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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 혁명의 딜레마,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지음, 송인재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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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월호 사고 때 많은 이들이 국가부재를 절감했다. 작게 줄어든 정부는 아무런 문제해결능력도 없었고 그럴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는 콘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그럼 왜 수시로 구조현장에 온갖 정보요청을 하여 일손을 뺏었던 것일까?  상징적 콘트롤 타워마저 되지 못한다면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려야할 이유도 없어진다. 그 권위는 그러한 일을 하라고 주어졌던게 아닌가? 현대사회에서 국가란 대체 무엇일까?

 

그런가 하면 미국 대선에서 막말을 쏟아내면서도 인기를 누리는 트럼프는 민주주의 제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한국도 몇 해 전에 이미 경험했다. 많은 시민들은 그 식욕 왕성한 기업적 정치인이 윤리성 제로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의 지갑을 불려 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품지 않았던가? 선거를 통해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탄생시킨 민주주의 제도는 과연 가치 있는 것일까? 이런 사회를 만들려고 근대 초기 숱한 혁명가들이 그렇게 피를 뿌렸었던가?

 

혁명, 민주주의, 국가체계 등에 대해 프랑스와 중국의 대표 지성이 생각을 교환했다
. 레지 드보레 교수와 자오팅양 연구원이다. 드보레는 체 게바라의 동지(혹은 배신자였거나)였던 전설적 혁명가이고, 중국 사회과학연구소의 연구원 자오팅양은 천안문 사태를 정점으로 하는 중국사회의 변화를 관찰해 온(혹은 구경꾼이었거나) 자칭 탁상공론가이다. 그는 과거 새로운 세계체계로써 전세계를 하나의 정치존재로 엮는 천하체계를 제안했었다. 2011년 프랑스-중국문화 원탁회의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서로에 대한 관심으로 이후 총12번의 편지를 교환한다.

 

동양과 서양, 행동가와 이론가라는 대립적 조합이 흥미를 돋운다. 그러나 노회한 혁명가 드보레는 혁명의 종말을 선언한다. 오늘날엔 이미 민주주의가 혁명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혁명은 각종 독재와 전제주의 정권의 위장에 이용될 수 있다는 진단이 뒤따른다. 역사적으로도 권력 남용을 반대한 아나키스트의 봉기가 오히려 더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만들어왔다. 나폴레옹, 스탈린, 마오쩌둥, 카이사르 또한 그러했다.

 

많은 경우 개인 이성이 모인다고 해서 그것이 집단 이성이 되기는커녕 곧잘 집단 비이성이 된다(26).”는 자오팅양의 지적에 집단 이성이 보장되었다면 과학이 가장 비약적으로 발전한 20세기 전체에서 그렇게 많은 집단적 망상과 피비린내 나는 변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127)”라고 드보레는 화답한다. 자오팅양의 말처럼 결국 중요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어떻게 변하는가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인들은 신민에서 시민이 되었고 오늘날 다시 고객이 되었다(218, 드보레)’. 드보레의 진단은 .전통적인 노동운동은 이제 소비자운동으로 바뀌고 있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그만큼 오늘날의 자본은 무시무시한 또 하나의 절대권력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폭스바겐이 미국에선 즉시 보상하면서도 한국에서는 미적대는 차별화의 못된 습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정치권력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특성이 있다.

 

이렇게 현대에 와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민주주의 사회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자오팅양은 세계화가 가져올 무한시장의 영향을 우려한다. 무한시장이 모든 이의 삶을 시장의존형으로 만들고, 사람들은 필요를 넘어서는 서비스에 젖어 기꺼이 무의식적으로 통치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오팅양은 그러한 사회에서 데모크라시에서 퍼블리크라시(publicracy)로 변형될 것이라고 보았고, 드보레는 미디어크라시(Mediocracy)로의 변화를 예측했다. 크게 다르지 않은 진단이자 각자의 문화권적 특성이 그대로 느껴진다.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에 대한 해법은 무엇일까? 드보레는 공적인 인물이 되려면 사상적 정교함과 세밀함을 지워버리고 잡음을 만들어야 한다. 그날그날의 주제를 단순화된 어휘로 표현하고 반역을 가장해 쇼를 해야 한다(251)”고 마지막으로 주문한다. 신문의 논단이든 칼럼이든, 인터넷 블로그이든 미디어크라시의 사회에서 고정적이고 지속적인 정치적 발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드보레의 이러한 제언은 상실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지식인의 역할을 알려줌과 동시에 자신이 걸어온 삶의 역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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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의 배신 - 무심코 차린 한식 밥상이 우리 가족 수명을 단축시킨다!
이미숙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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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념은 무엇일까? 아마 극우민족주의가 아닐까 싶다. 대표적 한식인 김치와 된장, 비빔밥을 생각해보자. 이 음식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랑과 믿음은 드높다 못해 거의 종교적이다. 김치와 된장의 온갖 효능들이 TV와 신문에서 끊임없이 소개된다. 이를 발전시켜 온 선조들의 지혜를 찬송하다가 한민족의 우수한 음식문화 예찬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야말로 ‘아~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모든 음식은 대개 양면성이 있는데 우리 전통음식은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한식의 배신>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를 대놓고 반박한다. 저자 이미숙 박사는 식품영양학 전공자로서 서울대 암연구소 근무 경력을 가졌다. 그런 그가 맘먹고 한식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꼽았다. 물론 개인적인 주장이 아니라 대부분 검증된 이론들이다. 오랜 저장을 위해 소금을 많이 쓴 젓갈과 김치류, 소금이 많고 소화가 잘 안 되는 국과 탕류, 탄수화물이 많은 밥 중심 식단 등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발효음식이 발암물질을 만든다’ ‘고혈압과 위궤양의 주범’ ‘김치, 잡균의 서식지, 된장’ ‘식중독과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젓갈’ ‘내 몸에 독이 되는 뜨거운 국물’에 대한 얘기는 자뭇 충격적이다. ‘바이오제닉아민’이라는 발암물질이 된장, 김치, 젓갈에 그득하다는 대목에 이르면 거의 멘붕 상태에 빠진다.

한번 따져보자. 한식이 식품으로써 특별한 권위를 가져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오천년 역사를 가진 농업국이기는 하나 곡창국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보릿고개와 끼니 걱정을 늘 하며 어려운 식생활을 해왔다. ‘쌀밥에 고깃국’은 20세기 말에 겨우 이룬 오천년 역사의 염원이었다. 이런 여건에서 고도의 음식문화가 발달했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 한식은 국제적으로 프랑스나 태국, 중국요리와 같은 반열에 앉지 못한다. 그럼에도 음식은 국가 이미지의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앞으로 국력 신장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얼핏 듣기엔 그럴듯하다. 그러나 태국은 선진국이 아니면서도 음식이 유명한 반면  영국 음식은 별다른 게 없지 않는가. 국력과 요리의 상관관계는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음식의 맛과 영양 못지않게 중요하면서도 우리가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한식이 국제화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반찬공유문화이다. 한식은 반찬을 많이 얹어놓고 같이 먹게 하는데 이는 매우 후진적인 비위생적 음식문화이다. 한국인에게 많다는 헬리코박터균이 이를 잘 증명한다. 불고기, 비빔밥, 떡볶이 등 최근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한식들은 대부분 반찬공유형이 아님이 눈에 띈다. 요즘 들어 개인별 앞접시가 나오고 있지만 대부분 찌개와 같은 주요리에만 쓰이고 기본 반찬들은 그대로 같이 먹고 있다.

과거 일본이 그랬듯이 요즘 우리 사회도 음식에 대한 담론들이 무성하다. 음식 소재의 영화와 드라마들이 연이어 나오고, 소위 맛집 소개가 인터넷 공간에 넘쳐난다. 출판 서적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와중에 나온 이 책은 단순히 음식에 대한 실용서에 머무르지 않았다. 실용서의 수준을 넘어서게 한 그 동력은 성찰이었다. 음식 자체만을 기능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식문화 전반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민족주의적 선입견과 웰빙이라는 자본제적 생활문화를 경계토록 한다. 이제 일상에서는 요리가 아닌 음식이, 웰빙이 아닌 로하스가 추구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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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 행복지수 1위 덴마크에서 새로운 길을 찾다 행복사회 시리즈
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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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언론에 일제히 한국의 30-50클럽 가입이 보도되었다. 한국이 내년도에 세계 7번째 가입 국가가 될 것이라 한다. 30-50클럽은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는 인구 5천만 명 이상의 국가군이다. “그런데 내년도 뉴스를 왜 뜬금없이 지금 내보내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정홍보냄새가 물씬 풍기는 생뚱맞은 뉴스였다. ‘20-50클럽’이란 조어가 난무하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대체 언제나 ‘국민소득’ 타령 좀 그만할 런지. 국민소득을 4만 달러로 올린다는 ‘747 전국민사기극’이 아직도 생생하다. 소수의 사람들이 재화를 독점하는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런 판에 소득수준이 3만 달러가 아니라 30만 달러가 된들 대중의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소득수준이 늘어난다고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자살률은 세계 최고수준이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수준일까? ‘살기 싫고, 자식 낳기 싫은 나라’ 이게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도저히 행복한 사회의 자화상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그럼 행복한 나라, 걱정거리가 없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오마이뉴스의 오연호씨가 <우리도 행복하 수 있을까>에서 덴마크 모델을 제시했다. 인구는 한국의 1/9, 면적은 1/5에 불과하지만 UN행복지수 1위 국가이다. 41위인 한국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요즘 걱정거리가 있다면 무엇입니까?”라는 오연호의 질문은 여러 덴마크 사람을 곤궁에 빠뜨렸다. 응답할 만한 걱정거리가 없어서였다. 그만큼 “행복하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나라가 바로 덴마크였다. 복지시스템이 잘 구비된 국가, 북유럽의 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사실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복지’가 사람들에게 미친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무엇보다 심리적인 ‘여유’를 주게 되었고, 그 여유 덕분에 우리와는 판이한 ‘삶의 가치관’이 확산되어 행복지수가 높아진 것으로 보였다.

 

물론 덴마크도 처음부터 이렇게 행복한 나라는 아니었다. 바이킹 시대에 번성했던 덴마크는 1801년 영국의 공격으로 끝없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19세기 전반에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뺏겼고, 후반에는 독일에게 국토의 1/3을 다시 잃었다. 14세기 전후에 스칸디나비아 3국을 통합했을 때보다 영토가 1/19로 줄어들었다. 강대국에서 군소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행복은커녕 울화병의 나라가 되어야 했다. 그 역경을 이기고 일어선 비결로 오연호는 두 명의 지도자를 소개했다. 그룬트비(1783-1872)와 달가스(1828-1894)였다.

 

그룬트비의 교육철학은 시민의식을 개혁시켜, 오늘날 행복사회의 정신적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 결과 오늘날 덴마크의 교육제도는 한국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7학년까지 점수를 매기는 시험이 없고, 8학년부터 시험을 보지만 등수는 매기지 않는다. 당연히 성적우수상이 없으며, 성적우수자를 특별히 대하지도 않는다. 이들에게 한국의 왕따는 낯선 얘기였다. 초등 입학 뒤 9년간의 교육과정 이후 주어지는 1년간의 ‘에프터 스콜레(인생학교)’와 ‘시민 자유학교’는 독특한 교육제도이다. 이 과정은 단순한 지식습득보다는 인생 전반을 설계하고, 또 재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은 이런 교육제도를 생각이나 해 보았던가? 한국인의 높은 물질적 가치관, 덴마크인의 드높은 공동체적 가치관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교육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학교에서 성적우수자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회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회는 결국 자살률과 행복지수로 판가름 났다.

 

“그룬트비가 교육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갈아엎었다면 달가스는 국토 개척으로 다시 한 번 사람들의 마음을 갈아엎었다(258쪽).” 스웨덴과 독일에 국토의 대부분을 뺏긴 상황에서 달가스는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고 부르짖었다. 남아있는 땅의 대부분이 황무지였는데, 그는 2대에 걸쳐 이를 경작지로 개간했다. 덕분에 덴마크의 황무지가 60%나 줄어들었다. 달가스의 노력은 그룬트비의 교육으로 의식이 깨인 농민들이 있어 가능했다. 새마을 운동처럼 관주도의 운동이 아니었다. 농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황무지 개간은 아래로부터 시작되었고 계속 그렇게 진행되었다. 단순히 애국심에 호소하지 않고 개간한 땅을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실질적인 이득이 있었기에 ‘달가스 드림’으로 불리어졌다.

 

행복사회 덴마크의 오늘은 그룬트비의 정신혁신과 달가스의 국토개척이 있어 가능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깨인 의식이 한몫했다. 농민들의 도전이 농촌 혁신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혁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농민의 당이 그것인데, 그 결과가 현재 덴마크 1당인 ‘벤스트레’이다. 이 당은 중도우파이지만 사회복지시스템 구축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깨어있는 시민이 그룬트비와 달가스의 토대 위에서 오늘의 행복사회를 완결시켰다. “결국 시민이 관건이다(306쪽)”는 저자의 말처럼, 복지사회의 키는 시민이 쥐고 있다. 각자 개인적인 차원에서 양적성장보다 질적향상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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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너라서 고마워 - 장애아 가족들의 슬픔과 기쁨 그리고 사랑
김혜원 지음 / 오마이북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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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쯧, 어쩌다 이렇게 되었소?” 지하철에서 가끔씩 들리는 소리이다. 대개 중년 여성이나 노인들이 장애 자녀와 함께 탄 엄마에게 물을 때가 많다. 그러나 느닷없이 질문을 받은 이의 표정은 좋지 않다. 측은한 표정의 동정 투 말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영 마뜩찮을 것이다. 부질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는 이러한 물음은 관심이기는 커녕, 지극히 개인적인‘호기심’일 뿐이다. 상대의 아픈 상처만 되살리는 무책임하고 생각 없는 행위이다. 관심이란,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행위이지, 개인적인 궁금함을 충족시키려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특별한 너라서 고마워>는 장애아 가족들의 힘든 육아 과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오마이 뉴스 시민기자 출신의 김혜원씨가 <나같은 늙은이 찾아줘서 고마워>에 이어 두 번째로 펴냈다. 전작에 이어 그의 관심은 계속 우리 주변 이웃들에게 있었고, 그들의 아픔과 가족들의 고충을 조명했다. “앞으로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가 낯선 시선을 거두고 사랑과 관심을 보여줄 때까지 그들에 대한 나의 관심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의 관심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뇌성마비, 자폐, 뇌병변 등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병명들. 이 책은 이러한 병을 가진 11명의 청소년들과 그 보호자에 대한 취재기이다. 그들의 일상은 대부분 어머니의 희생과 봉사로 이루어졌고, 나아가 가족들 모두의 노력이 들어가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24시간을 고스란히 바쳐야 하고, 그 때문에 다른 형제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 역시 아내의 내조를 잊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이웃들은 어떠한가? 한 어머니는 “엄마들도 말로는 사이좋게 놀라고 타이르지만 이내 하나둘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가버립니다”고 서러움을 토해냈다. 아마도 교육 수준이 높은 인텔리 대중의 이중적 모습이리라. 사회적 약자의 어려움을 잘 알고 이해하는 척 말하지만, 자신과 직접 연관될 때 그 관계의 끈을 지속시키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 속에서 모든 어려움은 고스란히 가족의 몫이었고 개인의 짐이었다.

 

‘통합교육’을 내세우는 현행 교육제도도 혹평의 대상이었다. 장애아가 일반 학생과 같이 교육받을 수 있게 한 특수학급이 오히려 서로를 분리시키고, 놀림과 차별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이다. 물론 제도나 교사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주리라는 생각은 지나친 기대이다. 일반 법조인들이 고시에 출제되지 않는 노동법을 잘 모르듯이, 장애인 교육은 일반 교사들에게도 사각지대인 경우가 많다. 학교는 사회의 작은 축소판이다. 사회에서 제대로 보듬지 않는 아이들을 학교가 알아서 잘 해줄것이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무리였다.

 

물론 장애아 양육을 위해선 일차적으로 가족들의 애정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웃들의 관심과 사랑도 있어야 한다. 저자처럼 휴일에 자녀와 함께 장애인 복지시설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도 아름답다. 그러한 활동은 단순한 여가활동이 아니다. 아렌트(H. Arendt)의 시각으로 보면 진정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는 인간의‘행위(action)'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사적인 노력은 모두 개인적 차원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공적 부문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가족들, 그리고 사회의 많은 선량한 개인들에게만 그러한 역할을 떠 넘긴 체 우리 사회는 이들을 방관하고 있는 게 아닐까?‘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사회 전체의 노력이 필요한데 말이다.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필요로 한다. 장애인 문제가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모든 것을 가족에게 맡기는 나라. 철저히 공적 부조를 외면하는 나라. 그러면서 그 여력으로 경제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나라. 대체 누구를 위한 성장이며 발전인가? 이미 선진국에 들어섰다는 바로 오늘날 우리 한국의 민낯이다. 사회구성원에 대한 보호와 의무를 모두 개인에게 떠맡기는 사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합계출산률 1.17명이라는 통계수치가 잘 말해준다.

 

<특별한 너라서 고마워>는 장애인 자녀와 부모의 얘기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 대상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소수 종교인, 성적 소수자, 소수 인종 등등 장애인 못지않은 소수자는 얼마든지 있다. 이 땅에서 이들은 모두 약자이며 타자이다. 그 존재와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기 십상이다. 한 엄마는 이렇게 털어 놓았다. “정작 힘들고 괴로운 건 위태롭고 느리게 커가는 아이가 아니에요. 비장애인들의 불편한 시선이죠. 편견도 동정도 싫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면 고맙겠어요.”이 엄마의 말처럼 나와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회를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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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 - 분단인의 거울일기
노순택 글.사진 / 오마이북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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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의 연평도 폭격사태가 벌어진 지 벌써 3년. 당시 많은 사상자를 낸 이 비극을 어처구니없이 희극으로 바꾼 이가 있었다. 개그맨도 아닌 정치인 안상수였다. 당시 그의 보온병 발언은 아직도 종종 언급되는 장안의 화젯거리이다. 현장에 버려진 낡고 녹슨 보온병을 포탄으로 착각했던 것은 그렇다 치자. 근데 동행한 같은 당 대변인이 ‘이것이 몇 밀리미터냐’고 묻고, 이것을 다시 또 옆에 있던 육군 중장 출신의 모 의원이 ‘76밀리 포탄’으로 확인해 주면서 한편의 희극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그들의 말처럼 단순한 실수였을까?

 

사진작가 노순택은 이를 하나의 해프닝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지나간 한국전쟁이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살아 숨쉬는 지를 다년간 탐색해 왔다. 그동안의 많은 개인전 중에서 분단의 향기(2004), 비상국가(2008), 거울정치(2009), 좋은 살인(2010), 망각기계(2012) 등을 통해 남과 북에서 작동하는 분단권력의 광기와 국가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그는 2005년에 펴낸 첫 사진집 <분단의 향기>에서 이미 앞으로의 작업 공간이 한국 현대사이며, 주제는 제도화된 폭력임을 명시했다.

 

분단상황을 이용한 남북한의 분단권력이 남과 북에서 작동하는 동시에 오작동하는 현실에 주목한 것이다. 남과 북은 모두 분단 상황을 빌미로 예외상태를 발동시켜 체계를 유지해 왔다. 오늘날까지도 남은 북을 북은 남을 괴물로 만들어 놓고 대항을 핑계로 종종 스스로 괴물이 되곤 한다. 그 와중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은 실종되어 버렸다. 분단권력이 빚어낸 진영논리에 빠지면 누구든지 호모 사케르가 될 수 밖에 없다. 양 진영은 모두 많은 호모 사케르를 양산해 왔다.

 

이 책은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란 제목과 ‘분단인의 거울일기’라는 부제가 연상시키듯, 포격 현장을 ‘분단’이라는 프레임으로 조용히 보여준다. 연평도 사태가 일어난 2010년 11월부터 2012년 12월까지의 약 2년간을 기록하고 있다. 일기 형식의 글로써 사진에 좀 더 많은 비중이 실렸으며, 포격 직후 연평도의 참상이 250여 쪽 책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그날의 참상을 그 어떤 설명보다 단번에 보여준다. 포탄에 맞아 검게 그을린 집, 갖가지 가재도구들, 그리고 그 위로 저물어가는 석양이 만든 긴 그림자가 한결 충격감을 더해주었다. 민가의 깨어진 창문과 방바닥의 유리조각, 널브러진 이부자리는 그날의 다급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깨어진 유리창은 오고간 포탄과 함께 파탄지경에 이른 남북관계와 다를 바 없었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개도 옆구리에 상처를 입은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깨어진 식당 수조 속에는 물고기들이 허연 배를 드러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죽어있다. 그들의 눈에는 이 상황이 과연 어떻게 비쳤을까?

 

이 책은 분단상황이라는 큰 틀에서 연평도 포격사건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연평도라는 나무로 시작된 그의 사진 프레임은 분단권력이라는 큰 숲을 잘 조명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벌어진 제도화된 폭력에 장기간 천착한 그의 날카로운 렌즈는 폭격 현장의 물상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다만 세 줄 이내의 짧은 일기가 30여 쪽 이상인 것은 아쉬운 점이다. 기고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에필로그에서 밝혔으나 출판을 결심했을 때 좀 더 보완할 수 없었을까? 그렇지만 사진작가라는 직업을 의심케 하는 유려한 문장은 내용적인 충실함과 읽는 재미를 같이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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