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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은 꿈꾼다
하라다 히카 지음, 최윤영 옮김 / 모모 / 2025년 6월
평점 :

"이 글은 오팬하우스(모모)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돈으로 모든 행복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돈이 필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돈'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어른이 되면
당연한 수순으로 누구나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으며,
그렇게 열심히 벌다 보면 집도 차도, 가지고 싶은 것들도
차례로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리던 시절에는 이른바 '잘 사는' 부유한 집이
동네에 한두 집 정도였고, 대부분은 고만고만하게
열심히 먹고사는 평범한 집들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점점 머리가 커져 가면서,
비슷한 줄만 알았던 이집 저집의 사정이 각기 다르고
지갑의 두께와 생활의 방식이 다름을 알게 되었다.
'돈'이라는 것이 가진 무서움을 비로소 알게되었달까?
온전히 자랐다고 볼 수는 없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이로는 성인이 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경제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용돈을 받아쓰며 지불하는 생활비 없이 누리던
과거의 나의 '편리함'이
부모님의 보호 아래 얼마나 걱정 없이 누리던
행복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오래지 않았다.
'돈'의 어려움, 소중함 등을 깨달으며
그렇게 소녀는 어른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카드를 대부분 사용하는 지금과 달리,
현금을 주로 사용하던 20대 때를 떠올리면
늘 지갑을 깨끗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엄마의 가르침이 겹쳐진다.
서비스직에 근무했던 엄마는
돈을 만질 일도 많고, 여러 사람과 돈을 상대하며
나름의 철칙이랄까 원칙 같은 것이 있었는데,
지갑 안은 항상 깨끗해야 하고,
지갑 안의 돈도 깔끔하게 사용해야
복福도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지폐는 앞에서부터 뒤로 갈수록
작은 단위에서 큰 단위로 배치하고,
구겨지지 않도록 접지 않고 잘 펴서 넣는다.
앞에서부터 꺼내 쓰기 때문에
사용감이 있는 지폐들을 앞쪽으로
새 지폐는 뒤쪽으로 배치했으며,
큰 단위의 돈을 가지고 다니면
쉽게 깨서 쓰거나 헤프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지갑 안에 너무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지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엄마는 현금이 아닌 카드를 사용하더라도
카드 영수증을 모아두었다가,
카드 명세서가 나오는 날이면
날짜순으로 정리해둔 영수증과
명세서의 사용 내역을 비교하며
승인된 금액이 맞게 되었는지 확인을 거쳤고
사용하는 돈에 대해서는 가계부를 기록하며
절약하면서도 씀씀이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미신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오랜 기간 쌓여 온 많은 이들의 빅데이터인지
"빨간 지갑이 돈이 들어온다"라는 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그리고 지갑을 선물할 때는 빈 지갑을 선물하면 안 되고,
단 돈 천 원이라도 넣어줘야 한다는 속설도 있었다.
이런 지갑과 관련된 이야기는
복, 혹은 부나 돈과 관련된 이야기라서
듣고 흘리는 것이 아니라 다들 진지하게
임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엄마에게 들었던 지갑 이야기만큼이나
지갑을 둘러싼 돈과 인생 이야기를
재미있게 담은 소설을 만났다.
음식 이야기를 맛깔나게 담는 줄만 알았던
대표작 〈낮술〉로 잘 알려진 하라다 히카의 신작
〈지갑은 꿈꾼다〉이다.
〈財布は踊る 지갑은 춤춘다〉라는 원제를 가진 이 책은
전업주부 하즈키 미즈호가 절약해
갖고 싶던 명품 지갑을 사고 MH라는 이니셜을 새긴 후
남편의 카드 빚으로 인해 사용하지도 못한
지갑을 중고로 처분한 후 지갑의 여정을 따라 펼쳐지는
등장인물들의 인생과 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즈키 미즈호의 손을 떠난 지갑은
다단계 세일즈 맨인 미즈노 후미오를 거쳐
그의 지갑을 훔친 동창생이자 주식 투자에 빠진
노다 유이치로의 손을 거쳐
재테크 칼럼니스트인 젠자이 나쓰미,
학자금 대출로 허덕이는 사회 초년생인
히라하라 마이코와 사이타 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주어진 생활비를 아껴,
오래도록 소망했던 하와이 여행을 가고
자신이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명품 지갑을
스스로에게 선물한 하즈키 미즈호!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여행에 돌아온 이후
비정상적인 남편의 카드 청구요금에 의심을 가지다
'리볼빙 서비스'를 통해 남편이 카드 빚을
줄곧 지고 있던 것을 알게 된다.
더 이상 남편에게 기댈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무지함으로 인해 흔들린 가정의 경제를
단단하게 부여잡으려고 노력한다.
그 시작으로, 구매하고 사용조차 못 한
명품 지갑을 떠나보내게 되는데
중고거래를 통해 새 주인을 맞은 지갑의 여정을 통해
등장인물들이 직면한 인생의 쓰디쓴 현실과
돈과 재테크, 부동산, 주식, 대출 등
실감 나는 경제문제에 대해서도 인식할 수 있는
경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오래지 않은 과거만 하더라도
열심히 일해서 저축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경제활동의 모습이었다.
월급을 타고 아끼며 저축해서
집과 차를 살 수 있다는 것,
노력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던
시기였기에 그때의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의 부모님 세대는 그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저축만 해서는 살 수가 없다고 한다.
주식이며 코인이며 부동산까지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며
경제에 대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며
자신의 '인생'을 더욱 '부유하고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 역시
세상에 다시없는 부를 누리고자 함이 아니라,
그저 '조금 더 행복하고 여유 있게' 살고 싶었던 것뿐인데
퍽퍽한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그들은 실패하기도 흔들리기도 하며
어찌해야 할지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지극히 현실 속에서도 볼 수 있었던 사례들이라
등장인물들의 사연에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각 인물의 이야기를 거울삼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깨달음도 있었고,
아직 경제적인 이야기가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소설처럼 가볍게 접할 수 있는
경제공부 시간 같기도 했다.
먹고살려면 반드시 필요한 이 '돈'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서 모으고 사용해야 할지,
또 막연히 돈만 바라보고 달릴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중심을 잡아야 할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돈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어쩐지 너무 발칙하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는
속물 같아서 쉬쉬하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우리는 좀 더 건강한 마음과 시선으로
'돈'을 둘러싼 인생과 행복에 대해서
중심을 바로잡는 시야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되며,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읽기에 편안했고
하라다 히카만의 산뜻한 필체가 돋보이는
재미있는 경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