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뭘까. 어떤 사랑이면 저렇게 오랜 세월 기다릴 수있는 걸까. 어린 예리는 그 사랑이 영롱하여 원망했고 엄마를 동정했다. 그 사랑이 돌아와 불쌍한 엄마를 구원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엄마는 끝내 자기 안에 갇혀 버렸다. 사랑이 그런 건가. 책임지지 않을 마음이면 보이지도 말아야지. 감출 수도 있어야 사랑이지. 멋대로사랑하고 마음대로 버리고, 엄마도 똑같다. 그런 엄마를 끌고 20대를 살아가야 하는 예리는 버거웠다. 모든 것이 귀찮다. - P49
엄청난 대식가에 식사 후엔 반드시 후식을 먹어야 하는곰탱이 탐정에게 아직 알려 주지 않은 나만의 맛집 목록이두둑하게 남아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 P127
밤마다 네게 하던 얘기들을 어느 숲에서 해야 할까. 밤마다 내 배에 대고 하던 얘기들을 너는 어느 나무 구멍에대고 하고 있니.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하고 각각에 설탕을넣고 흰자는 머랭을 쳐서 노른자와 합치고 밀가루와 버터와 우유를 섞어 제누아즈 반죽을 만드는데, 나는 너와 헤어져서, 무엇을 섞고 넣어야 합쳐질 수 있을까. 반죽을 넓고 얇게 구워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적당히, 미지근하게식혀야 크림이 녹지도 제누아즈가 갈라지지도 않는다는데, 이 펄펄 끓는 분노와 차가운 절망은 얼마나 두어야 식을까. 얼마나 지나야 네가 그립지도 밉지도 않을까. - P143
질 오래 하며 익힌 촉이라 해야 하나? 자네의 그 예리함과문제의식, 그대로 두면 아까워. 그러니 대학원에 오기 않을래? 분명히 훌륭한 연구자로 클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어떤부탁이든 들어줄게." 난 그 장소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 P197
남편이 죽었어도 시댁 귀신이 되어서 시부모를 보살필 생각을 해야지, 바로 쑥나간 것이 유향기가 정수혁을 해친 증거라고 우긴다는 거없다. 시부모는 유향기가 새로 얻은 원룸 앞까지 찾아와살인자라고 외치며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 P225
"향기한테, 자기가 정한 화장품만 쓰게 했어요. 유기동식물성 색조 어쩌고 하는 거. 일반 색조 화장품은 닿으면간지럽고 냄새 심하게 나서 싫다나, 하여간 까다로운 척은혼자 다 하는 놈이었어요. 의처증 주제에. 그거, 홍차죠? 정수혁, 비염이에요. 홍차향 전혀 못 맡으면서 홍차 잘 아는척도 얼마나 하던지." - P235
무너지는 것은 아름답다. 그것만이 내 시선을 끈다. 유향기가 그 짧은 순간, 내 시선을 잡아끌었던 건 무너지고 있어서일 것이다. 정수혁이 의자 아래로 굴러떨어지던 그때, 유향기의 삶 일부분은 분명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다. 본인의 의지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천천히, 입술에 립스틱을국국 눌러 바르며 무너질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무너질 각오를 한 사람은, 그만큼 빨리 삶을 쌓아 올린다. 이전보다도 단단하게. - P242
던 막손 씨의 몰골은 다시 잊지 못할 모습일 것이다. 그때 피에 젖은 얼굴을 보며 내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역겨움도, 두려움도 아닌 측은함이었다는 것까지도.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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