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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무늬
백희성 지음 / 북로망스 / 2026년 8월
평점 :

"이 글은 북로망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 중 하나는 무엇일까?
바로 '기억'이라는 힘이 아닐까?
억지로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고
그 물성이 사라진다고 해도
마음 깊숙한 곳에 내내 남아있는 것.
바로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억'이라는 의미 말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어떤 기억은 평생을 가도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기억이라는 흔적은
때로는 떨쳐내고 싶어도 내내 파고들며
한 사람의 인생을 흔들기도 한다.
건축 디자이너 출신 작가라는 특이한 이력뿐 아니라
첫 책부터 이른바 초대박을 터뜨린
작가 백희성이 2년 만에 돌아왔다.
전작인 〈빛이 이끄는 곳으로〉는
건축가인 작가의 특색에 어울리는
생생하고 탄탄한 설계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그는
이번 소설에서도 파리를 배경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파리의 패션학교에 다니는 스물두 살의
안면인식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자신의 평생을 이끌어온 '기억'과 '촉감'에 의지해
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헤쳐 가는 과정을 담은
〈기억의 무늬〉이다.
매일 밤 꿈으로 나타나는 그날의 기억.
세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그 순간은
손끝에 닿았던 촉감과 실루엣으로 남아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다.
자살사고로 이미 오래전 종결되었지만,
자신의 기억 속 낯선 실루엣을 떠올리며
그날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카미는 패션학교에 진학하며,
손에 남아있는 직물을 찾고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려고 한다.
안타깝게도 사건 이후의 충격 때문인지
그 누구의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안면인식장애를 가지게 된 주인공.
그런 그에게는 이런 장애를 남들이 알아차리지 않고
타인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
바로 뛰어난 관찰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버릇과 습관이 묻어나는
옷의 흔적이나 향기, 감촉으로
그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타인을 구분한다.
그에게 손의 감각 '촉감'은
그에게 새로운 시야이자 언어였으며,
어떤 기록보다도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매주 경찰서를 찾아 부모님의 사망사건을 담은
사건 기록을 들여다보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고
다들 이제 그만 '너의 인생을 살라'는 말만을 한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실루엣과
손에 닿았던 직물의 감촉이
'기억'인지 아니면 '환상'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양한 직물을 배우고 만져보며
그날 범인을 구분할 수 있었던
'기억'을 찾으려 애쓰는 카미에게
부모님이 남긴 집, 그리고 거기에 남겨져 있는
어린 시절 사용했던 침대로부터
뜻하지 않은 실마리를 찾아가게 된다.
직물을 오래도록 연구했던 교수님과
그의 말을 믿고 다시 재수사를 하기로 한 경찰,
언제나 옆에서 카미를 믿어준 친구까지
4명이 다시 시작한 사건의 추적은
과연 어떤 진실을 가져올까?
카미가 기억하고 있던 직물의 '촉감'은
정말 환상이 아닌 '진실'이었을까?
대체 누가 부모님을 왜 죽였을까?
뭉뚱그려진 흐릿한 얼굴을 뒤로하고
주인공인 카미의 관찰이 담긴 시선을 따라
오래도록 묵혀두었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은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건축 디자이너인 작가답게
스토리 설계 역시 굉장히 탄탄해서
늘 이야기의 진실에 가닿을 때면
생각지 못한 반전에 깜짝 놀라게 된다.
이윽고 이야기의 끝에 다다른 후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소설의 문장 속에 담긴 이야기의 실마리를
하나씩 다시 발견하는 재미까지 쏠쏠했다.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는
안면인식장애의 주인공이
유일하게 기억한 '촉감'으로
사건의 진실을 쫓아가는 과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억'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을 비트는 기발함이 있었다.
그리고 삶의 깊숙한 곳에 새겨진
사랑의 흔적이 이윽고 드러나면서
밀려오는 감동은 정말 완벽한 핏의 옷을 만난 듯
산뜻하고 가벼운 기분이었다.
건축가로서 늘 바라보는 '공간'이 아닌
손때 묻은 사물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며 그려낸
깊은 감동의 반전 소설!
정말 소설을 읽고 나니,
스쳐 지나갔던 많은 물건들에는
어떤 깊은 사연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2년 만에 다시 만난 백희성 작가의 신작은
역시 전작에서도 느꼈듯이
기대 이상의 놀라움으로
마음에 깊은 '기억'을 새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