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자는 붙잡히게 되지만, 쫓는 자는 붙잡게 된다.
수정의 얼굴이 붉어진다. 수치와 깨달음이 뒤섞이고겁에 용기가 뒤섞인다.
-함께 저승으로 가거라. 힘을 합쳐 문 앞에서 저승의 신을 붙잡아, 각자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렴.
- P49

비어 있던 마지막 장에 초상화 하나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수정의 명부에는 이안의 초상이, 이안의 명부에는수정의 초상이 그려진다. 서로의 얼굴이다.
이안은 자신이 수정의 삶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 꿈에서 수정을 깨워 함께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정은 이안이 그런 것들을 깨닫는중이라는 사실을, 저 아이의 착각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졌다는 사실을 느꼈다. 수정은 이안의 눈에서 예전청소부의 눈에서 본 광기를 본다. 우리는 결코 예전으로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 P96

ㅡ내가 없어도 죽음은 있어. 이곳이 무너지고 죽은자들이 감옥을 벗어나면 나도 죽고 너도 죽고 저 애도죽는다고. 그 손을 놔!
이안의 죽음만은 바라지 않아서 수정은 머뭇거린다.
모두 다 죽어도 괜찮으니 이안이 살면 안 되는 걸까? 비슷한 생각을 이안도 한다. 기절한 채로도 한다. 살고 싶다. 살면 안 될까? 수정과 함께 앞으로도 살면 안 될까?
그러나 이안에게 있어 삶이란 꿈 너머에 있는 것이고꿈이란 수정과 손을 붙잡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
- P105

"호정아, 다리가 아프면 구두를 벗어."
성인이 되고 맨 처음 클럽에 갔을 때 다리가 아프니 집에가자고 호소하는 나에게 친구는 대답했었다.
"다리가 아프면 집에 갈 생각 말고 구두를 벗어. 창피하면내 운동화 잠깐 신을래?"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쩐지 기운이 나서, 구두를 벗지도 않고 열심히 춤추며 첫차가 뜰 때까지 거기 있었다. 그리고 해장 - P130

국 집으로 향하는 어슴푸레한 도로에서 비로소 구두를 벗고 맨발로 걸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발바닥이 차갑고 축축한 밤이면 그래서 웃음이 나는가 보다. 옆에 있어 준 친구들, 같이 춤춰 준 친구들, 신발과 길을빌려준 친구들 고맙습니다.
2021년 봄 호정 - P131

디테일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공통의 요소들을 추려내고 해석을 가미해 볼 수 있다. 우선 주인공은 천편일률적으로 미성년남성이다. 이처럼 남자아이의 목숨 늘이기가 서사의 주축이 되는 까닭은 무병장수의 보편적인 소망을 반영하기를 넘어서 가부장제라는 특정 사회 체제에서 대 잇기가 중시되기 때문이다.
대를 잇기 위해, 가문을 지속시키기 위해, 특히나 집안의 외아들이라면 미성년기를 무탈히 넘기고 생존해야 한다. 반면, 당 - P137

시 여자아이들은 얼마나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혹은 어떻게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는지는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의 연명담을 거의 알지 못한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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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딱히 살고 싶다기보다는,
ㅡ네.
ㅡ죽고 싶지가 않아서요.
ㅡ네.
ㅡ싫다거나 무섭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좀 억울하다.
고 해야 할까, 이해를 못 했다고 해야 할까.
ㅡ이해를 못 했다구요?
ㅡ네.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그렇잖아요. 열아홉살은 죽을 나이가 아니잖아요. 아니 내가 늙은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죽어야 하는지….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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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수정은 이 장면을 수없이 떠올리며 누구와 나눌수 있는 순간 가운데 가장 소중한 순간이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서로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 채마주보는 첫 순간, 아직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은 순간, 각자의 마음속 상처에 관하여 서로가 완전히 무죄인유일한 순간.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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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소가 빵빵하지도 않을 텐데 꼭 피를 마셔야 하나생리식염수나 포도당 용액, 혈액 대용제로는 대체가 안 되나? 어차피 위장을 통해 소화시켜야 한다면 다른 식이를시도해 본 적은 없나?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이는 정신과 다니라는 충고를서른 몇 번씩 들었다니 이 질문도 지긋지긋하게 들었을 것같아서 참았다. 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물어본 녀석들은 다 내 배 속에 있지."라는 답변이 나올 것 같았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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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뭘까. 어떤 사랑이면 저렇게 오랜 세월 기다릴 수있는 걸까. 어린 예리는 그 사랑이 영롱하여 원망했고 엄마를 동정했다. 그 사랑이 돌아와 불쌍한 엄마를 구원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엄마는 끝내 자기 안에 갇혀 버렸다. 사랑이 그런 건가. 책임지지 않을 마음이면 보이지도 말아야지. 감출 수도 있어야 사랑이지. 멋대로사랑하고 마음대로 버리고, 엄마도 똑같다. 그런 엄마를 끌고 20대를 살아가야 하는 예리는 버거웠다. 모든 것이 귀찮다.
- P49

엄청난 대식가에 식사 후엔 반드시 후식을 먹어야 하는곰탱이 탐정에게 아직 알려 주지 않은 나만의 맛집 목록이두둑하게 남아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 P127

밤마다 네게 하던 얘기들을 어느 숲에서 해야 할까. 밤마다 내 배에 대고 하던 얘기들을 너는 어느 나무 구멍에대고 하고 있니.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하고 각각에 설탕을넣고 흰자는 머랭을 쳐서 노른자와 합치고 밀가루와 버터와 우유를 섞어 제누아즈 반죽을 만드는데, 나는 너와 헤어져서, 무엇을 섞고 넣어야 합쳐질 수 있을까. 반죽을 넓고 얇게 구워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적당히, 미지근하게식혀야 크림이 녹지도 제누아즈가 갈라지지도 않는다는데,
이 펄펄 끓는 분노와 차가운 절망은 얼마나 두어야 식을까. 얼마나 지나야 네가 그립지도 밉지도 않을까.  - P143

질 오래 하며 익힌 촉이라 해야 하나? 자네의 그 예리함과문제의식, 그대로 두면 아까워. 그러니 대학원에 오기 않을래? 분명히 훌륭한 연구자로 클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어떤부탁이든 들어줄게."
난 그 장소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 P197

남편이 죽었어도 시댁 귀신이 되어서 시부모를 보살필 생각을 해야지, 바로 쑥나간 것이 유향기가 정수혁을 해친 증거라고 우긴다는 거없다. 시부모는 유향기가 새로 얻은 원룸 앞까지 찾아와살인자라고 외치며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 P225

"향기한테, 자기가 정한 화장품만 쓰게 했어요. 유기동식물성 색조 어쩌고 하는 거. 일반 색조 화장품은 닿으면간지럽고 냄새 심하게 나서 싫다나, 하여간 까다로운 척은혼자 다 하는 놈이었어요. 의처증 주제에. 그거, 홍차죠? 정수혁, 비염이에요. 홍차향 전혀 못 맡으면서 홍차 잘 아는척도 얼마나 하던지."
- P235

무너지는 것은 아름답다. 그것만이 내 시선을 끈다. 유향기가 그 짧은 순간, 내 시선을 잡아끌었던 건 무너지고 있어서일 것이다. 정수혁이 의자 아래로 굴러떨어지던 그때,
유향기의 삶 일부분은 분명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다. 본인의 의지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천천히, 입술에 립스틱을국국 눌러 바르며 무너질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무너질 각오를 한 사람은, 그만큼 빨리 삶을 쌓아 올린다. 이전보다도 단단하게.
- P242

던 막손 씨의 몰골은 다시 잊지 못할 모습일 것이다.
그때 피에 젖은 얼굴을 보며 내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역겨움도, 두려움도 아닌 측은함이었다는 것까지도.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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