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랑 나는 발가락이 닮았어요. 하지만 냄새는 안 닮았어요. 사람들이 웃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은 이거였다. 비가 오면 손가락을 벌려요. 그 사이로 비가 지나가게. 그 후로 비가 오면 나는창밖으로 손바닥을 내밀고 한참 서 있어보곤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비가 지나가는 걸 상상하면서. - P14

"형부가 꿈에 찾아왔거든." 그 말을 듣는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죽었으면 가만히 있지. 주책맞게 왜 거길 찾아가고 그러냐." 내 말에 동생이 웃었다. - P22

"그래서 나도 도망친 거야." 내가 결혼을 한 집에는 아버지 같은 남자가 둘이나 있었다. 친정으로 돌아간 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남편이 죽자마자 아이를 버린 년이라고 어머니는 날 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궁이에 장작을 가득 넣고 불을 땄다. 그리고 찐 고구마를 들고 방에 들어가 사흘을 자다 먹다 자다 먹다 했다.  - P29

나는 막대기를 저으며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아들 따라다니는꼬마 귀신 사라지게 해주세요. 딸이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하게해주세요. 지후에게 막대기를 건네주며 나는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고 말했다 - P33

오랫동안 돌아갈 집을 마음에 품고 있던 할머니가 돌연 생각을 바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러고보면 나는 단 한 번도 할머니에게 그것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없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나 나름대로 나를 보호해온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할머니가 언제라도 우리를 두고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언제나 나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한머니가 나를 두고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웅크리고 있었다.  - P42

도-레-차갑고 매끄러운 건반. 그저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눌렀을뿐인데 어린시절, 교회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보았을 때 같은 경이롭고 황홀한 느낌이 할머니의 몸 안 가장 깊은곳에서 피어오른다. 내가 열 살 때까지는 비록 단순한 곡들이었 - P62

다른 친구들은 사랑 같은 것은 꿈꾸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하굣길 모찌빵을 사 먹기 위해 빵집에 들렀다가 인근 학교의 남학생들과 마주치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눈을 떨구며 뺨을 붉히던 친구들, 하지만 여고생 난실은 달랐다.
그녀가 갈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뭔가 특별한 것, 고양시켜주는 것, 그녀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줄 그 무언가. 음악 교사와교환하던 편지들, 악보 사이에 끼워 몰래 주고받던, 밤마다 그녀를 불면으로 이끌었던 것은 윤심덕과 김우진, 슈만과 클라라같은 연인들의 이야기였다.  - P63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런 것뿐이다. 그러니까, 할머니가나에게 찾아왔던 지난밤 꿈에 대한 일, 꿈속에서,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70대의 건강한모습으로 아름다운 옷을 입은 채 희붐한 빛에 둘러싸여 서 있다. 그 세계에서 아마도 소녀인 나는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가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가 품에 안긴다. 그런데 이건 무슨 향일까? 나는 할머니의 품에 안기는 순간 어디선가 풍겨오는 달콤한 향을 맡는다.  - P72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음은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주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 P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