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피곤한 사람과 안전하게 거리 두는 법
데버라 비널 지음, 김유미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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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피곤한 사람’, 있다 있어. 분명 이 제목을 보는 순간 한두 명(또는 그 이상)이 떠오른다. 말을 하거나 행동할 때마다 트집을 잡고, 나한테 문제가 있나 의심하게 만드는 사람,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도 과하게 비난하는 사람, 잔잔한 불평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사람. 이 책을 읽다 보니 그건 ‘가스라이팅’이었다. 맞다, ‘가스라이팅’이라고 하면 분명 정신적으로 뭔가 조종하거나 학대하는 ‘심각한’ 관계를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일상에서 겪는 ‘뭔가 피곤한’ 사람과의 관계 역시 가스라이팅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가스라이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첫 단계는 그 문제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 책은 “길들이려면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말처럼 그 경험에 이름을 붙이면 문제는 명확해진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는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이 사례들을 읽다 보면 분명 그중 몇 가지는, 어라, 이거 내가 겪는 일인데, 하는 일들이 있다. 가스라이팅이 그 말의 근원인 영화 <가스라이트>에 나오는 것처럼 한 사람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가족, 친구, 애인, 동료, 상사들에게 미세한 가스라이팅에 시달린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의무감으로, 상사를 기쁘게 하고 비위를 맞춰야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 회사 생활에서 특히 그렇다. 착한 아이, 완벽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내면화하는 ‘K-장녀’로 사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심각한 사례가 아니더라도 관심을 보이다 갑자기 매정하게 대한다든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만든다든가,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일도 모두 ‘가스라이팅’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

사실 이 책에서는 가스라이팅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가스라이터의 전략을 파헤치는 1부가 가장 핵심으로 보인다. 가스라이팅 사례를 이해하고,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건강한 경계를 세우고, 무엇보다 결단하고 건강한 관계를 새로 만들며 관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7단계로 알려주는 2부는 사실 1부를 실행하지 못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 저 사람이 과하게 화를 내고, 매정하게 대하고, 내 잘못이 아닌 것 같은 일도 내 탓을 해도 보통 사람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 부정적인 감정을 내면화한다. 내 탓이오, 라며. 나 역시 ‘이거 가스라이팅’이야 인정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얻은 수확이라면 ‘이것도 가스라이팅이었네’ 하며 내 탓으로 내면화했던 일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었던 점이 가장 크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스라이터를 고칠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이다. 방법은 그 사람을 멀리하고 나 자신을 추스르는 것뿐. 그 과정에서 내가 매정하고 나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것 역시 가스라이팅의 일부일 뿐이다. 이 책은 나쁜 것과 멀어지고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과 친해지고, 한 걸음 나아가고, 감정을 기록하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한다는 추상적인 일을 ‘실제적인 행동’으로 만들어 주는 워크북 같은 책이다. 스스로 점검해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매우 실용적인 책의 구성이 돋보였다. 이 책이 알려주는 단계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자신의 감정을 살피고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살피다 보면 건강한 관계를 키운다는 가장 단순한 해결책에 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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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조각가들 - 타이레놀부터 코로나19 백신까지 신약을 만드는 현대의 화학자들
백승만 지음 / 해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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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조각가들>, 백승만 지음, 해나무

뱀독에서 뽑아낸 고혈압 치료제, 주목 나무에서 추출한 항암제, 뱀에서 추출한 당뇨병 치료제... 인류를 구원한 의약품은 의외로 단순하고 간결한 화학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구조를 발견한 이들의 역사와 노력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운으로 찾아내고 자연을 모방하고 사람을 연구해 물질을 창조한 의약품 개발의 역사를 거쳐 새로운 mRNA 백신을 개발하게 된 지금까지, 의약품 개발의 현재와 미래를 훙미로운 역사책처럼 풀어 놓는 이 책은 인간의 호기심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해 왔는지에 대한 역사로도 볼 수 있다.

플라스크와 시약을 도구 삼아 화학분자를 조합하는 화학자이자 의약품 합성 교수인 저자는 자신을 ‘분자 조각가’로 칭한다.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들처럼 화학분자라는 재료를 빚어 인류를 구원하는 물질을 창조하는 화학자라면 위대한 예술 작품을 남긴 ‘조각가’들에 빗대어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유기화학이라면 간신히 재수강을 면할 정도의 학점이라는 어두운 기억만을 가진 내가 탄소 10개, 수소 9개, 질소 3개로 이루어진 항암제 글리벡의 화학분자구조를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한 적은 결코 없지만, 이란 단순하고도 강력한 분자를 만들어 사람들을 살려낸 역사는 분명 감탄스럽다. 원인이 되는 출발물질과 결과가 되는 약물 사이를 연결하는 과학자들의 기발하고 재치있고 때로는 어이없기도 한 실수와 실패들은 결국은 아름다운 결과로 이어진다.

충실한 기초과학 연구를 시작으로 정부와 제약사가 협업해 빠르게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하루 빨리 사람을 살려낸 에이즈 치료제 지도부딘의 개발 사례, 탈리도마이드나 바르비탈계 수면제처럼 이성질체나 분자 구조를 조금만 바꿔 새로운 효능을 내거나 부작용을 줄인 개선된 약물을 만든 사례들을 화학 구조를 곁들여 섬세하게 풀어낸 이야기는 정말 흥미롭다. 여기에 여성으로 온갖 고난을 겪으며 대사 항암제를 개발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거트루드 엘리언의 이야기에서 현대의 분자 조각가들이 mRNA 단백질로 만들어 내는 코로나 백신까지, 저자의 말대로 ‘세렌디피티’와 지식, 호기심과 여러 사람의 협업이 이뤄 온 빛나는 역사가 곳곳에 반짝인다.

이렇게 약 만들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이 유용한 약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만든 약이 안전할까 라는 두 가지 질문을 두고 분자 조각가들은 지금도 안전하고 좋은 약을 만들기 위해 고민한다. 이 흥미로운 고민의 역사를 함께 살피며 미래의 의약학을 예상해 보는 여정은 의약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과학에 흥미있는 독자들은 물론 화학이라는 단순하고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지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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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4-28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호기심이 학문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네요.
 
ADHD 2.0 - 산만하고 변덕스러운 ‘나’를 뛰어난 ‘창조자’로 바꾸는 특별한 여정!
에드워드 할로웰.존 레이티 지음, 장석봉 옮김, 이슬기 감수 / 녹색지팡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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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도 주석도 자세해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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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트렌드 - 텐션과 사랑이 넘치는 요즘 말 탐구서
정유라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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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말의 트렌드는 물론 그 말을 사용하는 언중의 내면까지 살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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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디깅 Tokyo Diggin' 플레이리스트 가이드북
도쿄다반사 지음 / 노웨이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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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책. 음악을 들으며 읽으면 여기가 바로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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