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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지도의 뒷면에서
아이자키 유 지음, 김진환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8월
평점 :

"이 글은 하빌리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우리들은 각자가 가진 인생의 무게를 지고 살아간다.
서로의 상황과 고통이 다르고,
오롯이 누군가의 입장에서 100% 공감할 수 없기에
나의 상황과 고통이 무엇보다도 와닿게 되는데,
벼랑 끝에 내몰렸다 싶을만한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 있어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소설을 만났다.
현재의 안락한 나의 상황을
나의 입장에서 불안하다 느끼는 근래의 생각에
조용한 파장과 함께 안락한 오늘에 대한 감사함과
'무엇이든 원하는 걸 할 수 있음'에 대한 자유마저
만끽할 수 있도록 해준 작품,
〈올바른 지도의 뒷면에서〉이다.
어렸을 때 집을 나간 어머니를 뒤로하고
배송일을 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가던 코이치로.
그들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배송 일을 하던 아버지가 자전거를 탄 행인을 친 이후
사고의 트라우마로 일을 그만두게 되면서부터이다.
술과 도박에 빠져, 코이치로를 돌보기는커녕
그가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통해
벌어놓은 돈에 의지하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못나고 부족한 아버지는 코이치로가 그동안
힘들게 모아두었던 전 재산마저 빼앗아 쓰며
술과 도박으로 날려버린다.
취해있던 아버지를 인계한 경찰의 전화를 받고
아버지를 모시러 온 코이치로에게
돈을 몰래 가져다 써서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그가 손조차 대치 못했던 여자친구를
강간했다는 사실까지 털어놓고 마는데..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날만을 꿈꾸며
지금의 어려움을 인내하고 있던 코이치로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끝끝내 잡고 있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추운 겨울, 눈밭 한가운데서 아버지를 두들겨 팬 뒤
그대로 눈 속에 파묻고는 짐을 챙겨서 가출을 하게 된다.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가 됐다는 생각,
인생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는 생각에
다른 이들의 눈에 머물지 않는 지도의 뒷면 같은
도시의 뒷골목에서 노숙생활을 하며
공소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방황하기 시작한 그.
엉망진창인 집이라고는 하지만,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공간이자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사회에서 벗어나
맨몸으로 어두운 뒷골목으로 떨어진 코이치로에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물건을 팔려고 해도 신분증이 필요했고,
미성년자 신분에 거리에서 잠을 자다가
시비가 붙어 싸움을 벌이지만,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살림살이와 돈을 뺏기고 만다.
아무것도 가진 것도 먹을 것도 없이
싸구려 천 가방과 몸뚱이만을 공원에 뉜 채
하루를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코이치로의 앞에
공원에서 생활하는 노숙인들이 다가온다.
〈올바른 지도의 뒷면에서〉로 제36회
소설 스바루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작가 아이자키 유는 이번 소설을 통해
세상의 끝에 내몰렸다고 생각한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포기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낸 그의 용기와
이윽고 마주한 진실이라는 반전을 담아내며,
성장이라는 시간이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전한다.
나름의 유대감으로 뭉쳐진 노숙인들,
그들은 코이치로에게 따뜻한 온기와 거리에서의 삶에
필요한 중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나눠준다.
인생을 포기하고 망가진 것만 같아서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본 그들의 모습은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일상 속의 우리들처럼
평범한 시간이 있었고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생활을 하고 문제를 마주하고
또 서로 도우며 해결해 나가면서
코이치로는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의 면면들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거리의 생활이 익숙해지고, 인력시장까지 나아가
점차 자신의 범위를 넓히는 그에게는
가족이지만 가족 같지 않았던 아버지와 달리,
서로를 위하고 나눌 줄 아는 소중한 사람들이 생긴다.
거리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인력시장에서의 생활에서 알게 된 아이바 아재와
다코야키 장사를 시작하면서
불안했던 자신의 삶에도 '정착'이라는 안정이
찾아오는 것 같았던 코이치로는
한 번씩 과거의 '그 사건'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그날은 죽이려고 해서 미안해."라고 사과를 하라는
아재의 말을 마음에 새긴 그는,
떠나온 지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난 고향으로 되돌아가
아버지의 행적을 찾고,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게 된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은
아버지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반증을 가지게 했고,
도망치듯 떠나왔던 고향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따라
마주한 진실은 지난 시간에 대한 허무함이나 허망함,
'대체 왜?'라는 원망과 후회까지 코이치로에게 건넨다.
그가 마주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거리에서 보낸 시간과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얻은
그것들은 그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모든 것을 잃고 문제에서 도망치듯 떠나갔던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하여 돌아온 고향에서
그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어떤 감정으로 다가왔는지
코이치로의 시간을
함께 겪어내며 가득히 느낄 수 있었다.
성장이라 하면 꼭 무언가를 이루거나 상승만을
얘기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어떤 의미로의 변화는 모두 '성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품은 소년이
이겨낸 짙은 생명력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인생임을 알게 해주었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그에게 따스하게 자신을 내어 준
거리의 어른들의 마음이 있다는 게
그나마 거친 세상에서 코이치로의 힘듦을 이겨내게 해준
원동력이 아닐까 싶었다.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던 아버지의 모습도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거친 방황을 겪고 나니
코이치로의 눈에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한다.
조금은 고생한 시간이 허망할지는 모르겠지만
단단하게 스스로 쌓어올린 인생이라는 시간이
아버지의 닳아버린 지도만큼이나
코이치로에게도 탄탄한 힘이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이 부자가 진즉에 마음 깊이 대화를 나눴더라면,
아이는 조금 아이답게, 어른은 조금 어른답게
서로의 역할이 충실했다면
이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아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지,
아버지의 입장에서 풀어나가는 지난 시간의 이야기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세상에 던져진 것만 같던
어린 소년이 마주한 현실 속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따뜻한 손길들이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안락한 오늘을 감사하며,
스스로 벼랑 끝이라 생각하며 어려움을 느꼈다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오늘에 최선을 다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