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탄생 - 우리가 찍은 낙인의 역사
수레카 데이비스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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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괴물의탄생 #수레카_데이비스 #현암사

괴물의 탄생_우리가 찍은 낙인의 역사(수레카 데이비스, 현암사, 2026, 초판1쇄, 383쪽)

괴물의 탄생


추천대상: 현대 사회의 문제를 인문학적으로 사유하고 싶은 사람. 분류하기, 낙인찍기가 우리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궁금한 사람.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현대 세계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


#괴물 #인간 #분류 #낙인


괴물이란 무엇인가. 괴상하게 생긴 생명체?, 인간다운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존재?.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렇다면 위 그림 속 인물은 인간인가 괴물인가. 분명 인간의 모습을 하고 문명의 옷을 입고 있지만, 얼굴이 털에 덮여 있는 모습은 매우 낯설다.


"사람들은 '인간'의 영역이 끝나는 지점을 괴물의 영역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을 정의한다."(16쪽, 1장 괴물의 생태학)


저자는 괴물이 인간의 영역이 끝나는 경계에서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매우 분명한 경계가 있고, 인간과 괴물의 범주를 정확히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인간과 괴물은 위 그림에서처럼 쉽게 나눌 수 없다. 인간인듯 보이지만 낯선 위 그림 속의 존재는 인간과 괴물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즉, 괴물은 인간의 경계가 변화함에 따라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는 존재다. 명확히 정해진 범주따위는 없다.


그래서 저자는 괴물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영역이 끝나고, 괴물의 범주가 시작되는 경계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움직였다.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따라 괴물이 만들어졌고, 이 '괴물 만들기'의 결과에 따라 사람들이 주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 결정되었다. 그리스 인들이 그들을 둘러싼 문명을 '야만(바르바로이)'으로 규정하면서 괴물을 만들어냈고, 기독교가 여타 종교인들을 '비기독교인'으로 규정하면서 괴물을 만들어냈다. 유럽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문명과 조우하였을 때에도 그들은 '인디언'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괴물은 인간이 아닌 존재가 아니다. 그 괴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의해 '비인간화'된 모든 존재다.



#동물 #인종 #민족 #젠더 #섹스 #전시 #박람회 #종교 #우주론 #기계 #AI #외계인

인간의 경계와 범주는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그 경계를 인식하는 방식도 문명마다 제각각이었다. 멕시카 인들에게 인간과 나머지 모든 존재의 경계는 매우 느슨했다. 그들은 '변신'의 개념을 인정했다. 인간이 돌맹이가 될 수도 있고, 동물로 변신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톨릭(기독교)은 자신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계속해왔다. 자신들로부터 먼 공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명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다른'을 '비정상적'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자신과 타인을 분류하고, 그들을 비정상으로 낙인 찍었다. 그런 기독교적 문명관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가 어떻게 괴물을 낳았는지 매우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제시한다.


2장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보여준다. 기독교적 영혼관은 인간만이 유일한 영혼을 가진 존재로 생각하고,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과 구분하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자면 칼 폰 린네의 종 분류법을 들 수 있다. 이 분류법은 인간을 최상위 지위에 올려두고, 나머지 생명을 식별 가능한 특성을 사용해 분류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자 유럽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인간은 우리를 둘러싼 주변 생명체와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예전에 읽었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떠올랐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인간이 인위적으로 범주화하는 것은 크나큰 오류라는 것을 밝힌 매우 훌륭한 책이다. 과학적 소재를 바탕으로 인문학적 성찰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책과 유사한 책이다. )


3장과 4장에서는 인종과 민족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비인간화하고, 그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정당화했는지 살핀다. 레콩퀴스타와 스페인의 종교재판처럼 평범한 인간을 괴물(마녀)로 낙인찍고 그들에게 끔찍한 고문과 폭력을 행사하는 사례를 담았다. 놀라운 점은 소외되고 낙인찍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 약자들이라는 사실과 그들을 낙인찍는 사람은 백인, 유럽인, 남성, 귀족과 권력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매우 유사하지 않은가!


5장에서는 젠더, 섹스, 괴물 아기(출산)에서 괴물 만들기를 살핀다. 지금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개념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가 어떻게 소수의 사람을 괴물로 낙인찍을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인간을 '남성'과 '여성'의 범주로만 분류한다면, 자신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괴물이 되고 만다."(180쪽, 5장 젠더, 섹스, 괴물아기)


교회와 성경의 영향력은 특히 아담과 이브라는 두 성의 정체성을 전파하고, 이를 규범화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 내용은 예전에 제래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책을 통해 접한 바 있다. 혼인 풍습에서 일부다처제가 원래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일부일처제는 기독교에 의해 강요된 질서라는 내용이었다.

특히 이런 젠더(사회적 성), 섹스(생물학적 성)에 관한 우리의 편견이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리고 그 편견이 만들어내는 괴물들(소수자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배척되고, 당연시되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도 그 폭력에 가담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6장에서는 프릭 쇼(괴물 쇼)와 박람회가 어떻게 사람을 전시하고 공연하는 폭력을 저질렀는지 보여준다. 나는 이 부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을 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생각없이 타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인이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는 것은 결국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 부분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반성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내가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며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사람들은 박람회나 쇼에 몰려가 인간과 동물이 겹치는 것처럼 보이는 신비로운 사례들에 경탄했다."(191쪽, 6장 괴물들의 공연과 전시)

"일부 사람들의 인간성과 개성을 지우고 그들을 비정상인 혹은 병자로 규정해 '기형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197쪽, 6장 괴물들의 공연과 전시)


7장에서는 종교와 우주론이, 8장에서는 기계와 인공지능(AI)가 어떻게 괴물을 만들어내는지 살핀다. 나는 이 부분이 우리의 현재 문명을 살피는데 가장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대다수 전쟁과 갈등은 종교와 문화적 차이에서 출발하며, 자본주의 기업과 인공지능 거대 기업이 인간을 노동력으로만 바라보고 그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괴물화'가 '비인간화'라는 모습으로 현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생생한 사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 9장에서는 우주의 외계인에 대해 살핀다.



#괴물미래주의 #해결책 #SF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괴물화(비인간화)'를 멈출 것인가?" 저자는 제10장 괴물 미래주의에서 두 가지 방법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하나, 낯선 대상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회피(배척)하지 말고 환영해야 한다.

내게 낯선 대상은 항상 불안과 두려움을 야기한다. 그리고 그 감정이 상대를 분류하고 낙인찍는 '괴물 만들기'로 이어진다. 우리는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내 불편한 감정을 직면하고 그 감정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그 불편한 감정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저자가 예를 들어 설명한 영화 <머펫쇼>에서는 모두가 괴물이다. 나도 상대방에게 괴물(낯선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내가 다른 사람을 배척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행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배척보다는 관용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괴물이라면, 더 이상 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339쪽, 10장 괴물 미래주의)

둘, SF 소설, 영화 등 허구적 세계에서 대안을 찾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특히 소설과 영화를 많이 소개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꼭 읽어보고 싶은 작가는 '어설러 K. 르 귄'이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외계 문명이나 판타지 세계만을 가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여 이를 인류학적으로 탐구하는 시선을 담고 있다. 페미니즘과 젠더, 유토피아와 아나키즘 등 현실에서는 쉽게 상상해볼 수 없는 일들을 허구라는 대안적 세계에서 마음껏 펼쳐보이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작가의 작품을 다음으로 읽어보고 싶어졌다. 또한, 저자가 제시하는 영화는 스타트렉 시리즈다. 물론 나는 이런 우주 시리즈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상상이 가능하다는 것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다양한 행성 출신, 다양한 인종과 생명종이 어우러져 하나의 공통된 우주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모습이다. 생소하고 낯설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과학과 철학, 역사와 인문학을 넘나드는 이런 책을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다. '괴물'이라는 아주 익숙한 소재를 활용하여 깊이 있는 인문학적 통찰이 가능한 '사유의 틈'을 만들어내는 저자의 역량에 깊이 감사한다. 엄청난 양의 사례와 학술적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문체로 되어 있기에 쉽고도 재미있게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다음에 읽고 싶은 책까지 만들었으니, 이 책은 최근에 접한 것들 중에 단연코 최고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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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지부가 처음이신가요? - 실수 줄이는 실전 생활지도부 업무 매뉴얼
공승규 지음 / (주)학교도서관저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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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생지부가 처음이신가요?


#생지부가처음이신가요? #공승규 #학교도서관저널 #실전업무매뉴얼

#생활지도부 #학교폭력 #학부모 #생활교육 #교사돌봄 #생활지도


"네, 처음입니다."


교직생활이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생활지도부만큼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내가 의도적으로 피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나는 담임 업무와 다른 신설 부서의 행정적 업무만을 주로 담당해 왔다. 10년을 넘게 담임을 했으니 최소 300명 이상을 담임교사라는 이름으로 만났고, 교과교사로는 그보다 몇 배 더 많은 학생을 만났다. 또한, 그 학생들 중 일부 학부모님과 만나 소통하고 상담한 것까지 하면 그래도 100여명 정도 될 것이다. 행정업무 담당일 때는 나도 하루 2~3건 정도 공문을 접수하고 기안했다. 올해는 행정업무 담당교사로, 지금까지 기안한 문서는 100여 건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생지부가 처음인 교사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경험조차 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 끌렸다. "실수 줄이는 실전 생활지도부 업무 매뉴얼". 내가 만약 생활지도부 업무를 배정받는다면, 나는 이 실전 매뉴얼이 간절히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읽어보고 싶었다. 내 미지의 영역, 학교에서 많은 교사가 두려움을 느끼고 피하고 싶어 하는 영역인 생활지도부를 말이다.



저자는 '아이들의 생활지도가 재미있고, 학부모와 소통하는 것이 즐거운 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같은 교사지만, 나와는 정반대에 서 있는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교사로 살고 있지만, 학생 생활지도와 학부모 소통이 가장 어렵다. 교사에게는 수많은 전문성이 요구된다. 그 중에서 나는 수업과 평가, 기록이 우선인 교사다. 체계적인 수업 자료를 준비해 성공적인 수업을 이끄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다. 그래서 학생과 소통 쪽에는 아직까지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솔직히 여고에 근무하는 젊은 남교사였다보니 학생과의 소통이 그다지 어렵거나 노력해야할 사안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던 부분도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자 달라졌다. 우선 아이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졌다. 수업만 체계적으로 준비하면 자연스레 소통이 이루어지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학생과 소통이 어려워지면서 수업도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학생과 소통이 어려워지면서 신뢰 관계를 만들기도 어려워졌고, 학생 생활지도와 학부모 소통은 더욱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수업과 평가, 기록만으로는 교사 전문성을 내세우기 어려운 순간이 온 것이다. 이제 나에게도 생활지도와 학부모 소통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기가 찾아온 셈이다.



#교육자 #진심 #민원 #절차


"진심을 다해도 민원이 올라옵니다."(6쪽, 추천의 말)


교사로 살면서 항상 '진심'으로 학생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그 진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진심으로 상대를 대해야 신뢰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진심이 결국 학생과 교사, 학부모와 학교를 모두 망칠 수 있는 일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물론 '진심'을 배제하고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최소한의 그 진심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교사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어야 진심을 다해 학생을 지도할 수 있고, 학부모와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질문들과 답변들을 모은 것입니다."(9쪽, 시작하면서)


2천 여 명의 교사가 2만 2천 여 건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만큼 그들은 누군가에게 간절히 물어야할만큼 절박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이 아는 사실을 기꺼이 다른 교사와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수많은 교사가 서로 같은 주제와 상황으로 고민하고 질문하고 답변하는 과정을 정리한 것만으로도 이 책은 '실전 업무 매뉴얼'이라는 제목을 달 자격이 충분하다.




#학교폭력 #현실적접근 #절차

생활지도부의 업무 대부분은 결국 '학교폭력' 사안으로 귀결되는 듯 하다. 제2장부터 4장까지 이 책의 절반이 결국 학교폭력과 관련이 있다. 학폭은 학교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안이 되어버렸지만, 학교에서는 이 사안을 처리하는 것이 아직도 버거울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교직관과 현실적인 규정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간극을 메울 수 있는 적절한 기준과 선을 만들어 제시하고 있다.


"핵심만 말하자면 규정은 무기입니다."(24쪽)


가장 중요한 것은 규정이다. 학교와 교사는 공정한 업무 담당자가 되어야만 한다. 옛날처럼 스승이 되어 학생을 바람직한 인간으로 길러내는 존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교직 경력과 전통적인 교사관은 오히려 학폭 사안에서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규정에 관심을 기울여 현실화할 것을 조언한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봤을 때 (규정의) 제개정 준비는 학기말에 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입니다."(26쪽)


교사의 진심을 담아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결국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절차를 지켜야 나를 지킬 수 있습니다."(43쪽)


현실적인 인식 다음은 '절차'다. 모든 사안은 절차로 시작해 절차로 끝나야 한다.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행정업무를 담당해 오면서 가장 많이 달라진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원칙만 있었지 세세한 절차나 규정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업무 처리에 유연성이 중요했고, 주먹구구식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점점 절차가 중요해진다는 것을 다른 부서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른바 '교사의 행정직원화'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특정 업무를 담당하는 교사에게 수업 시수를 줄여주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위 학폭 사안을 담당하는 교사는 다른 교사들에 비해 더 많은 시수를 줄여주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애매하면 접수하세요."(51쪽)


자의적인 판단을 막고 절차 안에서 판단을 받게 하는 것. 좋게 말하면 규정과 절차를 준수하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교사의 자율성과 판단 능력을 믿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을 지킨다는 말은 교사가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법과 규정에 의해 보호받아야할 만큼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기도 하다. 물론 학생과 학부모의 입장에서 보자면, 교사가 공정하고 정확한 전문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황이기도 하다.



#학부모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학부모와 소통. 사범대를 졸업했지만, 그 누구도 학부모와 소통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다. 교사로 20년을 살아오면서,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학생만큼이나 학부모의 변화를 절감한다. 그렇지만 역시, 달라진 학부모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교사는 그때그때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학부모를 상대해야 하고, 문제가 발생할 시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다. 나는 소통의 기본은 '신뢰'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학생을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성인으로 인정하고 대우해왔다. 그래야 학생과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학부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학부모에게 학생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성인이 아니라 자식인 것이다. 나는 그 간극을 고려하지 못했다가 큰 낭패를 겪은 경험이 최근에 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감정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입니다."(85쪽)


이제 학부모와 소통할 때 교사는 감정 수용가가 되어야 한다. 예전에는 어린 학생이 자신의 감정을 추스릴 수 없을 때 그것을 기다려주고 이해해주는 교사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바뀐 것 같다. 학생은 스스로를 어른으로 인정하고 대우해주길 바라고, 학부모는 자신의 감정을 수용받길 원하는 것이다. 뭔가 변화한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어린 학생이 교사를 따르고 그들을 보듬어주는 것은 이제껏 익숙하게 해 왔던 일이지만, 학부모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현실이 조금은 버겁기 때문일 것이다.



#교권보호


"교권 보호를 위해 주변에서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결국 모든 과정은 스스로 준비하고 대응해야 합니다."(107쪽)


이 책이 선생님들께 위안을 주기보다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교사는 결국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수업 전문가로서 학생을 가르치고 평가하며 학교생활기록부를 정확히 기재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서, 모범적인 학생 지도를 해야 하고, 민원이 발생했을 때 공정하고 정확하게 업무를 수행해내야 한다. 그렇지만 결국은 혼자다.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연습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는 당연히 없다. 너무도 냉혹한 것은 아닐까.



이 생지부 실전 업무 매뉴얼을 읽으며 업무를 파악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서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전임자의 방법'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은 교직 사회의 기본 중에 기본이기 때문에 너무도 중요한 조언이라 생각한다. 신규 선생님들께는 이런 조언이 정말 중요한 지침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런 발칙한(?) 생각도 조금 해 보았다. 모든 교사가 모든 업무에서 완벽한 전문가가 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걸 교사 개인에게 모두 책임지도록 할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학폭 담당자는 최소한 5년 정도 업무를 꾸준히 할 수 있도록 지위를 보장해주고, 정, 부 담당자를 지정해 2인 이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청에서 지원해주는 것이다. 실수를 줄이는 것 뿐만 아니라 업무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고, 2인 이상의 협업으로 인해 어려움은 더욱 줄어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 어렵다면, 아예 학폭 전담관을 학교마다 1명씩 배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서 될 일은 아닙니다. 나중에 번아웃도 오지만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스트레스로 집에서 아이한테 화내기도 하고요."(142쪽)


교직에 있는 사람들 중 다수는 아이들이 좋아서 교사가 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게 만드는 이런 상황은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교사가 마음껏 아이들을 좋아하고, 아이들과 함께하며, 즐겁게 수업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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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의 언어 - 소리, 몸짓, 냄새로 소통하며 진화해 온 생물들
롭 던 지음, 송근아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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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공생의 언어_ The Call of the Honeyguide_소리, 몸짓, 냄새로 소통하며 진화해온 생물들

(롭 던, 흐름출판, 2026, 초판 1쇄, 468쪽)

공생의 언어

#공생의언어 #롭_던 #흐름출판

#진화생태학 #진화생태학자 #홀로바이온트 #Holobiont #홀로게놈 #Hologenome #상리공생 #단절 #균열


추천대상: 인류 문명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 생물학과 생태학의 최신 연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 인문, 자연, 예술, 음식, 건축, 문화 등 융복합적 주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 다양한 미래를 상상해보고 싶은 사람.



#기발 #창의 #융복합

매우 기발하고 창의적인 책이다. 좁은 우물에 갇혀 있던 개구리(인간)를 드넓은 우주로 꺼내줄 책이다. 진화생태학자인 저자는 우리 주변의 생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다. 그의 관심은 진화생태학이라는 좁은 분과 학문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의 관심은 문학, 예술, 심리, 생태, 음식, 건축 등 많은 분야를 뛰어넘는다. 이 책은 고대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의 서사시부터 시작하여 후기 인상파의 점묘화를 거쳐 흰개미의 생체 모방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을 쭉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우리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 저자는 풍부한 사례와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배려한다.



#홀로바이온트 #홀로게놈 #당신의배꼽에정글이있다 #연결


시작부터 제목이 도발적이다. 배꼽 속에 정글이 있다니! 아마 누구나 배꼽의 때를 빼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냄새를 맡은 경험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나만 그런 건 아닐거야!!) 배꼽의 냄새가 매우 지독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그 냄새는 배꼽 속에 사는 수많은 세균과 미생물의 분비물(배설물)이다. 이렇듯 우리 몸 속에는 우리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생명이 함께 하고 있다. 단순히 피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 속에도, 심지어 세포 속에도 우리 유전자와는 다른 생명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단절된 독자적인 생명체라고 생각하는가. 저자는 다양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도시에 살고 있어서다. 그건 우리집 아이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는 시골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벌써 20년 넘게 도시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래서 우리 막내를 보면, 지렁이를 무서워한다. 흙을 가지고 놀아본 경험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모래 놀이터에서가 전부인 아이들은 건강한 땅 속에서 지렁이와 곰벌레, 달팽이 등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경험하지 못한 것에 두려움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는 각각의 종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생물 종들뿐 아니라 그 종들 사이의 연결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연결은 경계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너무도 밀접하다."(42~43쪽, 1장 다섯 개가 넘는 유전체를 지닌 괴물)


저자는 다양한 사례와 풍부한 이야기들을 동원하여 우리 삶의 '밀접한 연결'을 보여주고자 애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살펴보고, 현재의 위기를 분석하여,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만든다. 저자는 단순히 연구 결과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와 비유(알레고리)'를 적극 활용하여 우리를 흥미로운 이야기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래서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동안 관심이 없어서 전혀 들여다보지 않았던 내 배꼽을 살펴보기도 하고, 고양이와 강아지의 표정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 인간이 주인공이 아닌 역사를 상상해볼 수 있다. 과연 상상이나 해 보았는가. 과일 나무가 인간을 길들이고, 효모가 실컷 즐기고 남긴 배설물을 인간이 먹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상리공생 #자연에답이있다


최초의 영장류는 나무 위에서 살았다. 그들은 나무의 열매에 의존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와 상리공생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최초 영장류의 일부 후손들은 점점 더 과일에 의존하게 되었다. 동시에 나무들도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과일을 먹는 영장류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으니, 이는 상호 이익과 의존의 관계였다."(47쪽, 2장 정원에서)


이런 상리공생의 관계는 인간의 선택에 의해 다양하게 발전했고, 지금 인간은 수많은 생물 종과 이런 상리공생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인류는 이런 상리공생의 관계로부터 단절되면 생존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상리공생에 대해 잘 알고, 이를 개선해 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저자가 연구를 통해 알아낸 상리공생은 다음과 같은 경향을 갖는다고 한다.


[상리공생의 경향 다섯 가지]

하나, 상리공생은 지역적이다.

둘, 상리공생 관계에 있는 종은 서로를 찾아내고 선택하는 방법을 갖고 있다.(소리, 냄새 등)

셋, 각 동반자는 상대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지 측정하는 능력이 있다.

넷,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동반자와 관계를 끝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제재와 처벌)

다섯, 상리공생은 영원하지 않고 변화할 수 있다. (관계가 끊어지거나 변형되어 기생 관계가 되기도 한다.)


저자는 위 상리공생의 경향을 바탕으로 현재 기후 위기의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탄소배출권'을 분석한다. 탄소배출권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어떤 점 때문에 기후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한계가 있는지 설명한다. 즉, 저자는 자연에서 답을 찾는다. 우리 인간이 기술과 자본을 바탕으로 자연으로부터 단절되려고 하는 지금, 저자는 자연의 방법을 모방해야만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리공생 #공생의언어 #다윈적응도 #순환경제


진화생태학자는 인류 문명의 위기(기후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할까. 저자가 자연에서 찾은 답은 '순환경제'다. 인간이 자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저자가 찾은 답은 명확하고 쉽게 실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어려움이 있는 것일까.


인간은 오래 전부터 비인간 종의 언어를 해독하여 그들과 소통하려 노력했다. 물론 그 소통 노력이 지금은 다수가 단절된 상황이다. 꿀잡이새와 함께 벌집을 찾아내는 일, 범고래와 함께 다른 고래를 사냥하는 일 등, 인간과 비인간 종의 소통을 통한 상리공생 관계가 다수 발견되었다. 다시 이 관계를 되살리자는 것이다. 언젠가 연구를 통해 다양한 비인간 종의 언어를 해독하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무작정 상리공생의 이익을 누리는 것이 가능해질 것인가. 저자는 소통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경고한다. 상리공생 관계의 잔혹함 때문이다.


"상리공생은 흔히 피와 발톱 자국으로 얼룩진 잔혹한 관계이기도 하다."(134쪽, 6장 야생으로부터의 초대)


상리공생은 기존에 인간이 할 수 없었던 대단한 성공을 가져다줄 수 있다. 다만 그 성공은 주변의 다른 종에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따는 것이다. 꿀잡이새의 언어를 완전히 해독하여 벌집을 모두 찾아낼 수 있게 된다면, 결국 꿀벌은 멸종할 것이다. 범고래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여 그들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면 사냥은 더욱 쉬워질 것이고, 고래의 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다. 공생의 언어를 이해하더라도 결국은 우리가 선택해야 하고, 바람직한 상리공생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도시 문명을 버리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재야생화'는 어떤가. 과연 이것은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과연 아이를 정글에 그대로 풀어둘 수 있을까. 원래부터 정글에 살던 부족이 아니라면 말이다.


또한, 상리공생은 동반자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관계이다. 그렇다면 그 이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지금까지 진화생태학에서는 '다윈 적응도'를 기준으로만 상리공생을 판단했다. 즉, 공생을 통해 개체의 생산이 늘어나는 점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소, 돼지, 닭은 인간과 상리공생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많은 개체를 생산해낸 닭은 진화적 관점에서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과연 작은 닭장 속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삶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행복을 공유한다는 관점에서 상리공생을 바라볼 때 한 가지 까다로운 점은 행복이라는 특성이 정의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194쪽, 8장 황금 세포)


인간에게 먹히도록 진화한 과일은 과연 무엇이 행복일까. 닭장 밖으로 나가면 살아남을 수 없는 닭은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밖으로 나갔던 암탉은 행복해지긴 했지만). 이에 대한 생각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런 다른 생각들을 모두 허용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례를 제시한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하고 흥미로운 토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도 독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주는 이런 서술 방식은 참 매력적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자의 주장대로 자연의 순환 경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지구는 거대하지만 결국 유한한 우주선이나 다름 없어서다. 다만 그렇게 되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 것인지 지역별로, 문화별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육식이 기후 위기의 원인이기에 단순히 가축을 줄이고 육식을 줄이는 것만이 해법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린란드에서는 오히려 채식을 하는게 더 많은 자원을 소모한다. 자체적으로 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순록을 먹는 것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지역에 적합한 육식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폐기물 #자연분해

폐기물이 자연분해되어 그 자원이 다시 생명 활동의 원료가 되어야 한다는 개념은 식물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합리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약간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얼마 전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 17>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 감상문은 적지 않았다. 조만간 써야지 하면서 미룬 것이 벌써 1년이다.)

미키 17


출처: https://news.tf.co.kr/read/entertain/2149081.htm

이 영화에서는 미키라는 인물이 '익스펜더블'로 우주선에 지원하여 활동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그려낸다. 위험한 작전이나 실험에 미키는 도구처럼 사용되고, 그의 사체는 용광로 속으로 던져져 다음 번 미키로 '재활용'된다. 밀폐된 우주선 안에서 미키는 자원적 측면에서 완벽하게 순환한다. 인간으로 생산활동에 참여하다 죽음을 맞이한 후 폐기물이 되어 완전히 분해되고, 다시 인간으로 생산된다. 내가 이 영화 속 모습을 떠올린 이유는 저자가 제시했던 사례 중에 충격적인 사실이 있어서다.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영국 경제가 호황을 맞으면서, 어떤 형태로든 비료에 대한 수요가 커졌다. 전쟁의 희생자들이 땅에서 파내어지고, 갈려서 영국으로 실려가 농장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쓰이기 시작했다. 수백만 구의 인간 뼈와 수천 마리의 말 사체가 비료로 재활용된 것이다."(277~278쪽, 12장 과거가 남긴 배설물)


인간의 사체를 이런 식으로 폐기물로 여기고, 자연분해하여 순환해야 한다는 주장은 뭔가 꺼림직하다. 내가 아마도 인간이라서, 장례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 사체를 배설물로, 폐기물로 여겨야 한다는 점도 쉽지 않은 생각이다. 미키 17처럼 밀폐된 우주선 속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일까. 지구라는 커다란 우주선에 사는 인간으로서, 앞으로는 이런 생각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이 지구 생물량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재로선 이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다만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새로쓰는 #문명사 #동아시아사 #문화적공생진화

"수리 생태학자 피터 터친은 ... 말과 공생 관계를 맺었을 때, 그 관계가 대규모 전쟁과 전쟁을 통한 사회의 지리적 확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고 가정했다. ... 유라시아에서 말은 초원 민족이 훨씬 더 넓은 지역을 오가며 연결망을 유지할 수 있게 했고, 그들이 곡물-효모 사회를 공격할 때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러한 군사적 이점은 다시 곡물-효모 사회가 초원 민족(말-인간)에 맞서 방어하기 위해 혁신적이고 더 복잡한 통치 체계를 발전시키게 했다."(240~241쪽, 10장 문화적 공생진화와 기후 변화)


저자에 따르면 공생진화는 단순히 유전적 진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진화를 동반한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를 '문화적 공생진화'라 표현한다. 상리공생 관계는 단순히 생존에 적합한 적응도만 향상 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문화적 변동을 촉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영향력이 큰 변화이기에 지금 기후 위기를 극복하는 해법으로 충분히 작용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문화적 공생진화가 기후 변화나 위기 순간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인간-곡물-효모 상리공생 관계(농업 사회)가 확산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역사 전공자라 그런지 이런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우리가 단순히 유물과 기록으로만 바라보던 선사 시대는 그저 깜깜한 무지의 세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진화생태학의 관점에서 그 시대를 들여다보니 이토록 흥미롭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이래서 빅히스토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제시되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기후 위기를 바라볼 때, 그 원인을 단순히 역사적으로 산업 혁명과 탄소 배출에서만 찾는다면 '탄소 배출권'이라는 단순한 해법이 제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시 지구에서 시아노박테리아가 일으켰던 최초의 기후 위기 사례를 알게 된다면, 전혀 다른 해법을 제시할 역량을 갖추게 될 것이다. 자연을 더욱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될 것이고, 과거 우리의 흔적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할 것이다. 또한, 생체모방을 위해 개미, 벌, 효모 등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확장도 경험할 수 있다. 이 책이 현대 문명의 위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넓으면서도 깊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덧, 아침 출근길에 숲 속을 지난다. 나무가 내뿜는 화학 신호(냄새)를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를 끌고 산책하는 사람과 마주칠 때 개가 짖는 소리와 분비샘에서 나오는 호르몬 냄새를 읽을 수 있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비록 아직은 그런 일들이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우리의 감각이 자연으로 더욱 확장되는 세계를 상상해본다. 이 책 덕분에 균류에게 말을 걸어 집의 모양을 바꾸고, 초록색 양 팔을 하늘을 향해 뻗어 점심 식사를 해결하는 모습도 얼마든지 가능한 세상이 곧 다가올 것만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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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왕 ㅣ 폭스코너 청소년소설 8
너새니얼 레소어 지음, 신선해 옮김 / 폭스코너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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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왕_King of nothing(너새니얼 레소어, 폭스코너, 2026, 1판1쇄, 334쪽)

#아무것도아닌왕 #너새니얼_레소어 #폭스코너 #청소년소설 #앤톤 #매튜 #로셸

아무것도 아닌 왕

#연극 #생생함 #리어왕


읽는 내내 연극을 보는 듯했다. 주인공 앤톤이 바로 눈앞의 무대에 서서 나를 향해 대사를 하고, 노래를 하며, 연기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래서일까, 앤톤의 삶을 따라 몰입하고 공감하며 함께 울고 웃으며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뻔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진심으로 앤톤의 미래를 응원하고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이 연극의 발단과 같은 시작 부분은 앤톤의 현재 상황과 인물 간 관계가 소개된다.

주인공 앤톤은 학교의 왕이다. 케힌데, 케일럽, 마커스는 그의 왕좌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무리의 일원이다.


"아무도 감히 우리에게 맞설 수 없는 이곳 복도가 내 왕국이다. 나는 이곳을 마음껏 어슬렁댄다. 내가 보이면 애들은 마치 물가의 초식동물처럼 뿔뿔이 도망친다. 내가 두렵지 않으면 어찌 날 존중하겠는가."(10쪽)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떠오른다. 나이가 든 리어왕은 자신의 왕국을 딸들에게 물려주면서 누가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지 시험한다. 딸들은 아첨을 떨며 아버지에게 절대적 충성을 맹세한다. 앤톤이 학교에서 아첨하는 무리들에 둘러싸인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앤톤은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관객들로부터 확인하고자 한다.


"대중이 구경거리를 원하고 난 기대를 저버리는 인간이 아니니까. 나의 충성스러운 관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고, 그들의 존중에 대한 보답으로 재미도 선사해줘야 한다."(14~15쪽)


하지만 리어왕은 딸의 진실한 사랑과 아첨을 구분하지 못한다. 앤톤이 딱 그런 상황이다. 앤톤은 케힌데를 보며 의리를 지키는 진정한 친구라고 오해한다. 매튜의 진정성은 물렁하다고 표현하고, 로셸의 진심어린 충고는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가로막는다.



#매튜 #숲속캠프 #성장

앤톤은 결국 사고를 치고, 엄마의 반강제적 제안에 의해 해피 캠퍼스에 참여하게 된다. 앤톤은 엄마의 벌칙(?)과 무리와의 관계 속에서 본격적으로 갈등 상황에 접어든다. 학교에서 어울리는 케힌데, 케일럽, 마커스 무리와는 전혀 다른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롭과 제스, 그리고 매튜다. 앤톤은 이들과 숲속 캠핑을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의 왕국과는 다른 낯선 공간과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난 늙은 사자처럼 외따로이 앉아 그 질척한 걸 입에 퍼 넣는다. 난 운동장이 익숙하다. 사람들이 날 존중하는 곳, 내가 나타나면 다들 얼른 비켜 가는 그런 곳 말이다. ... ... 하지만 여기서는 왠지 다들 날 피한다기보다 따돌리는 느낌이다. 날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것 같다. 기분 나쁘다."(106쪽)


낯선 공간에서 살아남으려면 인간은 적응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앤톤도 마찬가지. 케힌데 무리로부터 강제로 떨어지게 된 앤톤은 매튜에게 의존하는 법을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학교에서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학교에서는 왕이고, 매튜는 루저였지만, 이곳 숲속 캠핑장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앤톤은 매튜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물론 그 배움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말이다. 나는 매튜의 그 순수한 마음이야말로 앤톤을 달라지게 하는 가장 큰 강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앤톤은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던 매튜에 의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 성장한다.


"우리, 같이 공포를 극복해 보지 않을래?"(127쪽)


앤톤은 그런 매튜의 마음에 조금씩 동화한다. 스스로 케힌데보다도 매튜에게 끌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노력해야 할만큼 그에게 매력을 느낀다.



#어른 #성장

앤톤의 성장을 돕는 것은 친구 매튜뿐만이 아니다. 그는 해피 캠퍼스에 참여하며 다양한 어른들을 만난다. 앤톤의 성역할 편견을 바로잡는데 도움을 준 것은 성평등 전문가 조슈아 니코스다. 여태껏 학교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앤톤의 머릿 속을 가득 채웠던 것은 '남자다움'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으며, 편견이었다는 것을 조슈아를 통해 처음 깨닫게 된다. 그 덕분에 자신의 남자다움의 원천이라 생각했던 아빠를 만났을 때, 앤톤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또한, 그가 학교에서 케힌데 무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물리적으로 도움을 준 선생님들도 있었다. 벤저민 선생님은 앤톤이 곤란하지 않도록 자신이 욕을 먹어가면서 무리로부터 앤톤을 떨어져 앉도록 도움을 주었고, 월 교장 선생님은 방황하는 앤톤을 기다려주고 진로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진심으로 상담을 해준다.


무엇보다도 앤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와 할머니의 존재 덕분이다. 앤톤에게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준 할머니, 올바른 방향을 잡도록 적극적으로 가르쳐준 엄마. 그 둘의 존재가 있었기에 앤톤의 집안 분위기가 그토록 좋을 수 있었다. 매튜는 그런 분위기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걸 부러워한다. 나도 그런 애정이야말로 매우 든든한 바탕이라 믿는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니까.


"할머니는 참 잘 들어 준다. 내가 실컷 쏟아내게 두고, 다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가 답을 준다."(281쪽)


나도 이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내 아이들에게 묵묵히 기다려주는 존재가 되어주고 싶다.



#친구 #연인 #친해지는법 #드러내기 #우정 #사랑


처음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학교에서 청소년들이 어떻게 우정을 만들어가는지, 친해지는지를 알고 싶어서다. 특히 학교의 왕 앤톤과 루저인 매튜가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 그래서 나는 둘이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고, 그 과정을 주변 어른들이 어떻게 지원하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책을 손에 들었다.


다니엘 핑크, <후회의 재발견>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아주 흥미로운 점을 알게 되었는데, 자신의 내밀한 정보를 드러내면 상대는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감을 갖는다고 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전형적인 내향인은 없고,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할 수 없어 겁먹은 것이라고 한다. 딱 내가 그렇다. 전형적인 겁쟁이. 그래서 나는 매튜가 정말 용기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겁쟁이인지도 잘 모르는 앤톤을 위해 매튜는 자신을 드러낸다.


"아이, 말해줘. 누군지 말해 주면 나도 창피한 얘기 하나 들려줄게."(231쪽)


주변에 매튜처럼 솔직한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쉽게 속내를 털어내주는 친구가 있으면 나도 그 친구를 믿고 내 속내를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주변을 믿지 못하는, 오히려 경계만하는 나같은 사람은 관계에서도 잼병이며, 행복지수도 낮을 수밖에 없다. 학교의 왕 앤톤과 루저인 매튜는 '자기 드러내기'를 통해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 기반은 역시 매튜의 솔직함이라고 생각한다. 그 매력을 주변 친구들도 모두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우정을 느끼는 청소년은 앤톤처럼 이런 감정을 경험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최고조의 긴장과 흥분이다. 적어도 이거 하나만은 나랑 매튜가 똑같다."(253쪽)


물론 앤톤을 변화시킨 힘은 매튜의 솔직함만은 아니다. 매튜의 솔직함을 알아본 로셸이라는 여학생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앤톤이 로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당연한 설정. 중요한 것은 로셸이 매튜 다음으로 앤톤을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또래라는 점이다.


"변하길 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어. 참고로 말하자면, 난 네가 꽤 괜찮은 애라고 생각해."(272쪽)


내가 호감을 가진 여자애가 이렇게 말해준다면, 나는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ㅋㅋㅋ 물론 연애 감정만으로 앤톤의 변화를 이끌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군가 로셸처럼 나를 믿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친구가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비난하기보다 바로잡는 것을 지켜봐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이다.


진정한 친구는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사이다. 나도 죽기 전에 이런 배움을 주는 친구를 만나고 싶다. 아니, 내가 이런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용감해지는 법이랑 나 자신을 위해 맞서는 법, 좀 더 자신감 갖는 법까지 다 너한테 배웠는걸. ... ... 신기하다. 나도 그것들 다 이녀석한테 배웠는데."(324~325쪽)



#아무것도아닌왕 #폐허 #자기파괴

광기에서 벗어난 리어왕은 모든 것을 잃고 극심한 슬픔 속에서 죽는다. 하지만 앤톤은 폐허를 딛고 일어선다.


"난 어릿광대들에 둘러싸인 폭군으로 남느니 진짜 친구들을 곁에 둔 채 아무것도 아닌 왕이 되는 쪽을 택하겠다."(297쪽)


아픔을 딛고 성장하는 청소년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앤톤이 더 늦기 전에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그를 둘러싼 친구들은 이제 더 이상 아첨하는 어릿광대들이 아니다. 앤톤을 진정으로 걱정하고 좋아하는 친구들이다. 아버지로 인해 상처받고 힘들었던 앤톤은 이제 좋은 친구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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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으니, 말해야 해요 - 베트남전쟁 아카이브 시집
한베평화재단 엮음 / 사회평론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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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한국군 #파병 #학살 #과거사 #진실 #화해 #아카이브 #창화 #시집

 

살았으니 말해야 해요(송 데 케 라이)_베트남전쟁 아카이브 시집(한베평화재단, 사회평론, 2026, 초판 1쇄, 198쪽)

 

솔직히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웠다.

제주, 거창, 광주에서의 핏빛 역사는 그나마 죄책감이 덜했다. 나쁜 한국인 악당과 선량한 한국인 시민 사이의 대립 속에 나를 숨길 수 있어서다. 나는 그 시기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직접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으며, 가해자와는 다른 한국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위안을 삼기도 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학살 문제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가해자 측에 서야만 했다. 참혹한 그들의 흔적을 보며, 그들의 절규를 마주해야했다. 잔혹한 한국인 군인의 행위를 보며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이 선량한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빨리 가해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그것만이 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진실은 너무 가혹했다.

"내 몸이 증거다."라고 외치던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가 들리는 듯 했다. 가족을 잃고, 장애를 딛고 살아야 했지만,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었던 가혹한 삶이 시와 함께 다가왔다. 생존자가 우리나라 법정에서 증언을 하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들의 삶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 것인가. 시를 읽으면서 나의 무지와 무관심에 깊은 좌절을 느꼈다. 나는 베트남 전쟁을 피상적으로 소비하는 제3자에 불과했다. 게다가 나는 역사 선생이지 않은가. 지금껏 진심을 다해 가르쳤다고 생각했던 제주 4.3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5.18 광주 민주화 운동마저도 그저 교과서의 개념어로만 다뤘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가혹하고 잔인한 폭력 속에 수많은 생명이 꺼져갔고, 그 기억을 품고 여태 살아온 생존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폭력 행위에 가담했다는 죄책감을 토해낼 수조차 없었던 '솜털이 보송보송한 갓 스물의 청년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군을 증오하며 시를 남기거나, 적비(赤碑)를 세우거나, 사당에 향을 올리는 베트남 사람이 있을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이 가혹한 진실을 물리적으로 알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애써 외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죄책감이라는 진창에 빠져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베평화재단은 나와 다르게 진실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 기억하고자 했다. 이들이 만든 이 "아카이브"는 가치있는 기록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안전하게 보존하는 작업이다. 그들이 주목한 '가치'는 무엇인가.

 

"과거를 제대로 여미는 일이 때로는 내일을 제대로 여는 일에 다름 아닐거라는 생각."(100쪽, 송경동, 만약에 우리가, 우리가 아는 우리가 아니었다면)

 

하나, 가해자로서 과거의 죄책감을 넘어 평화를 위해 미래로 나아가는 것, 이 책은 우리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책이다.

 

"나 하난 줄 알았는데, 나 하나면 됐는데."(110쪽, 김현아, 겨울골짜기)

 

둘,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연대하여 그들을 위로하는 것, 이 책은 피해자를 위한 위한 책이다.

 

진실을 마주하자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우리들 아버지와 삼촌들이 야만과 광기의 청춘을 보냈던 이곳에 와서 어찌 관광과 유람으로만 소일할 수 있겠는가."(59쪽, 이재무, 베트남에서 돌아온 P 시인에게)

 

베트남으로 여행을 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편안한 호텔과 유흥 시설을 뒤로한 채 적비를 찾아갈 것이다. 한국군 증오비 앞에 서서 피해자들이 그린 가해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싶다. 나는 그 얼굴을 직접 마주한다면 어떤 생각에 잠기게 될까. 항일 독립운동 영화에 그려진 간악한 표정의 일본군을 떠올릴 것인가. 아니면 내 안에 숨겨진 악마를 발견하게 될 것인가.

 

최소한 베트남전쟁을 경제적 관점에서, 기출 문제의 유형 분석으로만 가르치던 내 모습에 대한 반성을 제대로 하고 올 수 있지 않을까. 베트남 양민을 학살한 군인들을 악마화했던 내 미숙한 발언을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조선과 안남의 사행단이 연경에서 만나 서로 시를 주고받던 창화의 전통을 따라할 수 없지만, (나는 한자를 모른다. 그렇다고 베트남어를 아는 것도 아니다.) 내가 베트남어를 공부해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들과의 우애를 통해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새롭게 열 수 있다면 좋겠다.

 

덧, 표지 한 가운데 붙어 있는 단란한 가족 사진. 그들은 한국군에 의해 희생되었다. 오른쪽 엄마의 손에 안겨있는 작은 아이는 이제 생후 1개월 된 아기였다. 그 아이는 학살 사건 직후 병원에 후송되었지만 곧 세상을 떠나아만 했다. 아마도 이 시집은 이런 의미를 담고자 했던 것 같다. 위 이야기를 전혀 알지 못했을 때는 그저 표지의 한 장식일 뿐이었던 이 사진이, 기억과 기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 의미를 생생하게 전하고자 엮은이들은 '시'를 기록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선택한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은 기록을 '체계적'으로 남기지 못했다는 사실. 사진이나 유물, 인물의 이야기가 조금은 자세히 나와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가슴으로 절절하게 느꼈지만, 아직 무언가 더 남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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