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 갈등이 격화되는 본국의 상황은 재일 사회에도 그대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선술집이나 고깃집에서는 테이블마다 남한 지지자와 북조선 지지자가 따로 앉았고, 문득들려오는 대화의 말꼬리를 잡아 말싸움을 시작하거나 주먹다짐까지 했다. 남한을 지지하는 거류민단과 북조선을 지지하는 조총련의 대립도 심각했다. - P19
시간이 지나 이카이노라는 지명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조선시장은 코리아타운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곳은 이제 한류드라마와 케이팝을 좋아하는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관광지가 됐다. 길거리도 깨끗해지고, 작은 김치 가게도 세대에 걸친 비즈니스로 급성장했다. 한편으로 쩌렁쩌렁 울려대는 일본 우익단체의 헤이트스피치가 주민들의 신경을 긁는 것도 사실이다. 고양이 아줌마나비녀 할망이 오늘날의 이카이노를 보면 뭐라고 할지 문득 궁금하다. 이 땅은 변한 걸까. 변하지 않은 걸까. - P24
‘여자 나이와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25가 지나면 가치가 떨어진다‘는 비상식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부모님은 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몇 달 사이에 결혼 준비를 끝마쳤다. 퇴원하면 일주일 뒤에 혼수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과 피로연을 여는 ‘전격 결혼‘이었다. - P28
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직계가족에서도 벗어나고싶은데 타인과 새로운 가족을 만들라니, 제정신인가, 아버지의딸, 오빠들의 여동생, 여성, 재일코리안 같은 명사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도, 도망치기보다 그들을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영화 하나 만들었다 고 무엇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손목 발목에 주렁주렁 차고 있는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내야했다. 알아야만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P31
언젠가 평양에 방문했을 때 오빠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총련 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다른 평양 시민에 비해 대우르받았어?" "하루에 계란 하나는 먹었나? 그 당시로 치면 파격적인 대우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아서 공부가 눈에 안 들어왔다. 하루 종일 먹을 거 생각만 했지." - P33
"아버지한테 말하면안 돼." 어머니는 조각난 사진을 양손에 쥔 채 소리 죽여 흐느끼고있었다. 소년은 셋째 건민이었다. 편지에는 ‘조국의 품에 안겨 김일성 원수님의 자비 속에 건강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라는 문장이 지푸라기처럼 옅은 갈색 편지지에 적혀 있었다. - P37
아이들을 북에 보냈다고 후회할 여유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세 아들이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졸업한 다음에 건강히 일할 수 있도록,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가족들이 웃는 얼굴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겠노라 다짐했다. 손주들이 태어나자 어머니의 결심은 신념이 되고, 다시 집념이 되었다. 무언가에 씐 것처럼 소포를 보내고 북을방문하는 어머니에 아버지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 P40
지금에 와서야 짐을 싸던 어머니의 미소를 조금은 이해할 수있을 것 같다. 어머니 눈에는 일본에서 온 상자와 봉투를 열어보고기뻐할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오직 그 생각 하나만으로살아왔을 것이다. 볼 수 없는 가족의 웃는 얼굴을 매일매일 떠올리면서, 그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도록 다음번 소포에 무얼 담을지궁리했을 것이다. 만나지 못하는 씁쓸함을 상상으로 메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45년 동안 "부모밖에 못 하지"를 몇 번이나 중얼거렸을까. - P43
여전히 잉꼬부부인 부모님 사이가 부러운 한편, 절대적으로 북조선을 지지하는 전체주의자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는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조직의 충실한 활동가인 부모님이 맹목적이고 편협한 어른으로 보였다. 나는 북조선을 조국이라 가르치는 조선학교에 다녔지만, 학교 바깥에서는 일본과 서구 문화를 접하면서 자아를 형성해가고있었다. 결국 학교에서 강요하는 ‘충성심‘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반응을 보이게 되어, 황홀한 표정으로 충성의 노래를 부르는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 P45
‘북한이 그렇게 좋은 나라면 본인이 가면 되잖아. 일본에 살면서 북한 체제를 지지하다니 아주 속 편하네. 비겁하지 않아?"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발 망치로 항의하는 ‘효녀‘인 나자신이 한심했다. 내 방에 숨어 차마 입 밖으론 꺼내지 못하는 ‘오빠들을 돌려줘‘라는 문장을 곱씹으며 눈물을 흘렸다. - P47
오빠들과의 추억이 서린 집이라고 하기에는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짧았다. 너무도 짧아서 특별할 것 없는 일상도 가슴에 박힐 만큼 소중한 기억이 됐다. 조총련 커뮤니티에서는 ‘영광의 귀국‘을 한 오빠들을 칭송하며 남은 가족들의 상실감을 ‘명예‘로 메울 것을 강요했다. 어린 마음에도 오빠들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된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외로움을 견뎠다. 주변 어른들은 ‘민족차별이 만연하는 일본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차별 없는 조국에서 고생하는 게 낫다. 5년쯤 지나면 조국 통일이 이루어지고 남북도일본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꿈같은 소리를 했다. 당시에 그런 말은 확실히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재일코리안을둘러싼 일본 상황 역시 악몽 같았다. - P48
어머니와 약속한 대로 한 달에 한 번은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아버지와 말다툼을 했다. "대학 나와서 고등학교 선생님까지 하던 사람이 커피 나르는 거 말고 할 일이 없나? 연극? 딴따라 흉내를 내다니 한심하다. 예술가가 되려면 북조선으로 귀국해! 일본에서 조선인이 어떻게 예술을 하니, 라디오나 TV에 나갈 수나 있다니? 꿈같은 소리 마라. 동네 사람들, 우리 딸이 미쳤어요! 빨리 동포랑 결혼해서 애 낳을 생각은 안 하고!" - P53
가족과 마주하기. 딸이라는 역할에 갇힌 상태에서 이 소박하고도 장대한 과업에 임하기란 심히 어려웠다. 캠코더라는 장치의힘을 빌려 속내를 숨긴 관찰자, 인터뷰어, 감독이라는 역할을 스스로 부여함으로써 발을 내디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을 찍는다는 것은 결국 내가 어디서 왔는지 파헤치는 행위다. - P53
바다에 가자고 한 건 당신이었는데, 기쁘게 숙소를 예약하고 기차표를 샀는데, 모처럼 바다에 왔는데 어머니는 어쩐지 쓸쓸해보였다. 나는 수영복은 입었지만 수영을 못 해서 모래사장에 앉아 뛰노는 오빠들과 파도를 바라보았다. 해변에서 여섯 식구가 사진을 찍었다. 오빠들이 일본에 있을 때 사진관에서 찍은 것을 제외하고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찍은 사진은 그 한 장뿐이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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