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하는 삶 - 무위에 대하여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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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 관조하는 삶 (한병철, 김영사, 2024, 1판 1쇄)


원제 “contemplativa(바라보다, 숙고하다)”를 “관조(觀照-조용한 마음으로 대상의 본질을 바라봄)”로 옮겼다. 나는 라틴어 기본 지식이 없어서 불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관조’의 이미지로 이 책을 처음 받아들였다. 내가 가끔 경험했던 불교에서는 관조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했다. 모든 대상은 나의 마음이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에 그 대상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나의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실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내 마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대상의 본질을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뿌연 안개 같은 느낌만 남았다.

저자는 짤막한 문장을 거침없이 내던진다.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이 내게 강한 상처를 남긴다. 마치 융단 폭격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 몸을 비롯해 주변은 모두 초토화되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참 신기하다. 폐허로 변해버린 공간에서 작은 싹이 자란다. 저자가 던진 생각들이 텅 비어버린 내 머릿속에서 새로운 기반으로 자라난다. 그동안 익숙해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것들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지나쳤던 것들에 시선을 두게 된다. 둔기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후 뇌세포들이 모두 새롭게 자리 잡는 느낌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무위다.”(13쪽)

“목적과 효용으로부터의 자유는 무위의 핵심 본질이다. 이것은 행복의 기본 공식이다.”(16~17쪽)

“안식일의 쉼은 단순히 창조 노동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쉼이 비로소 창조를 종결한다.”(102쪽)

 

언뜻 보기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계속해서 달려든다. 그런데 그 의미를 결국엔 어렴풋이 이해한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까지 필연적으로 헤맬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동서양의 인물과 그들의 사상 속을 유유히 휘젓고 돌아다닌다. 문장과 문장 사이는 매끄럽게 연결되고,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어느 순간 나는 저자의 논의로부터 저만치 멀리 뒤떨어져 버린다. 역시나 철학하기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무위의 윤리, 장자와 하이데거-

 

무위자연(無爲自然)은 노장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위가 동서양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하이데거의 무위 윤리의 핵심은 불가능한 것을 강제하지 않으면서 가능성을 활용하는 것이다.”(52쪽)

 

서양 철학에서도 분명히 무위의 개념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이 동양의 노자나 장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필요 없는 지점이었다. 지금껏 동서양의 철학이 서로 다른 부분에만 주목해왔던 것과 다른 매우 혁신적인 구성이었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던 점 하나.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아도(무위) 그 본질의 가능성이 발현되도록(자연) 유도하는 것이 가능한가이다. 내가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교육은 아무리 좋게 포장하고 조직해보아도 ‘무위’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가능성은 학생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럼 교사는 불필요한 강제를 하는 사람이 되거나, 학생의 가능성이 발현되도록 유도하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존재는 아니다. 그럼 학생은 교사 없이 가능성을 발현시킬 수 있는가. 학생이 인위적 도움 없이 스스로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까. 만약 그 가능성을 발현하지 못한 학생이 있다면, 그 책임은 그 학생 스스로 져야 하는가. 자연스럽게 발현되지 않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게 옳은가. 내가 무위에 대해 온전히 이해했다면 이런 의문들에 답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사실 하나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근대정신, 새로움은 파괴적이다.-

 

저자의 주장은 매우 과격하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과격함이다. 자본주의에서 강조하는 효율적 삶은 관조적 삶을 비하하고 파괴한다고 한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노동은 효율적이고 신성하지만, 여가와 쉼은 불필요한 것이다. 더 많은 능력을 보유하고, 더 많은 생산을 해야 한다고 믿는 자본주의적 신념은 인간을 도구화하고 착취한다. 매우 혁명적인 주장이다. 그런데 그 덕에 기존 질서가 가진 한계를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는 논쟁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둘 다 모두 인간의 관조적 삶을 파괴하는 근대의 새로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지 자세히 묘사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그 믿음이 우리를 얼마나 파괴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제 성과 사회 안에서 우리는 성과를 향상하기 위해 경쟁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억압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배는 더 스마트한 형태를 띠고, 더 많은 성과를 내라는 끊임없는 다그침으로 표출된다. 성과를 향한 이 같은 미묘한 강제는 치명적이게도 자유의 증대로 해석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한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고 믿는다.”(124~125쪽)

 

‘워라밸’이 한창 유행한 적이 있었다. 성과를 내기 위해 일하는 자는 행복할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행위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은 오히려 우리를 착취한다. 자유를 얻기 위한 여정은 결국 우리를 생존 경쟁으로 내모는 안타까운 현실로 이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디지털 시대의 지옥-

 

“우리는 어마어마한 데이터와 정보를 저장하지만, 기억을 되짚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영원히”에 등을 돌린다.”(84쪽)

 

디지털 기술로 인해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정보를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디지털화가 오히려 인간 존재를 소멸시킨다고 주장한다. 디지털은 셀 수 있는 대상이지만, 인간 존재는 그렇지 않다. 디지털은 정보와 자본의 빠른 이동을 촉진하지만, 인간 존재는 농축된 시간과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다. 디지털화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는 것은 특히나 “함께-존재”(88쪽)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인간 존재는 ‘상징(symbol)’을 공유하는 ‘우리’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과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고립시킨다. 원초적 외로움 속으로 인간 존재를 밀어내버린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타자화하여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개인화된 인간은 무한 경쟁 속에서 생존을 목표로 살아가는 짐승이 된다. 나는 이런 모습을 최근 드라마 지옥 2(2024)에서 보았다.

 

지옥이 만연한 세상에 세 가지 종교 세력이 있다. 새진리회, 소도, 화살촉. 그런데 새진리회와 소도는 이기적인 인간에 의해 신념과 목표를 잃고 세상과 타협하는 단체로 전락한다. 정부는 이 빈틈을 노려 종교적 열광으로 가득 찬 화살촉을 없애려는 계략을 짠다. 정무수석 이수경은 시즌 1에서 ‘죄인’으로 지목된 박정자를 이용한다. 시즌 2에서 그녀는 ‘부활자’로 명명된다. 정부는 박정자를 이용해 새진리회와 소도를 경쟁시키고, 화살촉은 소멸시키려 한다. 나는 박정자를 죄인으로 명명한 새진리회, 그녀를 부활자로 명명한 정부 모두 지옥을 만든 존재라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처럼 박정자라는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해 타자화하고, 그녀를 이용해 사람들을 생존 경쟁에 매몰되도록 하여 그들을 통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 세상이 끝나는 순간. 정무수석 이수경은 죽음을 고지받는다. 새진리회 김정칠 회장은 몰매를 맞아 죽는다. 하지만 소도의 민혜진과 박정자는 다르다.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인간성 회복뿐이었다. 죄인, 부활자로 타자화되었던 박정자는 다시 두 아이의 엄마로 돌아온다.

 

“관조하는 삶이 비로소 신적인 자족을, 완전한 행복을 약속한다.”(98쪽)

 

신적인 자족은 어떤 느낌일까. 완전한 행복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저자의 주장대로 관조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내게 가능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그 상태를 경험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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