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하는 삶 - 무위에 대하여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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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 관조하는 삶 (한병철, 김영사, 2024, 1판 1쇄)


원제 “contemplativa(바라보다, 숙고하다)”를 “관조(觀照-조용한 마음으로 대상의 본질을 바라봄)”로 옮겼다. 나는 라틴어 기본 지식이 없어서 불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관조’의 이미지로 이 책을 처음 받아들였다. 내가 가끔 경험했던 불교에서는 관조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했다. 모든 대상은 나의 마음이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에 그 대상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나의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실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내 마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대상의 본질을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뿌연 안개 같은 느낌만 남았다.

저자는 짤막한 문장을 거침없이 내던진다.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이 내게 강한 상처를 남긴다. 마치 융단 폭격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 몸을 비롯해 주변은 모두 초토화되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참 신기하다. 폐허로 변해버린 공간에서 작은 싹이 자란다. 저자가 던진 생각들이 텅 비어버린 내 머릿속에서 새로운 기반으로 자라난다. 그동안 익숙해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것들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지나쳤던 것들에 시선을 두게 된다. 둔기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후 뇌세포들이 모두 새롭게 자리 잡는 느낌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무위다.”(13쪽)

“목적과 효용으로부터의 자유는 무위의 핵심 본질이다. 이것은 행복의 기본 공식이다.”(16~17쪽)

“안식일의 쉼은 단순히 창조 노동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쉼이 비로소 창조를 종결한다.”(102쪽)

 

언뜻 보기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계속해서 달려든다. 그런데 그 의미를 결국엔 어렴풋이 이해한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까지 필연적으로 헤맬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동서양의 인물과 그들의 사상 속을 유유히 휘젓고 돌아다닌다. 문장과 문장 사이는 매끄럽게 연결되고,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어느 순간 나는 저자의 논의로부터 저만치 멀리 뒤떨어져 버린다. 역시나 철학하기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무위의 윤리, 장자와 하이데거-

 

무위자연(無爲自然)은 노장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위가 동서양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하이데거의 무위 윤리의 핵심은 불가능한 것을 강제하지 않으면서 가능성을 활용하는 것이다.”(52쪽)

 

서양 철학에서도 분명히 무위의 개념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이 동양의 노자나 장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필요 없는 지점이었다. 지금껏 동서양의 철학이 서로 다른 부분에만 주목해왔던 것과 다른 매우 혁신적인 구성이었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던 점 하나.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아도(무위) 그 본질의 가능성이 발현되도록(자연) 유도하는 것이 가능한가이다. 내가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교육은 아무리 좋게 포장하고 조직해보아도 ‘무위’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가능성은 학생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럼 교사는 불필요한 강제를 하는 사람이 되거나, 학생의 가능성이 발현되도록 유도하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존재는 아니다. 그럼 학생은 교사 없이 가능성을 발현시킬 수 있는가. 학생이 인위적 도움 없이 스스로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까. 만약 그 가능성을 발현하지 못한 학생이 있다면, 그 책임은 그 학생 스스로 져야 하는가. 자연스럽게 발현되지 않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게 옳은가. 내가 무위에 대해 온전히 이해했다면 이런 의문들에 답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사실 하나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근대정신, 새로움은 파괴적이다.-

 

저자의 주장은 매우 과격하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과격함이다. 자본주의에서 강조하는 효율적 삶은 관조적 삶을 비하하고 파괴한다고 한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노동은 효율적이고 신성하지만, 여가와 쉼은 불필요한 것이다. 더 많은 능력을 보유하고, 더 많은 생산을 해야 한다고 믿는 자본주의적 신념은 인간을 도구화하고 착취한다. 매우 혁명적인 주장이다. 그런데 그 덕에 기존 질서가 가진 한계를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는 논쟁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둘 다 모두 인간의 관조적 삶을 파괴하는 근대의 새로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지 자세히 묘사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그 믿음이 우리를 얼마나 파괴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제 성과 사회 안에서 우리는 성과를 향상하기 위해 경쟁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억압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배는 더 스마트한 형태를 띠고, 더 많은 성과를 내라는 끊임없는 다그침으로 표출된다. 성과를 향한 이 같은 미묘한 강제는 치명적이게도 자유의 증대로 해석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한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고 믿는다.”(124~125쪽)

 

‘워라밸’이 한창 유행한 적이 있었다. 성과를 내기 위해 일하는 자는 행복할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행위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은 오히려 우리를 착취한다. 자유를 얻기 위한 여정은 결국 우리를 생존 경쟁으로 내모는 안타까운 현실로 이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디지털 시대의 지옥-

 

“우리는 어마어마한 데이터와 정보를 저장하지만, 기억을 되짚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영원히”에 등을 돌린다.”(84쪽)

 

디지털 기술로 인해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정보를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디지털화가 오히려 인간 존재를 소멸시킨다고 주장한다. 디지털은 셀 수 있는 대상이지만, 인간 존재는 그렇지 않다. 디지털은 정보와 자본의 빠른 이동을 촉진하지만, 인간 존재는 농축된 시간과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다. 디지털화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는 것은 특히나 “함께-존재”(88쪽)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인간 존재는 ‘상징(symbol)’을 공유하는 ‘우리’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과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고립시킨다. 원초적 외로움 속으로 인간 존재를 밀어내버린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타자화하여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개인화된 인간은 무한 경쟁 속에서 생존을 목표로 살아가는 짐승이 된다. 나는 이런 모습을 최근 드라마 지옥 2(2024)에서 보았다.

 

지옥이 만연한 세상에 세 가지 종교 세력이 있다. 새진리회, 소도, 화살촉. 그런데 새진리회와 소도는 이기적인 인간에 의해 신념과 목표를 잃고 세상과 타협하는 단체로 전락한다. 정부는 이 빈틈을 노려 종교적 열광으로 가득 찬 화살촉을 없애려는 계략을 짠다. 정무수석 이수경은 시즌 1에서 ‘죄인’으로 지목된 박정자를 이용한다. 시즌 2에서 그녀는 ‘부활자’로 명명된다. 정부는 박정자를 이용해 새진리회와 소도를 경쟁시키고, 화살촉은 소멸시키려 한다. 나는 박정자를 죄인으로 명명한 새진리회, 그녀를 부활자로 명명한 정부 모두 지옥을 만든 존재라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처럼 박정자라는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해 타자화하고, 그녀를 이용해 사람들을 생존 경쟁에 매몰되도록 하여 그들을 통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 세상이 끝나는 순간. 정무수석 이수경은 죽음을 고지받는다. 새진리회 김정칠 회장은 몰매를 맞아 죽는다. 하지만 소도의 민혜진과 박정자는 다르다.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인간성 회복뿐이었다. 죄인, 부활자로 타자화되었던 박정자는 다시 두 아이의 엄마로 돌아온다.

 

“관조하는 삶이 비로소 신적인 자족을, 완전한 행복을 약속한다.”(98쪽)

 

신적인 자족은 어떤 느낌일까. 완전한 행복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저자의 주장대로 관조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내게 가능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그 상태를 경험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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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만나는 지름길, 철학의 뒷계단 - 탈레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생애와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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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 철학을 만나는 지름길, 철학의 뒷계단 (빌헬름 바이셰델, 김영사, 2024, 1판 1쇄)


서양 철학, 그것도 철학자 34인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책이라 처음부터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재미와 깊이를 겸비한 철학 입문서’라는 말을 믿고 그 ‘재미’가 어느 정도일지 경험해보고자 도전해보았다. 일단 이 책은 ‘철학자의 생애’를 다룬 점에서 ‘재미’가 있다. 그리고 그 철학자의 생애로부터 만들어진 ‘철학’은 역시나 이해하기 어려운 ‘깊이’가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재미와 깊이 모두를 겸비한 책으로 손색이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일단 표지에서부터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인 빌헬름 바이셰델은 “철학자들의 사상이 연유한 근본 경험을 연구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인”(표지, 저자소개) 연구자로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 책의 제목에도 담겨 있듯, 철학은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뒷계단”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뒷계단은 보통은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다. …… 그냥 생긴 대로 등장해 생긴 대로 보여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앞계단을 통한 것과 같은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뒷계단을 통해서도 이 집의 거주인(철학자)에게 갈 수 있는 것이다.”(7쪽, 프롤로그)

 

저자는 뒷계단으로 들어가는 것이 철학자의 사상에 가려진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솔직히 한국에는 뒷계단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가 의도한 바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점점 그 의미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뒷계단”이란 표현을 “등산”이라고 바꾸어 불러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물론 “철학의 등산”이란 제목은 좀 이상하긴 하다.)

 

어떤 철학자와 함께 등산한다고 생각해본다. 저 멀리 높은 산이 보이고, 아직은 길이 평탄하다. 주변에는 잔잔한 시내가 흐르고 꽃과 나무들이 있는 넓은 들판이 있다. 나는 찬찬히 철학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편안하게 나눈다. 그러면서 점점 그의 삶에 다가간다. 그러다 이제 산이 시작된다. 점차 숨이 가빠지고 산 중턱 즈음에서는 고뇌와 번민에 가득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점차 말은 없어지고 사유가 시작된다. 견뎌야 한다. 견뎌내는 자만이 산 정상에 다다를 수 있을 테니까. 온몸에 비가 오듯 땀이 흐르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겨우 산 정상에 도착했다. 이제 깨달음에 이른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무언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가슴에 가득 찬다. 하지만 깨달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정상에서 느꼈던 그 감정의 여운이 계속되고, 순간을 가득 채웠던 깨달음이 다시 재구조화되며 완성된다. 이제 산에서 완전히 내려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왔지만, 예전의 내 모습이 아니다. 산 정상에 이르기 위해 거쳤던 모든 과정이 내 안에 오롯이 자리 잡는다. 경험과 기억이 이제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된다.

 

어쩌면 “철학하기”는 등산을 닮아 있다.

 

 

-철학은 어렵다.-

 

그렇다. 나는 이 책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철학은 완전히 어렵다. 철학을 정문으로 들어가 온전히 맞닥뜨렸다면, 나는 이 책을 그대로 덮고 포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친절하게도 “뒷계단”을 통해 철학자의 생애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 책에 등장하는 34인의 철학자를 따뜻한 어조로, 약간은 유머를 섞어서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철학자의 삶에서 이런저런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부유했고, 어떤 사람은 똑똑했으며, 어떤 사람은 우울했다. 그리고 그런 감정에서 출발한 그들의 삶이 어떻게 “철학하기”로 이어졌는지를 볼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의 철학 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은 좀 아쉽다. 내 공부가 부족했다. 하지만 분명히 깨달은 것은 있었다.

 

“철학은 인간이 용기를 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292쪽, 볼테르)

 

철학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란 점이다. 그래서 누구나 다 살아가면서 한 번은 다 경험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철학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철학자들이 철학을 해낸 위대한 경험자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철학은 절대성, 확정성, 무한성, 불변성을 찾아 나가는 여정이다. 그것들이 불확실하고 유한한 우리 삶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바다 위에서 오랫동안 표류하고 있는 배가 단단한 육지를 찾듯 필요하지만 쉽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너무나도 똑똑한 철학자들은 그들을 붙잡아줄 단단한 지지대를 찾으려 몸부림쳤다. 그들 덕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버틸 수 있다고 믿는다. 철학자들은 부서진 채 표류하고 있는 배 위의 고독한 선장이다. 하지만 그들은 선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한한 권능을 가진 자들이다. 그 권위를 바탕으로 선장(철학자)은 무지한 선원들을 망망대해에서 건져 풍요로운 땅으로 옮겨줄 수 있었다.(하지만 무지한 선원들은 그들을 비난하거나 모욕하거나 무시하기 일쑤였을지 모른다.)

 

 

-철학은 역사다.-

 

34인의 철학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삶은 그들이 살아가고 있던 당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연결해보았더니 그것이 곧 역사가 되었다. 그리스적 사유가 탈레스로부터 시작하고, 기독교적 사유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유럽에 자리 잡았다. 데카르트로부터 근대 이성과 계몽의 시대가 도래하였으며, 루소와 흄에 의해 이성의 한계가 폭로되었다. 그들의 삶을 이렇게 순서대로 살펴보는 것이 매우 재미있었다. 철학자의 삶은 곧 시대상을 반영했다. 이런 역사성을 바탕으로 철학을 읽어본 경험이 이제까지는 없었다.

 

“그(토마스 아퀴나스)는 대립하는 두 개의 세계관을 서로 화해시키고, 그것도 두 세계관의 어느 쪽도 정당성을 잃지 않도록 화해시키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166쪽,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서양 철학사를 보면서 하나 인상적인 점이 잘 드러났다. 서양 철학자들은 그들의 시대에 가장 부합하는 시대 정신을 만들어내면서 선배 철학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온순하고 착실한 제자의 지위에 머무르지 않았다. 스승과 선배의 사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최소한 그들에게서 벗어나려 시도했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조금 더 위대한 철학자들은 인정받기보다 욕을 먹었고, 화려한 삶을 누리기보다 은둔을 택했다. 나는 이런 모습이 동양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동양에서는 스승과 선배의 말씀은 곧 경전이었고, 그것은 학습과 숭배의 대상이었지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은 드물었다. 과거 위대한 지성을 본받고 그대로 실천하는 데 주력했지, 새로운 시대 정신을 만들어내는 데는 부족했다. 그래서 서양은 직선형 역사 발전이, 동양은 순환형 역사 반복이 주로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매우 흥미로우면서 인상적인 점이었다.

 

 

-철학은 현재에도 필요한가.-

 

철학은 필요할까. 철학은 우리 현실에 어떤 쓸모가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계속 고민했다. 내겐 왜 이 책과 같은 철학 입문서가 필요할까.

 

“본질과 바탕에 대한 질문이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철학의 핵심 관심이기 때문이다.”(17쪽, 탈레스)

 

탈레스가 별을 관찰하느라 위를 쳐다보다 물에 빠지자 그의 하녀가 제 발치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그를 비웃는다. 기본적으로 철학은 형이상학을 다루고 있어서 현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게다가 본질이 무엇인지가 왜 중요하단 말인가.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학문이 우리네 인생에 어떤 쓸모가 있을지, 우리가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내 고민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 나는 철학이 누구에게나, 어떤 분야에서든 필요하다고 본다. 소위 ‘개똥 철학’처럼 말이다.

내 나이가 이제 불혹을 넘겼다. 현재의 삶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나보다 인생에 익숙한 사람들도 많지만, 어리숙한 사람도 주변에 많다. 그래서 어른처럼 행동해야 하고, 무언가 조언을 해줄 상황이 벌어진다. 하지만 난 아직도 내 삶에 대해 만족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옳은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은 내 삶에 철학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내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삶에 명확한 목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 것인지는 모두 “철학하기”에 달렸다. 내 비록 위대한 서양 철학자처럼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물음에 답할 능력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내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내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철학은 지금 내 삶에 가장 필요한 도구다.

 

 

이 책을 읽으며 약간 흥미가 더 생겼던 부분이 있었다. 바로 “언어와 철학”이다. 철학은 형이상학의 영역이 많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추상적 개념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철학과 언어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어는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해서 극단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에 이르는 사유 과정”이 드러날 수 있는 특별한 문법적 장치(73쪽, 플라톤)가 있다고 한다. “우리 말에는 부정(否定)의 낱말이 있어” 서양의 주요한 형이상학 개념에 헷갈리지 않고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201~2쪽,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언어를 사용할 줄 알면 철학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저자처럼 철학자의 생애와 역사를 통해 철학에 쉽게 접근하고자 했던 것처럼, 언어를 통해서도 “철학하기”의 길을 쉽게 열어줄 수 있는 선지자가 나타나길 기대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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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스토리 한국사 - 시공간을 초월한 33번의 역사 여행
이기환 지음 / 김영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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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 하이(Hi), 스토리(Story) 한국사 (이기환, 김영사, 2024, 1판 1쇄)

우리 역사 속 다양한 소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역사 스토리텔러이자 문화유산 전문기자인 저자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은 아주 선명한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처음 접했던 때, 나는 초임 교사였다. 수업을 이끌어갈 충분한 역량이 부족했던 시절, 교과서 속 지식만으로는 학생의 집중을 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고, 열심히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니던 중 그의 기사를 만났다. 수많은 ‘~카더라’의 홍수 속에서 그의 기사는 단연 돋보이는 자료였다. 새로운 사실이나 최신 문화유산을 소재로 엄청난 양의 사료를 뒤져 기사를 완성해냈기 때문이다. 흥미와 역사적 사실을 모두 완비하고 있는 그의 기사는 내게 완벽한 수업자료였다. 다만 수업 내용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교과서 내용에 맞춰 적절히 가공해 활용해야 했기 때문에 연재된 기사를 모두 읽어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그의 기사를 모두 모아 목록을 만들고, 그것을 활용한 수업을 진행해보겠다는 목표를 품었다. 물론 아직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가 연재한 기사 내용을 정리해 책을 내 줄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소개되자마자 얼른 서평단을 신청했다.

 

 

-저자의 놀라운 깜냥-

 

저자는 자신의 직업이었던‘기자(記者)’가 이런 존재라고 설명한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는 늘 낮은 곳에서, ‘놈(者)’의 자세와 신분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6쪽, 들어가며)

 

나도 학생의 수준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는 역사를 가르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의 눈높이와 관심에 맞게 교과서의 내용을 핵심 개념으로 최소화했다.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재미있는 방법이나, 학생이 흥미를 느낄 만한 소재를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서 발생했다. 학생들이 수업을 재미있어하는 듯 보였지만, 정작 기억에 남는 게 없다고 했다. 내 수업은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것만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정작 전달해야 할 핵심 내용을 전하지 못했다.

공대생이었던 저자가 문화유산 전문기자가 되기까지, 기자로서 어떤 글을 쓰는지는 인사 발령에 따라 달라졌다. 그는 자신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기사를 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 방법이 나와 정반대였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엄청난 양의 1차 사료를 뒤지며 스스로 공부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전문가를 찾아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유적지를 답사했다. 심지어 그는 문화인류학으로 석사학위까지 받는다. 그래서 그의 기사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재미도 있지만, 전하고자 하는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이런 진정성을 갖춘 노력이 그가 말하는 ‘깜냥’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는 겸손하기까지 하다.

 

“나의 수고로 읽는 이들이 상식의 폭을 조금이나마 넓히고 시쳇말로 ‘아는 척’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11쪽, 들어가며)

 

 

-역사 스토리텔러, 문화유산 전문기자-

 

이 책에는 저자가 꼽은 흥미로운 사실이 33가지나 들어 있다. 현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박물관에서 특별히 전시되거나, 최근 주목받는 문화유산까지 기존에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들이다. 그래서 내가 저자를 대학생 때 만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상상했다. 그가 소개한 것들을 더 공부해서 졸업논문으로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비교한 글은 역사 전공자로서 1차 사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참신한 글들은 분명 저자의 엄청난 노력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 덕분에 그는 충분히 ‘역사스토리텔러’, ‘문화유산 전문기자’라는 간판을 충분히 가질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앞으로 문화유산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 박물관 특별 전시를 가끔이라도 검색해 정리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역사 관련 DB를 종종 활용하여 글을 써야겠다고도 다짐했다. 사실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1차 사료에 접근할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어떤 글을 쓰더라도 1차 사료를 활용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최근 답사를 다녀오면 꼭 기록으로 사진과 자료를 정리해두려고 노력한다. 답사를 다녀오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사진과 글로 정리해두는 것도 참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조금씩 노력을 기울여서 나도 저자처럼 흥미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자료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사, 현실에 기반한 역사-

 

저자 단순히 문화유산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소개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모두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낙랑의 역사를 다루면서 한국, 중국, 일본의 복잡한 속내를 비교하는 것부터 군주들의 재난 대처법을 통해 통치자가 갖춰야 할 지도력까지, 대부분 내용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글이 더욱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글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읽는 거울’(11쪽)이 되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바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현실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뉴스를 1면, 2면, 3면 이런 식으로 ‘중요도’와 ‘가치’에 따라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사료’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측면에서 종이신문이야말로 ‘현대판 실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11쪽, 들어가며)

 

이 얼마나 놀라운 시각인가! 종이 신문이나 인터넷 신문을 보면서 그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스쳐 지나갈 하나의 사실일 뿐이라고 봤다. 그래서 근현대사를 가르치면서도 신문을 1차 사료로 찾아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1880년대 근대적 의미의 신문이 발행되면서부터 그 당시를 가장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료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 가진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생각할 때, 신문도 그 정도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그 현재성이야말로 이 책에 생생함을 부여하는 큰 요소다. “오희문의 ≪쇄미록≫”(183쪽)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의 참담한 현실을 볼 수 있었고, “신라인의 줄임말 ‘답(沓)’”(271쪽)을 통해서는 현재 우리가 쓰는 이모티콘과 줄임말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지금뿐만 아니라 역사 속의 현재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저자의 글은 참 매력적이다. 수업 소재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게 한다. 그런데 이 책이 조금 아쉬운 것은 기사와는 달리 자료의 상세한 출처나 원전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공부하고 활용하기 좋은 책은 활용된 자료와 참고 문헌이 상세하게 소개된 것들이었다. 나는 이 책이 영상이나 관련 자료들을 품고 있었다면 더 좋은 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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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의 세계사 - 문명의 거울에서 전 지구적 재앙까지, 2025 우수환경도서
로만 쾨스터 지음, 김지현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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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 쓰레기의 세계사 (로만 쾨스터, 흐름출판, 2024, 초판 1쇄)

지은이 로만 쾨스터는 독일의 역사가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쓰레기 경제의 전문가이다. ‘쓰레기 경제’라는 말이 생소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인류가 있는 곳에는 당연히 쓰레기가 발생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수거하고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경제적 힘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물자가 부족할 때는 쓰레기의 양을 줄일 수 있는 재활용과 재사용이 증가하는데, 물자가 풍부한 시대에는 오히려 쓰레기를 늘리는 방향으로 과잉생산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모두가 단순히 쓰레기를 줄이고 환경 오염을 일으키지 않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쓰레기 경제적 관점으로’ 쓰레기의 시작부터 쓰레기의 미래까지를 살펴본다. 1부에서는 근대 이전 인류가 정착하면서부터 시작된 쓰레기 문제를 다룬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가 자연적으로 처리될 수 없는 수준까지 쌓이면서 쓰레기를 수거하고 처리하는 방법이 등장하는 역사적 과정을 설명한다. 2부에서는 산업 시대 등장한 다양한 발전이 쓰레기 문제에 끼친 영향을 살펴본다. 마지막 3부에서는 대량 소비의 시대에 폭발하는 쓰레기에 대해 살핀다. 이 책은 쓰레기 문제가 우리의 삶 속에 매우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우리 스스로 쓰레기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졌다.

 

“이 책의 목표는 쓰레기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 방안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368쪽, 에필로그; 바다로 밀어낸 쓰레기)

 

 

-역사적 교훈-

 

지은이는 쓰레기를 ‘버려지는 물건’(13쪽)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쓰레기를 적절하게 정의하는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이 책에 등장하는 ‘버려지는’ 것 중에는 쓸모없고 더럽지 않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 유물 중에서 지배자의 무덤에 함께 들어가는 부장품이나 전쟁, 사고 등에 의해 어떤 지역에 매장되는 물건 등은 쓰레기라고 보지 않고 유물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현대 사회에서 상품으로 생산된 것 중에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버려지는 물건들이 있다. 이건 쓸모가 없어서 버려지는 경우다. 이처럼 쓰레기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신기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쓰레기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근대 산업 사회가 등장하기 전에는 대부분 분뇨와 같은 생활 폐기물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인류가 정착한 곳 중 쓰레기로 문제가 된 곳은 ‘도시’였다. 농촌에서는 대부분 쓰레기가 자연 분해될 수 있었고, 도시에서 발생한 쓰레기의 대부분이 주변 농촌으로 이동하여 처리될 수 있었다. 그래서 도시 쓰레기는 물에 흘려보내거나 수거하여 주변으로 이동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른바 쓰레기 수거와 처리가 시작된 것이다. 빠른 물살이 있는 주변이거나 경사가 급한 해안가의 경우 쓰레기 처리가 쉬워서 도시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시의 발전이 쓰레기 처리와 관련이 있다는 관점은 처음 접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놀라웠다. 중세의 유럽 도시나 18세기 한양 거리가 매우 더러웠고, 그 오물을 처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양한 전염병이 창궐했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문제를 처리하고자 한 당대 사람들의 노력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경험이 없었다.

 

“19세기 이후 도시 위생 담론은 전근대 도시의 지저분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외교 관계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도 시민들은 도시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53쪽, 도시의 시작, 그리고 지저분한 발전)

 

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쓰레기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지금껏 간과하고 있었다. 전근대 유럽의 도시가 더러웠던 것은 성벽에 가로막힌 채 전쟁으로 인해 교외가 파괴되면서 쓰레기를 처리할 수 없었다는 저자의 설명은 그야말로 신세계를 발견한 느낌을 주었다. 그들이 무지해서, 위생적이지 못해서 더러웠던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더러움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오히려 동양보다 청결한 도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부터 사람들은 청결함과 불결함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청결한 문화를 가진 대상을 만나면 그들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대체로 17세기 이전까지는 유럽인들이 동양의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그들의 청결함을 칭송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자신이 사는 곳을 맹렬히 더럽다고 비난하는 때도 있었다. 청결함을 좋아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청결이 자신을 남과 차별화하려는 욕구가 반영된 우월함의 표상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타인에게 위생(청결)을 강요하는 것이 일종의 폭력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지은이는 16세기 후반 유럽 내 종교 분쟁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문명 차이를 보여주는 논쟁의 주제로 ‘위생’이 등장하는 것을 지적하고, 19세기 서양 탐험가들이 아시아나 아랍에서 불결한 도로를 묘사함으로써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을 살핀다. 위생이 “분화를 만드는 논리”(117쪽)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산업 혁명이 가져온 변화-

 

산업화는 도시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에 따른 쓰레기 처리 기술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쓰레기 수거와 처리에 관한 기술 발전은 전근대 사회에서 발전시켜 온 재활용과 재사용을 활성화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통적 처리 방식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도시가 더욱 거대해지면서 쓰레기 발생량과 처리 비용도 동시에 급격히 증가했다. 엄청난 기술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를 처리하는 방법은 크게 변화하지 않은 듯 보였다. 도시에서 쓰레기를 수거하고, 교외 지역으로 이동하여 매립하거나 소각하는 방식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게다가 더 중요한 문제가 추가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쓰레기 처리 문제를 바라보는‘경제적 관점(자본주의 방식)’이었다. 쓰레기 처리를 ‘비용’의 관점으로 보면, 쓰레기 처리 과정보다 공영화, 민영화 논쟁이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계획경제 하 소련이나, 전시 체제 하 영국이나 독일에서는 정책적으로 쓰레기 분리수거와 재활용이 강조되었지만, 이마저도 대량 소비 시대로 넘어가면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위생이 곧 권력이 되는 구조도 계속되었다. “백인 거주 지역과 흑인 거주 지역을 분리하는”(190쪽) 형태의 식민지 지배 방식도 등장했다. 전근대 사회의 쓰레기 처리 방식에서 얻은 교훈은 산업 시대에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

 

 

-쓰레기의 종착지, 라스트 씽크-

 

자본주의의 발달과 대량 소비의 시대는 쓰레기 문제에 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쓰레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쓰레기가 증가한 원인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간단하다. 바로 과잉생산, 과대포장, 일회용품의 증가다. 하지만 문제는 쓰레기 처리 방식은 전근대 도시의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1차적 수거와 2차적 처리 방식이다. 쓰레기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이제는 도시 밖으로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전근대 사회와 달라진 새로운 쓰레기가 새로운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는 쓰레기 문제를 새롭게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 우리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허덕이고 있다. 쓰레기 문제의 가장 큰 핵심은 모든 쓰레기를 처리할 역량이 없다는 점이다. 대량 소비 시대의 쓰레기 문제는 이제 태평양 위의 거대 쓰레기 섬(GPGP)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쓰레기 인공 구조물은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라 ‘의도적’으로 버려지는 위험한 폐기물과 ‘관리에 실패한’ 쓰레기의 결과물이다. 대량 소비의 편리함과 자본주의적 성장의 관점에서 의도적으로 감춰진 이 결과물에 대해 우리는 관심이 없다. 지금 당장은 우리 곁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이 거대한 쓰레기 섬이 우리 지구를 완전히 뒤덮는 날이 올 것이다.

 

 

영화 엘리시움(2013)은 2154년 지구가 쓰레기에 뒤덮인 모습을 묘사한다. 마치 필리핀 마닐라의 쓰레기 매립지에 형성된 쓰레기 도시 스모키마운틴을 보여주는 듯 하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쓰레기로 삶을 연명한다. 그들이 선망하는 ‘위생적이고 청결한’ 세상은 그들로부터 격리된 우주 공간, 엘리시움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한 주인공의 분투는 눈물겹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2154년까지 채 100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며 쓰레기 문제를 도외시한다면 그와 같은 미래에 곧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말은 매우 허무했다. 엘리시움이 지구인들에게 점령되면서 ‘격리된 위생 공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위생과 청결의 문제는 격리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도시 공간에서 발생한 쓰레기를 다른 곳으로 밀어낸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그 같은 깨달음을 영화보다 더 충격적인 현실을 통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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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 아무도 가지 않은 길 - 초대 공수처장이 말하다
김진욱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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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 공수처,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김진욱, 알에이치코리아, 2024, 1판 1쇄)


2021년 1월 21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범했다. 문재인 정부 때 검찰 권력을 견제하고 고위공직자의 부패를 수사할 권력기관이 새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기관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 벌써 30여 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논의와 협상, 입법 과정을 거쳐 어렵게 등장한 만큼 사람들의 관심은 매우 뜨거웠다. 나도 공수처가 권력의 시녀인 검찰의 기능을 적절히 견제해주길 기대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대법원과 1988년 신설된 헌법재판소 간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잘 작동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잘 보장되는 것처럼 검찰과 공수처 역시 향후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결국 견제와 균형의 상생 관계가 되리라고 생각했고, ……”(11쪽, 머리말)

 

저자는 ‘공수처와 검찰’의 관계를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관계로 비유했다. 헌법재판소가 1988년에 등장했으니 그 관계가 제대로 자리를 잡는 데 거의 30여 년이 걸린 것이다. 당연히 3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수처가 어떤 역할을 한다거나 검찰과의 관계를 확립하는 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첫 시작이니까. 그래서 나는 ‘초대’ 공수처장이 쓴 이 책에 관심이 갔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걸은 사람이니까.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궁금했다. 앞으로 이어질 공수처의 행보가 그의 머릿 속에서 시작된 것일테니까.

 

-법조인의 생각-

 

이 책은 저자가 판사, 변호사, 헌법재판소 연구관, 초대 공수처장으로 일하면서 공부한, 고민한 결과물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법이란 무엇인가.’, ‘정의와 공정이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법의 지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저자의 생각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추천사에 보면 법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법에 대해, 정의와 공정에 대해, 그리고 우리나라의 사법 체계의 현실에 대해 가진 생각과 그 근거를 알 수 있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은 법과 정의, 공정, 대한민국 사법 체계 그 자체를 논하려는 것보다 ‘초대 공수처장’의 활동과 목표를 설명하기 위한 기본 바탕으로 제시하다 보니 내용이 중복되거나 흐름이 어색해지는 예도 있었다.

저자가 법조인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공부하고 고민한 내용을 따라가다 보니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법이 논쟁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법대에 진학한 친구가 두꺼운 법전을 들고다니며 암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법이 절대적 기준이고, 법조인은 그것을 단순히 적용해 판결을 내리는데만 관심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자는 법이 절대적 규칙이 아니라 “가상의 실제”(81쪽)라고 설명한다. ‘정의’, ‘공정’이라는 개념도 시대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대한민국의 법과 공수처-

 

저자는 제6장에서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 체계가 구성되는 역사를 살핀다. 나는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근대 이후 서양의 사법체계와 우리의 전통적 법 체계가 어떻게 다르고,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을 구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정리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기반이 (헌)법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동안 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거나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내가 이런 부분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저자의 설명을 모두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논쟁과 앞으로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본적 지식을 익혀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정치적 갈등과 이해득실의 문제만으로 공수처의 활동과 의미를 판단한 것은 매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매우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뭔가 어려운 결론에 도달한 것 같은 기분이다. 나와 먼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었던 저자 덕분에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 약간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다. 부드러운 모피 가죽처럼 짙은 갈색으로 된 앞표지에서 느꼈던 감정이, 책을 덮을 때 나오는 푸른 뒤표지에서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짙은 갈색에서는 법에 대한, 공수처에 대한 막연한 불만과 거부감이 있었다면, 푸른색에서는 부드러운 감촉처럼 법과 공수처가 우리의 일상을 감싸는 친숙함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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