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 - 삶의 모든 마디에 자리했던 음식에 관하여
정동현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운 떡볶이를 먹다 보면 뜨끈한 어묵 국물이 땡긴다. 알싸한 음식을 먹은 뒤에는 자연스레 그 맛을 감싸주는 뜨듯한 국물이 끌린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어둡고 자극적인 책을 읽은 뒤에는 마음을 달래주는 에세이가 땡긴다. 퇴사를 한 이후 줄곧 추리 소설만 읽던 나는 감사하게도 수오서재에서 제공해준 이 책으로 따스한 낮의 햇빛 아래서 군침이 도는 에세이를 읽을 수 있었다. 자극적이지도 않지만 싱겁지도 않은 맛있는 책을.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왜 우리가 때로 국수 한 그릇에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북받쳐 오르는지 작은 실마리를 찾고 싶었다."라고. 나도 궁금할 때가 있었다. 간단한 음식인데도 왜 아련한 감정이 느껴지는지. 그 의문을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저자와 함께 깨달아 간 거 같다. 왜 빈 그릇 위로 여전히 내 추억이 머물고 있는지. 기억을 따라 왜 내 감정이 새삼 피어오르고 있는지도.
이 책은 '1. 그리움의 맛', '2 나를 일으켜 세운 순간의 맛', '3. 뜨거우며 짜고 달았던 시간의 맛'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니 나도 떠오른 기억이 있었고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인데 내가 추억 여행을 하는 기분이라 좋았다. 그렇다면 나도 차례대로 나열해볼까? 그리움을 느끼게 만든 맛, 나를 일으켜 세운 맛, 잊을 수 없는 시간의 맛 순으로.
나에게 그리운 맛은 '초코 케이크'이다. 지금도 단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어릴 때도 초코 케이트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초코 케이크를 만들어준 적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맛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행복했었다는 사실은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종종 엄마한테 다시 만들어달라고 조르고 있지만 안 해준다(시무룩...). 글쓰는 김에 다시 한 번 졸라보아야 겠다. 아무튼 다시 한 번 그때의 감정을 느끼고 싶다. 그래서 초코 케이크는 내게 '그리움의 맛'이다.
엄마 얘기가 나온 김에 나도 저자처럼 비빔국수 얘기 한 번 해볼까. 우리 엄마는 비빔국수를 자주 만들어주는데 진짜 맛있다. 부족한 어휘력 탓에 맛을 세세하게 묘사하진 못하겠지만 적당히 매콤하고 적당히 짜서 좋다. 여기에다 만두나 해쉬브라운을 같이 먹으면 정말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따라하면 맛이 없다. 언제 한 번 엄마가 나 해 먹으라고 비빔국수 재료를 준비해놓고 나간 적이 있었다. 그대로 큰 그릇에 비벼 먹었는데 면맛(...)밖에 안 나더라. 저자도 그런 모양인지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이 맛을 쫓아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비빔국수를 무던히 따라 했건만 여전히 내가 하면 맛이 나지 않는다."
분명 같은 재료인데 왜 그럴까? 라면도 그렇다. 내가 끓이면 그저 그런데 아빠가 끓이면 그렇게 맛있다. 어른들 만의 손맛이 있는 걸까...앞으로 나는 계속 엄마의 비빔국수, 아빠의 라면을 찾을 거 같다.
그런 의미로 '나를 일으켜 세운 순간의 맛'으로 라면을 꼽아볼까. 어릴 때 일요일 아침마다 신라면을 먹었는데, 아빠가 라면 먹자고 하면 못 일어나가도 벌떡 일어났다. 아빠는 정말 라면을 잘 끓였다. 지금도 그렇다. 그때나 지금이나 말 그대로 '나를 일으킨 음식'이다. 이런 영향 탓일까. 난 매운 걸 잘 못 먹는 데도 매운 음식을 좋아하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는 우울한 날이면 매운 음식을 먹게 됐다. 그중에서도 난 짬뽕을 시켜 먹었다. 라면이 저자한테 몸과 마음이 아프면 찾게 되는 음식이었다면, 나는 짬뽕이 그랬다. 중학교 2학년, 아직도 기억난다. 내 생일날, 급식 시간에 같이 먹으러 갈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그 친구는 날 거들떠 보지도 않고 다른 반 친구들과 밥 먹으러 가버렸다. 그날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조퇴했다. 엄마는 우울한 나를 위해 짬뽕과 탕수육을 시켜줬다. 그때 이후로 우울한 날에는 짬뽕을 먹게 됐다. 저자는 라면의 끈끈한 맛이 밤새 지워지지 않았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이상하게 그날 먹었던 매콤하고도 우울했던 짬뽕의 맛이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가 시켜준 짬뽕 덕분에 최악은 아닌 하루였다. 그래서 짬뽐의 그 맛은 '나를 일으켜 세운 순간의 맛'이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우울해 하면 엄마가 말한다. "짬뽕 시켜줄까?"
짬뽕이 내 우울을 달래주는 음식이라면 내 행복을 더해주는 음식은 '감자튀김'이다. 감자튀김이라고 하니 간단한 걸로 기분을 좋게 하는 구나 싶겠지만 난 정말 감자튀김을 좋아한다. 위에서 비빔국수랑 해쉬브라운이랑 같이 먹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난 교회가 끝나고 오는 길이면 매번 햄버거 세트를 포장해왔다. 질릴 법도 한데 거의 한 번을 빼놓지 않고 사왔다. 하물며 지금보다 수중에 돈도 없었던 시절인데 돈을 아끼고 아껴 햄버거를 사먹었다. 오는 길에 콜라 한 모금, 감자튀김 하나 꺼내먹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감자튀김만 포장해온 적도 많았다. 그래서 감자튀김은 내게 '잊을 수 없는 시간의 맛'이다. 짭잘한 감자의 맛이 너무 좋다. 저자는 감자튀김을 '감자의 은은한 단맛, 기름의 고소함, 바삭한 식감'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표현이 딱 맞다. 그런데 나한테는 감자튀김은 '무척 간단한 음식'으로 여겨졌는데 요리사였던 저자한테는 집착에 가까운 정성을 쏟는 음식이 감자튀김이었다. 이래서 모든 음식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하나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고 있다고 했고, 에필로그에서는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숨겨진 추억들이 우리 머릿속에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 기억나지 않는 요리들. 만약 그것을 찾고자 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었던 이름들과 요리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저자의 말을 빌려 '시간을 밀려나고 사람은 잊히'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은 우리의 사라지지 않은 기억을 찾아 떠나는 추억의 여행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출판사의 제공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