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진 수어사이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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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통해서 바라보는 시대상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전해준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은

실제로는 할 수 없는 이런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미국 1970년대 베이비붐 세대와

기성세대와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 있다.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으며

"오늘날 미국 최고의 젊은 소설가"라는 평을 받은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대표작인

《버진 수어사이드》이다.


학교 선생님인 리즈번씨의 다섯 딸은

열세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십 대 소녀들이다.

소설은 막내인 서실리아의 자살로부터 시작한다.

이렇다 할 이유나 유서도 없었던

서실리아의 자살 이후, 13개월 만에

리즈번가의 모든 딸이 자살을 하며

그들이 머물렀던 집도 처분되고 부부도 동네를 떠나며

모두에게 잊힌 듯싶은데,

리즈번가의 소녀들을 지켜봤던

당시 동네의 소년들은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주변인들과 자신들이 수집해온 증거를 바탕으로

그들의 잊힌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그들의 회상과 당시의 시간을 묘사하며 펼쳐지는 작품은

베이비붐 세대인 소녀들이 겪은 기성세대와의 갈등,

그들이 느끼는 여러 답답함을 비롯해

막냇동생의 자살 이후 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아픔 등 십 대 소녀들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며 당시 현실을 제대로 담고 있다.


최근 들어 유명인들을 비롯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의 사연이 뉴스에 종종 등장한다.

자살 사고 소식을 전하는 기사의 말미에

의무적으로 등장하는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는

메시지를 볼 때면 매크로처럼 느껴질 뿐

실제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어떤 감정이고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에 이 소설을 만나게 되었다.


한참 예민한 시기,

또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 청소년기에

가장 가까운 가족의 죽음 이후

그들을 바라보는 타인들의 날카로운 시선,

배려가 없는 동정이 섞인 말과 눈빛,

자유로움을 꿈꾸지만 통제만 할 뿐

제대로 된 애정을 받지 못하는 나머지 자매들이

어쩌면 정상적인 성장이 어려웠던 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다른 아이들처럼 일상을 보내고픈

소녀들의 모습은 안타깝기도 했고,

단순히 1970년대라는 배경이 아니더라도

현재의 아이들도 충분히 처한 상황에서는

그때와 비슷한 답답한 통제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싶다.


비뚤어지는 일상 속에서 망가져가는 소녀들처럼,

그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집 또한

점차 망가져가고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게 변하는 것을 보며 이 소설의 결말을

사실은 처음부터 작가는 그려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단편적인 사실만 놓고 보면

한 집안의 십 대 자매들이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비극적인 요소들만 있지만,

그들이 스스로 삶의 마지막을 선택하기 전까지

보여준 모습들과 소년들이 창문을 통해 바라본

그녀들의 모습은 그렇게 우울하기만 하지 않고

어떤 부분에서는 일탈을 즐기기도 하고

위트 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등

유제니디스만의 문체를 통해 리듬감 있게 펼쳐졌다.


딸들만 있는 강압적인 분위기 특성상

가부장적인 분위기로 아버지가 통제의 주 대상일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자매들의 엄마가

주로 그 역할을 맡았고,

딸들을 위해 해주고 싶지만

아내를 설득하지 못하는 리즈번씨의 모습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중심을 잃으며 표류하는 모습으로

방관이라는 공범으로 거듭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을 보살피고 돌봐야 할 기본적인 의무를 저버린

부모의 무관심 아래에서 소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챙기고 아끼며 사랑했다.

여느 소녀들처럼 많은 것을 알고 싶었고

많은 이들을 만나고 싶었으며

세상에 나가 즐기고 싶어 했다.


그들이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세상과 단절되고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반대를

스스로의 목숨을 저버리는 것으로 표현한

비극적인 사건.

우리는 리즈번가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안타까운 현실과 세대 간의 갈등을

비로소 넓은 시야로 바라보게 된다.


처음에는 죽음에 얽힌 '집안의 문제'로 접근하다가

점점 시야를 넓혀 몰이해와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어

상처받은 소녀들의 목소리로 확장했다.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한,

그들의 추억을 꺼내어본 소설 속 '우리들'은

관찰자이자 어쩌면 그녀들을 구하지 못한 방관자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부채감을 이렇게 갚는다.


비극적이면서도 십 대들의 호기심 가득한 묘사로

흥미진진하면서도 지극히 감정적인 진행은

미숙한 10대 아이들의 입장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 목숨을 끊은 소녀들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기성세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보여준 이 작품은 유제니디스만의 진정한

애도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 문화를 생생하게 담아내며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성장 소설이었다.


"이 글은 민음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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