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후 스트레스, 그러니까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거라고, 외숙모의 말투에 걱정이나 우려, 공모의 감정 같은 건 깃들어있지 않다. 다만 나는 그 말투에서 어떤종류의 몰이해를, 그리고그 단어에 스며 있는 불길한 기운을 어렴풋이 알아차린다.  - P13

외숙모는 진정한 수다쟁이였다. 그건 외숙모가 마치 독백을 하듯 혼자서도 어떤 이야기든술술 해낸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외숙모가 자기 내장에 있는 것까지 다 끄집어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 P15

신체는 결국에는 통제를벗어난다. 마치 이 문장이 세계의 온갖 진실을 담고 있다는 듯이.
약간은 오만하고 건방지게. - P23

좀더 과격하게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정신 나간 여자가 말도 못하는 나를 ‘납치‘했다고 말했다. - P25

"아줌마."
"왜?"
그녀가 약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둠은 무서운 게 아니라고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뭐라고?"
"몰라요? 밤은 지구가 자전하니까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구 반대편에서는 사람들이 깨어 있어요. 거기는 낮이거든요. 여기는 밤, 거기는 낮."
"그걸 누가 몰라." - P43

내게 "우리 공주님, 언제 어른이 될래?"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던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증오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이 같은 공간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날 밤, 아빠는 코발트색 자동차 안에서 잠이 들었고, 잠옷차림으로 나간 엄마는 아빠를 깨워서 조수석으로 밀어넣은 후차를 출발시켰다. 그러고 얼마 가지 못해 가로등을 들이받았다. - P50

 그때 내가 알았던 사실은 이제 나도 그애들의 세계로 흘러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함께 고무줄놀이를 하고, 다투고, 질투하고, 눈물을 흘리고 억지를 부리는 세계로. - P54

아버지의 태도에서 요구 사항을 하달하는 사람의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대신 조바심과 초조함, 흐릿한 열의 같은 게 느껴졌다. 그녀는 요구 사항을 군말 없이 들어줄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말할 때가 더 많았다. "그게 정말 지금 당장 필요한건지 다시 생각해봐줄래요?" 그러면 아버지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결국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아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그녀는 약간 극적으로 두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구요." - P70

나중에 벌어진 일들을 고려하면 그녀가내게 학교 선생으로 각인되지 않은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결혼한 이후로 자신이 한때 선생이었다거나 하는 말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하다못해 내 학업에 도움을 주려는 그어떤 시도조차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과거가 마치 이제는 효용을 다한, 징그러움만 남은 허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 P79

"이건 네 부모가 함께 결정한 일이야." 이혼한 이후 어머니는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면 그런 식으로 아버지와 자신을 묶어 삼인칭으로 부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좁고 긴 구멍에 끼어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P80

"러시아 발레리나의 사랑을 다룬 책이에요." 나는 일부러 ‘사
‘랑‘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손빨래를 멈추지 않은 채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그런 책에는 아무런 교훈이 없잖니." 나는 순순히 물러났다. 어쨌든 내게는 어머니가 있었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책을 사달라고 한 사실에만족스러워하며 곧바로 나를 데리고 서점으로 갔다.  - P83

 "글쎄다…… 네가 읽기에는 너무 부적절한 것 같구나." 나는 전혀 부적절하지 않다고, 어머니를 설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린 여자애가 발레리나가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내용인데? 발가락이 너무 길어서 토슈즈를 신기도 힘들었지만 결국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는 이야기라고!" 서점 한가운데에 서서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는 동안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책을 사줄 어른이남들의 두 배(물론 정확히 두 배는 아니었다. 1.5배!)인 거나 마찬가지인데, 왜 원하는 것을 하나도 가질 수 없단 말인가? 왜 이들은 내가 이렇게 얕은수를 쓰게 만든단 말인가? - P84

"아, 지금 너무 행복해서 그래.‘
그 말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정말로 그 순간 행복했을것이다. 어둠 속 미약한 촛불을 앞에 두고 두려움을 애써 숨긴 채떡을 씹으면서, 어머니는 가족의 유대감을 자신이 진정으로 있어야 하는 곳에 있는 것 같다는 안정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머니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말로 내뱉기도 싫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을)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순간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는 그날, 그 모든 감각들이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정전과 비바람과 천둥소리를 뚫고 자신에게 도달한 안도감과 해방감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임시 거처는 그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라고. - P90

"대단치도 않은 남자 때문에 직업까지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직업을 버리는 건 삶을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야." 이 말속에는 그녀를비난하기보다는 내게 교훈을 주려는 의도가 다분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경고하듯이 말했다. "남자에게 미치면 여자가그렇게도 되는 거다. 알겠니?" 아버지가 이 말을 들었다면 이중의로 분노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녀를 모욕했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 앞에서 그런 표현-남자에게 미치다―을 사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 P92

거울 앞에 도달한 그애는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다가 반대편으로 몸을 휙 돌린다음 고개만 살짝 젖혀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맞추었다. 그런 후에아까처럼 엉덩이를 흔들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그 촌스럽고 낡은 방이 패션쇼 런웨이고, 자신은 모델이라도 된다는 듯. (가상의) 런웨이를 침범하지 않으려 애쓰며 어수선하고 산만하게 벽에 다닥다닥 붙어서 있던 다른 애들도 자신의 차례가 되자 한 명씩 진지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며 걸어나갔다.
그건 너무 처량하고, 궁상맞고, 우스꽝스러운 흉내처럼 보였다.
- P106

"쟤는 나를 미워해요." 그녀는 아버지에게말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야, 쟤는 자기 엄마에게 화가 난 거야." 그리고 마지못해 인정한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리고 나에게도." - P124

그 순간, 나는 내가 세상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느낀다. 누구도 가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그 세계는 테무니없이 치명적이고 통렬하면서 동시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약해서 내 마음속에 꼭꼭 새겨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연제나 그렇듯이 그런 생각은 시간이 흐른 후에 착각, 기만, 허상에불과하다는 판명이 날 것이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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