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급이라는 건 말이야. 신상 람보르기니처럼 돈을 낸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냐" - P85

"지금도 충분히 말랐지만 전공 특성 때문이라면 차라리 유산소를 늘려요"
"운동이라면 하루에 열 시간도 더 해요. 죽을 만큼 뛰고지 않을 만큼만 먹는다고요. 목이 타서 죽을 것 같아도 물론모금도 안 마셔요. 저 저주받은 체질이거든요."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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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몸과 대비되는 풍만한 발등 선은 발레의 세계에서나 아름다운 것이지 일반인에겐 기형적으로 보일 터였다. 높이가 7센티가 넘는다는, 그래서 마지막 동작까지 드라마틱한곡선으로 완성한다는 무용수의 발등 사진을 보며 어린 수미는 제 발등에 눈물 젖은 스펀지를 테이핑하곤 했다. 그러고 보면인간이 평등하다는 건 아름다운 미신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점 외에는 평등하지 않다. 예체능을 3일만 해보면 알 수 있다.
수미는 제 아이들에게는 몸으로 평가받는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이를 갈았다. - P37

 일부 헬스 트레이너들이 마사지에 인생 상담까지 해주며 유사 연애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러울 정도였다. 필라테스는 강사도 고객도 대부분 여성이라 그런 묘한 설렘이나 긴장감으로 영업하긴 어려웠다. 그러니 여성 회원들이 동경할 만한, 마르고 탄탄한 강사의 몸 자체가 사업 전략이자 센터 인테리어 그 자체였다 - P40

도리스 레싱의 소설 속 수전에게처럼 자신에게도 19호실이 필요했다. 요가나 필라테스 같은 정적인 운동은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스피커가 터질 듯한 음악을 들으며 정신없이 세트를반복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이 헬스장이 수미의 19호실이되었다. - P40

 주니와의 만남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못된 사람은 참아도 지루한 사람은 못 참으니까. 남편은표정도, 취미도 좋고 싫음도 없는 남자였다. 미식과 쇼핑에 관심이 없었고 잠자리는 수미가 눈치를 줄 때만, 그것도 정상위로.
- P41

아니, 이익을 주지. 사소한 부도덕은 상냥한 부인이 되게해주니까. 그렇지 않은가. 모두에겐 풀 곳이 필요하다. 풀고 와서 우아하게 처신할 곳도 필요하다. 필연적으로 두 개의 장소와 두 개의 자아가 필요하다. 수미는 손쉽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 P42

전문가는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몸은 트레이너에게, 살림은 도우미에게, 교육은 학원강사에게. - P45

석진은 이럴 때의 수미를 좋아했다. 아니, 이런 여자를 차지한 자신을 좋아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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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정부가 세워지며 좌익으로 분류돼 교육 대상이 된 사람들이 가입된 그 조직에 대해 나는 알고 있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정치적인 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한 것도 가입 사유가 되었다. 정부에서 내려온 할당 인원을 채우느라 이장과 통장이 임의로 적어 올린 사람들, 쌀과 비료를 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다수였다. 가족 단위로도 가입되어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포함되었고,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 P273

그후로는 엄마가 모은 자료가 없어, 삼십사 년 동안.
인선의 말을 나는 입속으로 되풀이한다. 삼십사 년.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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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육십 년에 대해서. - P213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 P220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더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 P225

아버지를 위한 영화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영화도 아니고, 영상 시도 아니에요. 놀란 듯한 진행자가 웃으며 매끄럽게 물었다. 그럼 무엇에관한 영화인가요? 그 질문에 그녀가 어떻게 답했는지는 기억나지않는다. 다만 그녀가 영화를 그만둔 이유를 짐작하려 할 때마다그날이 떠올랐다. 당혹과 호기심과 냉담함이 섞인 진행자의 태도와 객석의 어리둥절한 침묵, 진실만 말해야 하는 저주를 받은 듯천천히 말을 이어가던 인선의 얼굴이. - P236

밤마다 악몽이 내 생명을 도굴해간 걸 말이야. 살아 있는 누구도 더이상 곁에 남지 않은 걸 말이야.
아닌데, 하고 인선이 내 말을 끊고 들어온다.
아무도 남지 않은 게 아니야, 너한테 지금.
그녀의 어조가 단호해서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는데, 물기 어린눈이 돌연히 번쩍이며 내 눈을 꿰뚫는다.
......내가 있잖아. - P238

어디로?
그건 뭐 그 사람 맘이지. 산을 넘어가서 새 삶을 살았거나, 거꾸로 물속으로 뛰어들었거나……그 순간 이후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물속으로?
응, 잠수하는 거지.
왜?
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돌아본 거 아니야? - P242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홀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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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이 깨지고 피가 흐를 때까지 계속한다. 허밍 소리가 별안간 그쳐 나는 고개를 든다. 건천에서 의식을 차렸을 때처럼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축축한 눈송이가떨어지고 있다. 이마에 인중에, 입술에이를 부딪히며 정신이 들어, 이곳이 건천도 마당도 아닌 인선의방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 톱이 필요하다고 꿈과 생시 사이에서생각한다. 이 모든 걸 물리치도록. 이 모든 게 나를 피해가도록.
잘 놀다 가세요.
인선의 어머니가 내 귀에 속삭인다. 내 두 손에 쥐여진 그의 손이 죽은 새처럼 작고 싸늘하다. - P171

부서질 듯 문과 창문들이 덜컹거린다. 바람이 아닌지 모른다.
정말 누가 온 건지도 모른다. 집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고 찌르고 불태우려고, 과녁 옷을 입혀 나무에 묶으려고, 톱날 같은 소매를 휘두르는 저 검은 나무에 - P172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 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 - P172

새가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감싸고 여민 손수건을 비집고, 친친 감아 매듭지은 실을 풀고, 귀를 맞춰 닫은 알루미늄 통을 열고, 수건으로 감싼 뒤 십자로 묶었던 실을 끊는 것은 얼어붙은 봉분과 그 위로 쌓인 눈을 뚫고 날아올라, 잠긴 문 안으로 들어와 철망 속이 횃대에 앉는 것은.
삐이이, 아마가 다시 울었다. 여전히 고개를 외튼 채 젖은 약콩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 P180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앞서 내가 했던 말을 조용히반박하듯 인선이 말했다. - P195

그녀는 익숙한 동작으로 다시 목장갑을 끼고 난로의 달궈진 문을 열었다. 부지깽이로 나무토막들을 뒤집자 불티가 튀었다. 불꽃의 열기가 내 얼굴까지 끼쳐왔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인선의 목소리가 그 열기 사이로 번졌다.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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