 대로 되어질 수밖에 없는 몸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신(神).


2. 


  "암무, 꿈속에서 행복했다면 그것도 인정돼요?" 에스타가 물었다. 

  "인정되다니?"

  "그 행복이요, 그것도 인정되는 거냐고요?"

  앞머리가 흐트러진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녀는 잘 알았다. 왜냐하면 진실은 인정되는 것만 인정되니까.(본문 304-305쪽)


  꿈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작은 것이며, 나만의 것이다. 꿈 속에서 이룬 행복은 어딘가 불완전한 행복처럼 느껴진다. 때때로 행복은 나 혼자서 인정했다고 완벽해지지 않으며 그 완벽하지 않음이 못마땅하고 속상하기까지 하다. 커다랗게 보이는(완전해 보이는) 행복은 타인, 집단에게서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사소한 행복은 너무 작아서 가치가 별로 없다고 평가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개인의 마음은 어떠할까?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을 읽으면 그 마음에 대해서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다.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매우 가깝게 이해할 수 있다. 벨루타와 암무의 사랑은 꿈에서, 가장 개인적인 선에서는 이루어질 수 있었으나 꿈 밖(사회)에서, 집단에서 인정 받으려면 혁명이 필요했다.


  벨루타와 암무는 인도라는 커다란 집단에서 불가촉민과 가촉민이라는 신분으로 나뉘었고 그래서 서로를 사랑했지만 서로를 마음껏 만질 수 없었다. 그들은 견고한 질서를 따라야만 했고 거부하면 그에 맞는 벌을 받아야 했다. 거대한 신 앞에서 작은 것들의 신은 너무 무력했다. 처절하게 맞선다 해도 힘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났다. 


3. 


  거대한 세계관, 거대한 질서, 거대한 희망 아래에서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암무와 벨루타는 그저 작은 것에 희망을 걸고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자기 자신(상대를 사랑하는 하나의 몸)을 믿고, 사랑이라는 감정(나만의 것, 작은 것)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희망은 너무 커서 붙잡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잡기에는 너무 작았다. 


4.


  아룬다티 로이가 이 소설을 쓸 때 몸속에 신이 들어앉지 않았을까? 소설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그야말로 가슴이 미어지는 상태에 접어들었고 조금 진정이 되면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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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프랑켄슈타인 - 1818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메리 셸리 지음, 구자언 옮김 / 더스토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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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는 북극해를 탐험하던 왈튼 선장에게 어느 이방인 혹은 방랑자가 자신이 겪은 불행에 대해서 들려 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괴물의 이름으로 알고 있는 점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정확하게 빅터 프랑켄슈타인)이고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시종일관 주인공은 괴물을 '그놈'이나 '악마'로 부르고 한번도 이름을 붙여준 적이 없는데 이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부르는 이름이지만 괴물의 사정을 알게 된다면 그를 마냥 그런 식으로 부를 수는 없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그'의 외형은 2.5 미터에 달하는 거구에 시체를 되살려 놓았기 때문에 섬뜩하고 혐오스럽다. 하지만 그는 결코 지능이 낮지는 않다. 이건 내가 가진 그에 대한 편견이었다. 말을 어눌하게 하면서 이상한 자세로 걸어 다닐 거란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지능이 높고 섬세한 감수성을 가졌으며 말로 생각과 감정을 묘사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체력은 인간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수준이다. 


  한 가지 더 의외의 사실을 덧붙이자면 작품의 주요 배경이 스위스라는 점이었다. 아름다운 경관으로 잘 알려진 스위스에서 괴물이 탄생하고 그곳에서 주인공과 괴물이 대립하는 장면이 나오는 게 의외였다고 느낀 게 이상한 걸까. 프랑켄슈타인은 자연철학과 화학 분야에 몰두한 과학자였는데 죽은 물체에 생명을 불어 넣어 창조주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소설의 제목이 "FRANKENSTEIN ; OR THE MODERN PROMETHEUS"인 이유가 뭘까.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으로 동생과 함께 최초로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에게 불을 전해 주었다. 아마도 프랑켄슈타인이 시체를 살아 있는 상태로 만든 최초의 인간이기 때문에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라는 제목이 지어졌나 보다. 비록 괴물, 그러니까 그의 외형은 끔찍함 자체였으나 성정이 착하고 배움에 대한 의지가 대단했다. 그는 세상에 나와서 사람들을 통해 언어와 지식을 습득했는데 그러면서 자신의 외모와 비참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배우고 생각할수록 절망에 빠지게 되는 슬픈 아이러니. 산속에 은둔하면서 살았으면 몰랐을 자신의 처지를 그는 세상에 나가 지식을 습득하면서 절절히 느끼게 된 것이다. 그는 배움을 통해 짐승에서 인간이 되었으나 막상 인간들에게서 천대를 받았기에 착한 성정은 점점 변해갔다. 사람들은 그를 겪어보기도 전에 외모로만 판단을 했다. 모두들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고 폭력으로 대응했다. 그의 말을 듣기조차 싫어했다. 


  외형만 괴물이었지 심성은 오히려 웬만한 사람보다 착했던 그는 성정까지 괴물로 변해갔다. 생명을 낳기만 하고 사랑과 책임감을 쏟아 붓지 않은 빅터에게 그는 처절하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그의 편이 있었다면 그는 진짜 괴물까지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슬픔을 낳을 수 있다"는 그의 절규가 더욱 안타깝게 들렸다. 슬픔과 원망을 모르고 가질 생각조차 없었던 그가 복수를 결심하면서 슬픔을 낳을 수 있다고 외쳤다. 


  그는 나중에 이르러 빅터에게 자신과 처지가 같은 여자를 한 명 더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녀와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서로 의지하고 인간 세상에는 절대 나오지 않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 전에는 빅터에게 자신이 빅터의 실험실에서 나와 세상에 나가 살면서 겪었던 불행을 바르고 섬세한 언변으로 들려 준다. 빅터는 그의 주장에 설득 당해 한때는 괴물이 될 여자를 한 명 더 만들려고 마음 먹고 실행에 옮겼으나 더 이상의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일을 중단한다. 


  이야기는 비극의 연속이다. 시체를 살아 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진 주인공의 호기심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괴물의 비참함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며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었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도 만들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게 때로는 더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보이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의 추함은 극도의 비참함을 낳기도 했으며 그는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에 동정을 느끼지 못한다며 두 손으로 빅터의 두 눈을 가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알프스 산맥의 황량한 산과 거친 빙하를 가까이 할 수 없는 머나먼 대상으로 여긴 만큼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을 멀리 했다. 하지만 그에게 산과 빙하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저자가 작품의 주요 배경을 거칠고 황량한 자연으로 택한 이유는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에게 그런 곳들이야말로 마음의 안식처이기 때문이었음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스위스는 의외외 장소가 아니라 적절한 장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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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컬렉션 (그책)
헤르만 헤세 지음, 배수아 옮김 / 그책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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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중학생 때 추천 도서로 지정이 되어서 읽어보고 그 후론 읽어볼 일이 없었다. "데미안"은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유명하고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보니 작품들이 대부분 유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작품은 자아 실현이라는 공통의 주제가 있는 듯하다. 뻔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도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책을 짧게 정의하자면 나르치스라는 이름을 가진 수련수사와(나중에는 더 높은 자리에 오른다.) 골드문트라는 이름을 가진 생도(그는 다른 직업을 가진다.) 사이의 깊은 우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거기에 철학과 예술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가 더해진 소설이라고. 이렇게 짧게 줄인 말로는 영 따분한 소설로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소설은 골드문트가 수도원을 벗어나 방랑 생활을 시작하면서 짐작조차 할 수 없던 새로운 일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인물 설명을 잠깐 해보자면 나르치스는 철학자 유형이고 골드문트는 예술가 유형이다. 나르치스는 아버지로 대변되며 골드문트는 어머니로 대변된다. 나르치스를 아버지로 보는 이유는 그가 정신, 관념에 헌신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학교이고 학문이며 정신이다. 골드문트를 어머니로 보는 이유는 그가 감각에 헌신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감각, 예술, 육욕이며 삶 그 자체다. 


  우리가 아버지(정신)를 따르려면 학교에서 학문을 배우고 규칙을 배우면 된다. 그런데 어머니(삶)를 배우려면 학교에서만 배우는 걸로 부족하다. 골드문트는 마리아브론수도원에서 어떤 일을 계기로 탈출하여 방랑 생활을 시작하고 그의 방랑은 곧 어머니에 대한 배움의 길로 이어진다. 그런데 정신은 죽지 않고 죽 이어지지만 삶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곧 어머니는 우리를 낳기도 하면서 죽이기도 하는 분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어머니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보다 더 넓고 다양하게 해석하면 좋다. 나는 어머니가 우주 자체를 나타내는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어머니는 생명을 마냥 사랑하기만 하시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생명에게 죽음을 내리기도 하신다는 것이다. 흙에서 나온 우리는 반드시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골드문트는 방랑 생활을 하던 도중 독일 전역을 휩쓴 페스트로 인해서 어머니의 이중성을 보게 된다. 


  페스트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지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독자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이 남았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아버지께 평생을 헌신하며 학자와 신자로서의 삶을 묵묵히 걸어나가고 골드문트는 어머니를 사랑하며 예술에 대한 혼을 불태운다. 골드문트는 사랑하는 나르치스 덕분에 참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우친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골드문트는 원하지 않으면서 억지로 수도원에 남아 수도사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 안의 사랑과 자유 의지를 마음껏 펼치며 자신을 불태우면서 살아갔고 그런 이유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늙어버렸다. 생도 시절의 그는 잘생긴 외모와 특유의 사랑스러움 덕분에 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얻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젊은 시절에 대단한 미남들이었다. 그 점이 수도사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여자들의 사랑을 갈구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한 골드문트에게는 상당한 이점이 되었다. 


  하지만 늙고 병이 들면서 여자들은 오지 않고 그의 곁에는 결국 나르치스만 남았다. 그래도 골드문트는 여자들을 탓하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고 죽는 과정이 온통 변화의 연속이듯이 사랑 또한 그럴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그래도 그는 행복한 남자였다. 오랫동안 이어온 우정은 끝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으며 우정 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자들끼리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면 닭살이 돋을 것 같다. 그런데 소설이라 그런가 감동 그 자체였다. 


  '내가 살면서 너 때문에 힘든 점도 많았지만 너한테서 배운 것도 많았고 너로 인해서 고단한 삶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어'라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에 모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감동 받았다. 분명 나르치스의 말에는 그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었다. 수도원에서 골드문트가 남긴 예술 작품을 보면서 대쪽 같았던 나르치스도 벗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에 빠져서 살아갈 걸 생각하니 짠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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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혁명 -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예소연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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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이상문학상 작품집보다는 김유정문학상 작품집이나 이효석문학상 작품집이 내게 맞다. 그러면서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찾아 읽은 이유가 뭐냐면 골고루 읽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 이번 년도 대상을 수상한 예소연 소설가의 작품인 '그 개와 혁명'은 참신하고 강렬하고 유머도 있었지만 내 취향의 글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짧게 떨어지는 문장들은 집중해서 읽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이 작품, 결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김경욱 소설가의 심사평도 감동적이었다. 혁명은 거룩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으며 그것이 '그 개'와 같이 뛰어놀 때, 작고 다정한 온기가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는…. 예전부터 혁명이란 단어가 거창하게 들려서 잘 쓰지도 않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실제로 잘 모르겠다)만 말했다. 부당한 일이나 인물에 맞서서 억압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려는 일인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이 소설을 읽고 혁명을 위대함으로만 치장하지는 말아야겠단 생각을 하게 됐다.


  김기태, 문지혁 소설가의 작품은 취향에도 맞고 메시지도 좋아서 집중해 읽었다. 공책에 메모도 남겼다. 김기태 소설가의 '일렉트릭 픽션'에는 한국전력공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한국전력공사는 전기를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전기를 필요한 장소에 보내고 팔기도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발전소는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집의 한쪽 창문에서 밖을 멀리 내다보면 여러 대의 풍력발전기가 작동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몸체는 우아하고 세 개의 날개가 돌아가면서 전기를 생산하는데 가까이서 보면 거인이다. 안산, 시흥에 살 때 가까이서 볼 일이 꽤 있었다. 풍력발전기 안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그걸 타고 올라가 수리도 할 수 있다고 들었다. 각각의 풍력발전기가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전기를 생산해내는 게 꼭 사람과 비슷하단 생각도 든다. 이건 소설 내용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각자의 몸에 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방전이 되도록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봐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공동 주택에서 '익명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소설 속에 나오는 글인데 계속 기억에 남을 듯하다.)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지내야 한다. 


  취미 생활을 집안에서 하려면 되도록 정적이어야 하고 동적이고 소음을 유발하는 취미 생활은 악행이요, 민폐에 불과하니, 힘든 세상에서 마치 단비가 되어줄 삶의 소소한 즐거움은 슬프게도 금지 사항이 되고 만다. 나도 공동 주택에 살 때 많이 생각해봤던 문제라 깊이 공감하면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문지혁 소설가의 '허리케인 나이트'는 여러가지 면에서 좋았다. 


  잘 다듬어진 문장에 인물의 내면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점도 그렇고, 결말도 신선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쳐서 하는 행동도 여유가 넘치는 한 남자와 가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친다고 할 수는 없는 한 남자가 있다. 후자의 남자가 전자의 남자, 그러니까 자기 친구를 은근히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도 남과 다를 바 없다고, 너에게도 시궁창은 있을 거라고 여기며 은근히 까려고 하는 장면이 나올 때 글을 읽는 내가 왜 이렇게 몸이 꼬이는지 모르겠다. 


  내친 김에 작가 인터뷰 내용도 세심하게 읽었다. 문지혁 소설가는 물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물이 계급에 있어 중요한 듯하다고. 든든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은 땀이나 눈물을 덜 흘려도 될 것 같고, 경제력이 부실한 사람들은 더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할 것 같다고. 정말 그렇지 않은가. 예전에 7월 한 달 내내 폭우가 쏟아졌을 때 반지하에 살던 사람들이 물 때문에 피해를 입었던 일이 떠오른다. 


  서장원 소설가의 '리틀 프라이드'는 아름다운 외모와 성(性)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설 속 흥미로웠던 문장을 옮겨 적는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이자 평균 신장에 한참 못 미치는 왜소한 남성이 '위대한 개츠비'가 되거나 '캡틴 아메리카'를 연기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본문 205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이 하나 있다. 


  디즈니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인 '인어공주, 백설공주'를 실사화하면서 여배우를 캐스팅했는데 두 작품 다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생김새도 예쁘다는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을 뽑았다. 배우가 세간에 공개되고 사람들은 영화와 두 배우를 비난했다. 그런데 비난하는 사람들의 파가 갈렸다. 한쪽에서는 흑인 여성도 안 되고, 특히 못생긴 여성은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는 입장.


  다른 한 쪽에서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그런 점은 중요치 않으나 못생긴 외모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일단 인어공주, 백설공주는 우리 머릿속에는 둘 다 백인 여성으로 인식 되었는데 특히 백설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눈처럼 흰 피부를 가진 여성임이 거의 확실하다. 인어공주는 까무잡잡한 피부여도 상관없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못생긴 여성이 인어공주, 백설공주를 연기함은 어떤가. 


  그건 이상하다. 왕자가 개성 있는 외모를 좋아했다는 설명이 미리 깔렸다면 대중은 그럭저럭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설명도 없이 대뜸 못생긴 여성이 왕자와 로맨스를 함은 대중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니 못마땅하다. 여자든, 남자든, 잘생기고 예쁜 외모를 좋아함은 죄가 아니지 않은가. 죄는 외모나 인격을 함부로 깎아내림이 죄다. 


  위대한 개츠비나 캡틴 아메리카도 미리 그들의 외모에 대한 설명이 깔렸다면 대중은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 설명도 없이 작고 왜소한 남성이 위대한 사랑을 하고, 영웅이 됨은 못마땅하다.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영화가 특별한 수작이라면 배우들도 얼마든지 빛이 날 수 있겠지만. 그런데 트랜스젠더가 위대한 개츠비가 되고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건?


  왜 꼭 그런 질문을 해야 할까. 그들을 그런 역에 캐스팅 할 게 아니라 그들 자체로 잘 어울리고 빛날 수 있는 역할을 주면 좋을 일을 가지고. 사람은 다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게 다르다. 다음으로 정기현 소설가의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읽는 동안 왜 그렇게 집중이 안 됐는지 잘 모르겠다. 글 속에서 수없이 질문을 던지는 화자 때문에 집중을 못한 부분도 있는데 희한하게 내용이 기억에 잘 남지 않았다. 최민우 소설가의 '구아나'는 집중해서 읽었다. 


  딱 요즘 시대 젊은이들의 이야기여서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요즘 젊은 세대는 소셜 네트워크나 유튜브에서 상당한 즐거움을 얻고 중독이 되다시피 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유튜브는 비교적 긴 동영상도 얼마든지 인기가 많을 수 있지만 쇼츠는 금방 보고 넘길 수 있어서 유튜브에 접속하면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쉽게 보고 빠르게 판단을 내리게 되니 영상의 진위 여부도 제대로 따지지 않고 믿게 되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점점 소셜 네트워크나 유튜브를 보면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저울질해가며 판단하는데 익숙해졌다. 자극적인 영상이나 남을 비난하는 영상을 보면서 흥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선한 영향을 주는 영상을 보면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제대로 된 지식을 재미있게 배우는 일도 가능하다. 아무래도 문제는 사람들이 자꾸만 자신이 원하는 행복보다 온라인에서 다른 사람들이 더 좋다고 추천하는 것들을 실천하고 인증하는 데서 오는 행복에 목을 매는 점이다. 


  입소문을 타지 못하는 것들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여기게 되며, 추천을 받지 못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여겨진다. 내가 좋다고 느껴도 만인이 시선을 주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된다.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빈 세상이 떠오른다. 아니면 차 있더라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감정들로 채워진 세상이 떠오른다. 휴대폰 화면, 모니터 화면 속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을 따라잡느라 정작 자기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일은 너무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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