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리라고?"
"응, 제국주의는 일종의 처리 공정이었던 것 같아.
매번 같은 일이 벌어졌어. 질릴 정도로 똑같은 얼굴이야."
"그런 시절이었지. 지난 세기도 지지난 세기도 지지지난 세기도"
"안 끝났어."
"어?"
"계속되고 있어. 교묘할 뿐이야. 좀더 포장을 잘한제국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 P365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 아는지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거고"
"역겨움의 농도라니 재밌네."
"비슷한 일을 겪어놓고 여기 하하호호 하며 관광 오면 안 되었던 것 같아."
"큰누나한테 그렇게 말해봐."
"무서워서 못해…… 어쨌든 하와이를 좋아하면 하와이에 오면 안 되는 거였어. 제주도를 아끼면 제주도에 덜 가야 하는 것처럼."
- P367

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애도에서 다음 애도의 웅덩이로 텀벙텀벙 걸으면서도 다 놓아버리지 않은 것은, 내가 먼저 죽은 사람들의 기록관이어서였다. 남은 사람이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어떤의미로는 친구들에게 져 술래가 된 것이다. 편을 먹고 내게 미룬채 먼저들 가버렸다. - P374

누가 이 기록을 읽을 것인가? 문명은 결국 모조리흙에 묻힐 테니,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장미보다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이 땅에 이십만 년을 살았는데, 장미는 사천만 년을 살아왔다는걸 아는지? 물론 지금과는 아주 다르게 생긴 장미였겠지만 말이다.
- P375

일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길들여지지 않는괴물 늑대와 같아서, 여차하면 이빨을 드러내고 주인을 물 것이었다. 몸을 아프게 하고 인생을 망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을 조금만 사랑하자니, 유순하게 길들여진 작은 것만 골라 키우라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소소한 행복에서 의미를 찾자, 바깥의 평가보다내면이 충실한 삶을 택하자는 요즘의 경향에 남녀 중어느 쪽이 더 동의하는지 궁금했다. 내면이 충실한 삶은 분명 중요한데, 그것이 여성에게서 세속의 성취를빼앗아가려는 책략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성취를 하려니 생활이 망가지고, 일만 하다가 죽을 것같고… - P388

"엄마 죽으면 말이야."
"죽지 마."
"아니, 나중에 나중에 죽으면 말야.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두 사이즈 큰 관 시켜."
"무슨 그런 다크한 요구를."
"절대 눈대중을 믿으면 안 돼. 홍씨 집안의 어깨란말야. 크고 두꺼워. 죽고 나서도 누가 나를 관에 넣을때, 그렇게 무지 곤란해하며 힘으로 밀어넣으면 민망할 것 같아. 아이고 아버지, 그게 제일 큰 관이었는데"
"알았어, 엄마. 제발 관 이야기 그만해. 벌써 여러번 강조했어" - P407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좋아. 좋을줄 알았어요."
- P422

"전형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뭔지 알 수 없는 집안으로 장가를 왔지."
태호는 그렇게 자기 인생을 요약했다. 종잡을 수 없었던 장모를 태호는 인간적으로 좋아했고, 장모로부터 뻗어나온 기세 좋은 여자들에게 감탄하며 살았다.
아내와 딸들을 사랑했고 처제들이 행복했으면 했고해림이 가끔 자신을 새처럼 갸웃갸웃하며 쳐다보는것도 싫지 않았고.....
- P429

"은퇴부터 죽음까지는, 이제 우리 둘 사이의 경주야. 준비 땅, 하고 가다가 먼저 죽는 사람이 승자인 거지."
"왜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유쾌하게 하는 거야?"
배우자가 막 위로되는 타입은 아니긴 해도, 어쨌거나 인생은 아직 순항고도에 있었다.  - P433

비록 화수가 다친 일이 가족 모두의 마음을 흔들었지만 태호는 시간이 지나면 곧 괜찮아지리라 믿었다. 비행기에 삼백 명이타면 몇 명쯤은 상종하기 싫은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태호는 그 사건을 그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야, 자네 또 틀렸어. 더 생각해봐.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가끔 장모님의 목소리로 머릿속이 까끌거리면 태호는 그 목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저에겐 복잡한 걸 세세하게 따져보는 형질이 없어요, 반박하면서,
- P434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은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하겠지요. 철쭉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빛에만 집중하는 상태에 있지 않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철쭉의 마음을 짐작해봅니다. 바깥의 빛이 있고 안의 빛이 있을 터입니다.
밤 산책에서 또 근사한 것을 발견하면 꼭 전하겠습니다.
- P440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어쩌다보니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2002)에 - P453

 보드 위에 앉아 떠 있기만 해도 좋았다. 우윤과 똑같이 물에 흠뻑 젖은 죽음이, 어린 시절 그렇게 두려워했던 대상이 투명한 팔을 우윤의 어깨에 잠시 두르고 기이한 격려를 해주었다.
- P457

 앤디는 자신의 세계를 우윤에게 성공적으로 전했다는 것에, 우윤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행위 중 하나를 그럭저럭 해냈다는 것에 기쁨을 느껴서 서로 그것을 친밀감으로 착각했다.
"나의 가장 멋진 수강생. 포기하지 않았다고, 다음에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도 네 이야기를 할 거야."
"누가 여기 와서 서핑을 배울 거라고 하면 꼭 앤디를 추천할게."
- P458

"응, 안 울어, 얼른 다시 사러 갔어."
"왜 그런 걸로 울었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었던 거야. 그 사람이 죽고 없어도, 우윤은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보다는건조한 답을 택했다.
"속상하면 울 수도 있지."
- P466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게 화수였다. 균형감각이 좋았다. 온화하면서 단호한 성격, 과거를 돌아보되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되 틀어져도 유연한 태도, 살면서 만나는 누구와도 알맞은 거리감을 유지하는 판단력, 일과 삶에 에너지를 배분하는 감각... 이를테면 요새 유행하는 명상 앱의 차분한 목소리를 닮았던 것이다.  - P471

상황이 나쁜데 섹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화수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삶의 대상이. 그 요구를 이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하는 법을 찾지못해 자꾸만 덜 아문 곳을 덧나게 했다.
- P472

"그 새끼가 너한테 염산을 던졌다고, 왜 나를 미워해? 왜 나에 대한 사랑이 죽었어?"
보채고 싶지 않으면서도 보채고 말았다.
"그것 말고도 많은 게 죽었어, 내 안에서, 회복할 시간을 줘."
죽지 않았다고 말해줄 줄 알았는데 죽었다고 말해버려서 상처를 받았다.
"기다리면, 다시 살아나?"
그 물음에 화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헛된 약속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 사랑했는데, 이제는 헛된 약속이라도 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결혼에 대해 비이성적으로높은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변화의 폭까지 감당하려고했는데...... 감당 가능한 폭이 아니었다.  - P474

"상헌씨랑은 할머니가 인용한 글을 나도 인용해서말할 수 있을 것 같네.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여전히 그러고 싶어?"
(하늘의 물레, 어슐러 르 귄 지음)
"질문을 질문으로 받는 게 어딨어?"
"나는 원하지만...... 살면서 얻길 바라는 게 달라질것 같아. 다른 모양의 빵을 만들고 싶을 것 같아, 계획했던 모양이 아니라, 그래도 나랑 빵을 만들길 원해?"
- P478

결혼을 매 순간 갱신하는 계약으로 생각하는 집안의 딸과 결혼하는 게 아니었어. 알면서도 뛰어들었지, 바보였지. 속으로만 푸념했다.
- P481

 나이들수록 말이 짧아야 한다고 강조하던 사람 딸이니까, 저도 짧게 이야기하고 훌라를 추겠습니다. 각자 의미 있는 것들을 찾아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아 기쁘고, 내년부터 평소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한 번 정도는 하길 잘한 것 같네요. 서로의 보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과 엄마를 떠올리는 시간을 가지며오늘밤을 보냅시다. 원래는 하지 않는 출장 요리를 해주신 프로퍼 익스프레션 사장님께도 박수를 부탁드려요."
- P494

"유학가기 전에, 엄마랑 산책을 자주 했단 말이야.
그때 부암동에 개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지. 여전히 개키우기 정말 좋은 동네고, 어느 날, 거의 곰만하게 커다랗고 북슬북슬한 개가 조그만 요크셔테리어가 오는걸 보더니 한 이십 미터 앞에서부터 납작 엎드려 꼬리를 살랑살랑하며 기다리더라고, 인사하고 싶은데 자기 덩치에 요크셔테리어가 겁먹을까봐 미리 몸을 낮춘 거지. 엄마가 그 장면에 감탄하면서 나한테 그런남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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