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존재를 피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면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후각은 생존을 위해선 즉각예민해지고 공존을 위해선 금세 둔감해지기에 축복이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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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커다란 눈송이가 내 손등에 내려앉는다. 구름에서부터천 미터 이상의 거리를 떨어져내린 눈이다. 그사이 얼마나 여러차례 결속했기에 이렇게 커졌을까? 그런데도 이토록 가벼울까.
이십 그램의 눈송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커다랗게 펼쳐진 형상일까.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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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축대에서 떨어졌던 그 밤에꿈을 꿨다고 했어. 다섯 살 모습으로 내가 눈밭에 앉아 있었는데 내 뺨에 내려앉은 눈이 이상하게 녹지를 않더래. 꿈속에서 엄마몸이 덜덜 떨릴 만큼 그게 무서웠다. 따뜻한 애기 얼굴에 왜 눈이안 녹고 그대로 있나. - P81

 만 열일곱 살 아이가 얼마나 자신이 밉고 세상이 싫었으면 저렇게 조그만 사람을 미워했을까? 실톱을 깔고 잔다고, 악몽을 꾸며 이를 갈고 눈물을 흘린다고. 음성이 작고 어깨가 공처럼 굽었다고. - P82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랑 열일곱 살 이모만 당숙네에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엄마는 말했어. 다음날 소식을 들은 자매 둘이 마을로 돌아와,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다.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 봐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고 얘기해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다.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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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 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맹렬한 속력으로, - P15

악몽은 물론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제는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울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 P23

바싹 마른 줄 알았던 우물바닥에서 고무를 녹인듯 끈끈한 풀물이 차올랐다. 우리들의 피와 비명을 삼키기 위해. - P21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사람들 말이야.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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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경험은 에피소드가 된다. 그 외에도 가난의 슬픈 장점들은 많다. 가령, 빼앗길 돈조차 없어서보이스피싱에 걸릴 위험이 없다는 거, 돈도 없고 거기다 엄마까지 없으면 금상첨화다. - P101

여전히 원룸에 살고 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다.
방의 크기는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그게 뭐가중요한가. 나는 나대로 성장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정신 승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부터 ‘우리 집‘이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막히지 않으니까. 그냥 서슴없이나온다. 자격지심이 많이 사라진 모양이다. 그렇다고원룸에서만 계속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 목표는 단순하다. 방이 두 개 이상인 집. 나도 방문이란 걸 열어보고 싶다.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고 싶다.  - P109

꿈이 현실에 잡아먹히는 중이었다. - P135

요즘은 왜인지 농담을 만드는 일이 즐겁지 않습니다. 행복하진 못해도 즐거운 일이 있다면야 불행은 눈치껏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법한데, 이제는 즐거운 일에도 자격이 필요해 보입니다. 농담에도 자격이 필요한시대입니다. 예전과 달리 농담을 만드는 동시에 이 농담이 실격인지 아닌지 하는, 온몸을 조이는 족쇄 같은생각이 불현듯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무거운 철갑을 입고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땀이 나고 버거운 일이 돼버렸습니다. 더는 마냥 즐겁지 않은 것이죠.
간곡히 바라건대, 제가 부도덕한 사람이 아님을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P144

 웃음은 고행길이다. 대다수가 웃고 있지만 누군가가 울고 있다면, 그것이 설령 의도치 않았더라도 창작자들에게 치명타다. 그래서 검수, 또 검수해야만 한다.
방망이를 깎듯 가시를 걸러낸다. 이것이 불편함에 대한 창작자의 당연한 태도이니까. - P155

내가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닌, 유구한 과거의 누군가와 연결돼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에게도 뿌리가 생겼다. ‘왜‘라는 존재론적 의문에 답이 생긴 것이다. 미래만 보고 달려온 내가 먼 과거의 존재에게 위안받다니. 이거 참 웃긴 일이다. - P179

웃기는 일이란 어렵다. 우습지 않으면서 불편하지 않게 웃기는 건 훨씬 더 어렵다.
코미디언들은 강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 본능에충실하고 모험심이 넘치는 그 아이는 기어코 강가에발을 빠뜨리고 싶어 한다. 작가는 ‘어어, 거긴 위험한데!‘라고 조바심을 내면서도 막상 그들이 강가(선)에발을 담그지 않으면 그것대로 또 서운하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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