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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불 스파
설재인 지음 / 한끼 / 2025년 2월
평점 :

얼마 전 90년대 장마철 출근 풍경이
SNS에서 화제가 되었다.
가슴까지 찬 물을 헤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하는 직장인들의 웃픈 모습에
'먹고사니즘'이 이렇게 힘든 거라며
아마 우리나라는 좀비가 창궐을 해도
혹은 본인이 좀비가 되어도
지옥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일을 할 거라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실제 소설이 되어 나왔다.
비자발적으로 은퇴한 걸그룹 아이돌 출신의 주인공!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받던 그녀가
한순간에 추락을 하고, 재기를 위해 선택한 것은 복싱!
아시아 여성 복싱 챔피언 타이틀전을 앞두고
하필 서울 시내에 좀비 떼가 창궐하며
계체량 전 마지막 체중 감량을 위해 찾았던
낡고 오래된 레드불 스파에 갇혀 버리게 된다.
대회가 취소되려나 생각하던 찰나,
대회가 열리기로 한 코엑스는 문제가 없어서
그대로 진행된다는 것.
좀비 떼를 뚫고 대회가 열리는
코엑스로 가야만 하는 지현,
그리고 그녀와 맞붙게 된 상대인
태국의 쌈루타도 우연히 레드불 스파에 합류하며
그들은 하루를 함께 보내고 대회장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과연 그들은 좀비떼를 뚫고
무사히 대회장에 이동해서 대회를 치를 수 있을까?
지현은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을까?
다양한 작품으로 사랑을 받아온 설재인 작가의
이번 작품에서는 '복싱'이라는 종목이 등장한다.
실제로 취미로 복싱을 하는 설재인 작가는
자신이 11년간 해온 복싱이라는 운동의 이야기를
더 이상 작품에 넣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자신만큼 복싱 이야기를 자세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에 설득당해 작품을 시작한다.
자신에 대해 끈질기고 사소한 해충이라는 자조 섞인
'문학계 권연벌레'라는 별명을 붙였다는 작가는
복싱과 무에타이에 대한 애정과
강한 여자 둘이 멋지게 싸우는 장면을 넣고 싶은
욕심을 담은 결과로 이 작품을 낳았는데,
그가 말한 것처럼 작품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약하게 취급되고
그저 외모로 평가받고 소비되었던 이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차별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신이 가진 힘과 기술로 꿋꿋하게 싸우는
분투를 담고 있다.
걸그룹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에
사실과는 다르게 보이고 평가된 사건으로 인해
의지와는 다르게 아이돌을 포기하게 된 지현이
자신의 삶을 놓고 싶었지만
다시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재기의 기회로 삼은 것은 복싱이라는 운동이었다.
복싱에 대한 애정보다는
재기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고,
대회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은
'사랑받고 싶다'는 사람의 본성이자 욕심으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의지에 관계없이 그녀의 모습과 행동, 말 등
모든 것은 평가가 되어버렸다.
지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이는 그녀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뜻대로 평가하며
그녀라는 사람을 멋대로 정의하곤 한다.
마치 사실보다는 자신의 추측과 판단으로
타인에 대한 평가를 서슴없이 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불편한 시선과 행동들을
참고 모른척하던 그녀는 이런 불합리함을 넘어
대회를 통해 거듭나고자 했다.
그런 그녀에게 재기의 발판이 되어줄 상대는
보잘것없는 경력의 태국 선수였는데,
레드불 스파에서 마주한 쌈루타는
제대로 도와주는 스탭도 없이,
얼마 되지도 않는 파이트머니를 받고 임하는
본국에 딸을 둘이나 둔 엄마로
지현은 그녀에 대한 동정심과
그래도 나는 그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어떻게든 성공해야 한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지현의 마음은 비뚤어진 판단과 선택을 하게 하고
그 결과로 지현은 자신의 민낯을 모두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르게 된 대회장,
좀비의 창궐과 더불어 예상과 달리 커진 판은
지현과 쌈루타를 어떤 결말로 이끌지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내 굉장한 집중력으로
흥미 있게 읽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약한 존재로 취급받거나
외모 몸매 등으로 평가받던 그녀들.
불합리함 앞에서도 지켜 낸
'나'라는 존재가 가진 의미는
우리가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고유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처음에는 코믹스럽게 펼쳐지던 모습이
좀비라는 요소를 벗어나 보다 현실적으로
각 인물의 마음에 초점이 맞춰지며
심층적으로 펼쳐졌다.
'나'라는 존재를 찾아가는
그녀들의 분투기의 끝에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기를.
거추장스러운 꾸밈새를 겉어내고
담백하고 제대로 된 승부를 펼칠
지현과 쌈루타의 모습이 너무 기대된다.
"이 글은 출판사 한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