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읽고 싶다. 영은이 내 몸을 더듬었다. 영은의 손끝이 내 몸을 스쳐 갈 때마다 나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었다. 눈썹과 안와, 콧날과 인중, 귓바퀴와 귓불, 빗장뼈와 갈비뼈 영은은 그것들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나를 감싸고 있는 살갗을 빠짐없이오래도록 어루만졌다. - P63
어둑한 방 안에서 영은과 내가 얕은 숨을 쉬며 서로를 더듬을 때면 영은에게 나를 송두리째 읽히는 것 같았다. 내가 영은에게 보여주는 것보다, 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영은이 나를 더 샅샅이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느낌이 황홀하고 부끄럽고 또불안해서 나는 침대맡으로 손을 뻗어 전등 스위치를 켜곤 했다. - P63
잘들어라, 조지, 사랑이란 건 믿을 게 못 된단다. 하지만 한번믿어볼 만한 것이지. 그 애가 좋으면 그 애를 좋아하면 돼. 네가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조금씩 훌쩍거리던 조지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한 사람이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품는 강렬하고 아픈, 그래서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순간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는 때는 없는 그런 순간. - P77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따금 생각하곤 합니다. 몇 해 전,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울음을 터트린 적이 있습니다. 캄캄한 현관에 쪼그려 앉아 울면서내가 왜 울까, 왜 이 울음이 멈추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내 것이 아닌 인생이 내게 오려니, 내게로 들어와 내 일부가 되려니저로서는 버거웠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의 인생을 고스란히 받는 것이 내 깜냥으로는 부족해서 내 것이기를 피하느라 눈물로 쏟아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울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들려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 P79
나는 우는 희강을 안고 토닥이면서 나도 아니고 젤로도아닌 어떤 소년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여자가 울 때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배운 적 없는 소년의 난처함에 대해서. - P99
지금 하는 행동이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를 이 애가 알고 있을까를 의심하면서 그러나 영원히 몰라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손과 무릎 사이의 온기로 손끝에서부터 녹아 없어지는 나를, 나의 젤로를 상상했다. 네가 사랑하는 젤로는 너를 사랑해서 어른이 되어버렸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말을 소리 내서 발음하지 않겠지만언제가 되었든 어떤 계기로든 네가 이 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너의 젤로에게도 변성기가 올까. 상상과 다르게 내 손은 녹지 않고 대신에 떨려오기 시작했는데 그런데도 희강은 오래도록 내 손을 놓지 않았다. - P118
나, 죽은 거야? 입에 담배를 문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낡은 엔진이 내는 굉음. 등대 없는 밤바다를 향해 막대로 된 폭죽을 터뜨리는 사람들, 카혼 위에 앉아 빠른 리듬을 두들기는가수, 가로등 아래 모여드는 날벌레, 입을 벌리고 죽은 물고기머리와 희고 붉은 살점들. 그랬구나. 나는 죽었어. 그때 다 끝난 거야. 브레이크를 밟고 엘리가 차 밖으로 튕겨나간 다음, 단 몇 초 만에 완전히 끝난 거야.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관객처럼 나는 가짜 이야기에 빠져 내 현실을 보지 못했다. - P151
창밖으로 엘리가 보인다. 크면 어른이 아니라 엘사가 될 것같다던 너의 미래. 그 미래에서 너는 파도를 탄다. 파도가 오는방향에 따라 몸의 무게중심을 옮기며 흰 거품을 일으킨다. 이제파도는 너를 넘어뜨리는 게 아니라 더 높이 들어 올린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굴까. 너를 지켜보다가 네가 물 밖으로 나오자 크고 부드러운 수건을 펼쳐 네 어깨를 감싸주는 사람. 그 사람이너의 허리를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춘다. 설마, 과카몰레는 아니겠지? 나는 어깨를 맞대고 걸어가는 너와 너의 연인을 바라본다. 그 사람이 정말 여자인지, 나이가 몇 살쯤인지, 어떤 표정을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운명 안에서 온전히기쁨을 누리는 연인의 믿음이 느껴질 뿐, 그리고 차고 짭짜름한바닷바람, - P154
하지만 우리는 한 몸이었고, 그 애가 느끼는 괴로움은 나에게도 흘러들어와서 나는 수프에 적신 빵처럼 축축해졌다. - P219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동시에 나의타자아를 동시에 사랑하고, 그 타자아가 나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복잡한 감정과 연애의 순간들을 무의식중에 흘려보내는 이상황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를 바라보던 류경아의 다정한 시선이 똑같이 레몬을 향할 때. 그것을 레몬과 감각을 공유하며 보아야 할 때, 아니, 심지어 레몬에게 향하는 시선에 더 깊은 감정이 담겨 있다고 느낄 때. 그럴 때면 감각을 차단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 P226
그 애는 왜 바다 깊은 곳을 좋아했을까.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곳, 내가 어떤 존재인지 신경 쓰지 않는 곳, 아무도 나에게 너는 왜 그런 존재냐고 묻지 않는 곳, 그곳에 사는 생물들에게 나는 그냥 거대한, 혹은 조그마한 외계생물체일 뿐인・・・・・・ 그런 곳이어서 그 사실이 편안해서.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 P241
지금 나는 바다 아래로 수직강하하는 레몬의 감각을 느끼고있다. 무의식 아래에서 잔뜩 긴장하며 레몬에게 감각을 포갠다. 물이 점점 무겁게 눌러오지만 레몬은 망설이지 않는다. 그 애에게 이곳은 편안한 장소 원래 자신이 있던 곳과도 같다. - P244
처음으로 온전히 개방한 나의 자아 안쪽으로 레몬의 세계가파고든다. 그 세계는 잔잔한 슬픔과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반짝이는 것들도 있다. 나는 그 세계의 슬프고 반짝이는 것들이나에게로 건너오기를 기다린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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