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에 [재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익숙한 필체였다. 물론이 필체가 나를 위해 쓰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재이다. 제는 없었다. 하나인줄 알고 하나의 이름만 붙였다. 그러니까 이 몸의 이름은 재이고 우리는 그런 의미로 둘 다재였지만 어느 순간 나는 제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몸의 부속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제라는 걸 아는 사람은 나와 그 애, 그리고 동생 ‘선‘밖에 없다. 모든 편지는 재에게 온다. 재밖에없으니까 편지의 주인공이 나였던 적은 없다. 부모님조차도. - P150
하지만 선은 제에게만 웃었다. 그러니까 나 구분할 수 없는 재와 제 중에서 제를 알아보고, 나는 신이 우리 둘을 한 몸에 넣은 실수를 뒤늦게 깨닫고둘을 구분하는 판별자를 내려보냈다고 생각했다. - P153
‘그냥 재가 유별나게 빠르고 특별한 거지 네가 못한 게 아니야. 너는 억지로 재의 속도에 같이 얹혀살고 있으니까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지. 네가 재 속도에 맞춰주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버겁지. ‘ 하나의 몸에 둘이 살고 있으니 하나가 맞출 수밖에 없다. 그저 그뿐이라고 했다. 선의 말은 그전까지 암울하기만 한 내삶을 조금 바꿔놓았다.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깨달은 것이 중요했다. 독립되었다면 어땠을까. 부질없지만 종종 고민했다. - P157
"재는 제가 아니야." 우리는 도무지 같지 않은가. "제가 재의 부속도 아니고." - P162
"재가 천재인 것과 네가 사는 건 다른 거야. 재가 천재여서네가 죽어야 한다는 건 정말 다른 문제야." - P163
친해진다는 건 까발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보여지는 내 모습이 아니라 살가죽을 뒤집어 내 안에 있는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수고로움을, 누군가와 친해져 내 안을 까발리고 상대방의 아들야들한 속살을 끌어안는 짓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이, 기어코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 P177
저런 세상이 있다고 믿어야만 이 세상을 덜 원망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드라마를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 세상이 가짜인 걸 알면서도 그런 세상이 어딘가 있을 거야, 하고 믿어야만 버틸 수 있어서. - P179
그러자 언니는 하나의 세계를 붕괴시키려면 하루빨리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야하고, 그 세계는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에 만들어지므로 네가 살아온 세계가 빨리 붕괴되기를 원해서 그런다고 대답했다. - P180
하지만 엄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엄마에게는 엄마와꼭 닮은 여동생이 세 명이나 있었다. 그 동생들이 공부도 하고취업도 할 수 있도록 엄마는 결혼을 했다. - P184
집은 살아 있는 생명처럼 여름이면 울고, 겨울이면 비명을 지르다가 주인을 따라 죽어버렸다. 집이 고요했다. 새까맣게 타 죽어버린 나무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바람 소리도 쥐가 넘나드는소리도,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했다. - P193
엄마도 나를 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엄마는 꼬박꼬박 내 이름을 불렀다. - P200
진짜 잔인한 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진짜 잔인한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 P225
악했다면 너는 네 아비를 찔렀겠지만, 너는 강했기에 버텨서 살아남았다. 세상을 일부러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모든 상황을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가끔은 그게 미칠 듯이 억울했지만, 그래서 ‘차라리 네가 악했다면‘이라는 생각을 수도없이 많이 했지만 나는 네가 악하지 않아서 좋았다. 너는 정말이지 강해서, 멋있었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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