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생태학자는 인류 문명의 위기(기후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할까. 저자가 자연에서 찾은 답은 '순환경제'다. 인간이 자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저자가 찾은 답은 명확하고 쉽게 실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어려움이 있는 것일까.
인간은 오래 전부터 비인간 종의 언어를 해독하여 그들과 소통하려 노력했다. 물론 그 소통 노력이 지금은 다수가 단절된 상황이다. 꿀잡이새와 함께 벌집을 찾아내는 일, 범고래와 함께 다른 고래를 사냥하는 일 등, 인간과 비인간 종의 소통을 통한 상리공생 관계가 다수 발견되었다. 다시 이 관계를 되살리자는 것이다. 언젠가 연구를 통해 다양한 비인간 종의 언어를 해독하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무작정 상리공생의 이익을 누리는 것이 가능해질 것인가. 저자는 소통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경고한다. 상리공생 관계의 잔혹함 때문이다.
"상리공생은 흔히 피와 발톱 자국으로 얼룩진 잔혹한 관계이기도 하다."(134쪽, 6장 야생으로부터의 초대)
상리공생은 기존에 인간이 할 수 없었던 대단한 성공을 가져다줄 수 있다. 다만 그 성공은 주변의 다른 종에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따는 것이다. 꿀잡이새의 언어를 완전히 해독하여 벌집을 모두 찾아낼 수 있게 된다면, 결국 꿀벌은 멸종할 것이다. 범고래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여 그들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면 사냥은 더욱 쉬워질 것이고, 고래의 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다. 공생의 언어를 이해하더라도 결국은 우리가 선택해야 하고, 바람직한 상리공생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도시 문명을 버리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재야생화'는 어떤가. 과연 이것은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과연 아이를 정글에 그대로 풀어둘 수 있을까. 원래부터 정글에 살던 부족이 아니라면 말이다.
또한, 상리공생은 동반자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관계이다. 그렇다면 그 이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지금까지 진화생태학에서는 '다윈 적응도'를 기준으로만 상리공생을 판단했다. 즉, 공생을 통해 개체의 생산이 늘어나는 점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소, 돼지, 닭은 인간과 상리공생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많은 개체를 생산해낸 닭은 진화적 관점에서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과연 작은 닭장 속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삶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행복을 공유한다는 관점에서 상리공생을 바라볼 때 한 가지 까다로운 점은 행복이라는 특성이 정의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194쪽, 8장 황금 세포)
인간에게 먹히도록 진화한 과일은 과연 무엇이 행복일까. 닭장 밖으로 나가면 살아남을 수 없는 닭은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밖으로 나갔던 암탉은 행복해지긴 했지만). 이에 대한 생각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런 다른 생각들을 모두 허용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례를 제시한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하고 흥미로운 토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도 독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주는 이런 서술 방식은 참 매력적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자의 주장대로 자연의 순환 경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지구는 거대하지만 결국 유한한 우주선이나 다름 없어서다. 다만 그렇게 되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 것인지 지역별로, 문화별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육식이 기후 위기의 원인이기에 단순히 가축을 줄이고 육식을 줄이는 것만이 해법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린란드에서는 오히려 채식을 하는게 더 많은 자원을 소모한다. 자체적으로 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순록을 먹는 것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지역에 적합한 육식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의 방식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