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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루코와 루이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윤은혜 옮김 / 필름(Feelm) / 2024년 10월
평점 :

"도와줘"라는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내가 마주한 가장 난처하고 힘든 순간
친한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나서주었던 친구를 위해
그 친구가 내민 구조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데루코와 루이의 새 출발은 바로 거기서부터였다.
일흔 살이라는 나이는 누가 봐도 노인.
인생의 정점을 지나 이제는 저물어가는 해처럼,
일상에 익숙하고 떨어져가는 체력에 순응하며
노-인이라 부르면 마치 두 팔을 허우적거리는
좀비를 떠올리곤 한다.
부인이라는 존재를 가정부처럼 생각하는
가부장적 남편을 둔 데루코.
노래를 부르는 일을 하고 있고
답답한 건 딱 질색인데
충동적으로 입소한 노인 아파트에서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아
따돌림을 받고 있던 루이.
그녀들은 같은 중학교를 나왔다는 공통점 외에는
외모도 성격도 정반대이지만,
비가 많이 오던 중학교 3학년의 어느 날
불어넘친 물 때문에 한 번의 스침이 있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성인이 되어 마주한 동창회에서
난처한 상황에 빠진 데루코를 루이가 구출해 내며
지금처럼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새로움이 설렘보다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나이,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탈출을 감행한
데루코와 루이는 정해진 곳도 도움을 줄 이도 없는
낯선 곳으로 가게 된다.
탈출을 앞두고도 중간에 먹을 도시락을 챙기고,
옷과 식기류를 포함해 드라이버까지 가방에 넣은
데루코가 확신의 J라면
'도와줘'라는 요청 이후 자신을 괴롭히던
파벌의 당사자들 방문 앞에 마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라는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립스틱으로 엑스 자를 그리고 탈출한 루이는
만카(만화카페) 비즈호(비즈니스 호텔)라는
줄임말을 쓰는 요즘 스타일의 할머니이자
계획이라고는 조금도 세우지 않는 즉흥적인 P.
말하지 않아도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그녀들은
'함께한다'는 사실을 가장 큰 힘으로
그녀들의 새 출발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난다.
확신의 J인 줄 알았던 데루코가 이끈 곳은
휴가지로 많이 가는 유명한 휴양지의
산속에 있는 별장촌.
그녀는 인적이 드물고 한동안 방치된 듯한
별장의 문을 드라이버로 열어버린다.
맞다. 그녀들은 다른 사람의 별장을
무단으로 침입한 것이다.
두 여자의 우정과 일탈을 그린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오마주로 한 이 작품은
원작에서 두 여자가 일탈(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는 이야기를 담았다면
《데루코와 루이》의 두 여성은
조금은 귀엽고 조금은 통쾌하며
조금은 소심한 작은 행복을 그리고 있다.
휴게소에서 자리다툼이 일어나 말싸움을 벌이게 된
젊은 남자 앞에서 문신 모양의 팔 토시를 한 팔을
걷어 보이려다가 금세 들통이 난다던가,
호기롭게 몰래 문을 열고 들어간 다른 이의 별장에서는
5개월 동안 생활을 하지만
주인의 물건은 손대지 않고 집안 청소를 하며
그곳에서는 새로운 일을 하며 돈을 벌기도 한다.
자신을 파출부 취급한 남편에게
이별의 편지를 남기고 떠나왔지만
잠깐 물건을 찾으러 갔던 엉망이 된 집안에서
쓸쓸하게 사 온 음식으로 한 끼를 때우려는 모습에
왈칵 눈물을 짓기도 한다.
거기다 바람을 피웠던 내연녀의 이니셜과 생일로
비밀번호를 설정한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끼다가도,
그의 연금 전부도 아닌 일부만 헐어내어 나오는
그녀들이 저지른 일탈은 델마와 루이스에 비하면
귀엽고 아기자기까지 할 정도이다.
더 이상 새로울 무언가가 없을 거라고
노인들에게는 즐거움이나 하고 싶은 일,
자존심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그녀들은 일흔 살도 얼마든지 새로운 무언가를 하며
반짝이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여주고 있다.
설레는 새로운 만남,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가슴속 부채의 해소,
처음으로 느끼는 육체노동의 어려움까지
힘들고 피곤함을 느끼지만
이 또한 살아있다는 즐거움으로 그녀들은 씩씩하게
인생 2회차의 새 출발을 받아들인 것이다.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며,
서로를 위하고 이해해 주는 데루코와 루이는
새로운 한 가족으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자는 남자가 없으면 안 돼'
'나이 들어서 누구에게 기대려고' 하는
고정적인 시선을 통쾌하게 깨부숴버리는
반짝이는 언니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지루했던 일상에서 탈출을 고하면서도
맛있는 메뉴들로 자신들을 위한 도시락을 쌌던 것처럼
팍팍한 일상 속에서도 가장 소중한 나를 위해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여유를 가지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멋지게 나이들 수 있을까?
이렇게 과감하게 새 출발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녀들이 나이가 들었기에
그 인생의 쌓인 시간이 준 용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른 때'라는
말을 떠올리며 데루코와 루이가 펼쳐나가는
새로운 반짝임을 만끽해 본다.
"이 글은 필름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