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우와 만나면 나는 이렇게 선명해진다. 그는 희미한 것들을 사랑하고 나는 가끔 그것들을 못 견뎌한다. - P104
"술주정하려구." 김장우의 눈이 둥그레졌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먼저 둥그레진눈에 입술을 대었다. 그의 몸이 굳어졌다. 다음에는 우뚝 솟아서외로운 그의 코에 내 입술을 머물게 했다. 그리고 놀라 벌어진 채의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맥주 냄새가 조금 났고 내 옆구리쯤에서 엉거주춤하게 멈춰있던 그의 두 팔은 놀랄 만큼 극심하게 떨고 있었다. - P120
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주리와 주혁이는 이모부의 자식들이었고, 나와 진모는 술주정뱅이의 자식들이었다. 이모부가 누구를 더 사랑했겠는가. 생선살 한 젓가락 우리에게 떼어주기를 아까워했던이모부지만 아버지의 사업자금으로 갈치 백 마리, 아니 천 마리, 만마리 살만한 돈을 빌려주었고 결국 돌려받지 못했어도 별다른불평을 하지 않았던 것을 어머니는 왜 잊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모처럼 갈치를 탐하는 식성이 아닌 탓에 내가 이모부에게 관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 P127
이처럼 오순도순했던 외갓집 풍경도 아버지의 패악이 굳어지면서 점점 뜸하게 연출되었다. 가족 중 누구 하나의 불행이 너무깊어버리면 어떤 행복도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법이었다. 어머니도 점차 외갓집 발길을 끊었다. - P133
통곡 속에 섞인 후렴구는 바로 이것이었다. "내 자식이 불쌍해! 내 자식만 불쌍해!" 이제는 인정할 만도 하건만, 다른 것들은 대충 극복을 한 듯이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어머니는 이 부분이 가장 취약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P143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 P152
진모에게도 어머니는 피할 수 없는 숙제였다. 어머니에게는 아버지가 피할 수 없는 숙제였고 우리에게는 어머니가 그런 존재였다. 나는 처음으로 진모에게서 동지애를 느꼈다. - P155
그런 일이라면 어머니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이어서 진모가 어머니를 단련시켰다. 어머니는 경험 풍부한 시장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진모의 뒷바라지를 너무도 완벽하게 처리해나갔다. 틈틈이 통곡하고, 틈틈이 진모 쫓아다니고, 그런 어머니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 P156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 P157
그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사랑하지 말라고, 이 사랑을 멈추라고통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는 대답의 의무가 있었다. 나의 망설임을 나영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했으므로 자기를 사랑할 것이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으므로 자기와 결혼할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 믿음대로되어 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지만. - P159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 P165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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