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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평점 :

타이완의 소설가이자 영화배우, 번역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천쓰홍의
새로운 작품이 출간되었다.
다섯 명의 누나를 둔 천톈홍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전작 《귀신들의 땅》은
천 씨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
타이완의 근현대사를 제대로 보여주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서 타이완 최고의
양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금정상 문학 부문과
금전상 연도백만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 작품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12개 언어로 출간되는 등 전 세계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 작품 《67번째 천산갑》을 통해서는
동성애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드러내었는데
단순히 동성애에 대한 인물들의 서사가 아닌
고통을 함께하는 주인공들의 나아가는 길을
보여줌으로써 함께 연대하고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만의 시선으로 따스하게 담아내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동성혼이 최초로 합법화된
타이완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을 향한 억압과 고난,
차가운 시선이 남겨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작 《귀신들의 땅》을 통해서도
자신의 고향을 배경으로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옮긴 듯한
자전적 느낌을 주었던 작가는
본격적으로 이번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과감하게 드러냄으로써
동지 문학을 추구하는 작가로서
자신의 목소리로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인 '그'와 '그녀'는
어린 시절 매트리스 CF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인연이 이어지게 된다.
산속에 살던 수줍은 소년인 그와
CF에 출연하면서 일약 스타가 된 그녀는
자신들에게 던져지는 어떤 비뚤어진 시선과
현실에서 고통을 느끼지만 묵묵하게 걸어나간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받지 못하고 그로 인해 가족으로부터도
상처를 받게 된 그가 홀로서기를 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생활을 이어가는 모습은
상처 입은 이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비참한 현실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었다.
CF에 출연하고 스타가 된 그녀 역시
그녀를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선 앞에
많은 고통을 받아오고 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딸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엄마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CF를 비롯해
방송일을 시작했던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의 이미지를 소모하는 사람들(특히 남자들) 앞에서
불편하고 노골적인 놀림과 시선을 받기도 한다.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남자라는 성별 아래
어쩌면 잔인하게 짓밟히면서도 부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 꿋꿋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유약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하게 보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 찍었던 CF를 찍기 위해
감독을 비롯해 그들은 산속에 있는
그의 집에 방문하게 되고,
고가에 천산갑 비늘을 팔기 위해 양식하던
그의 집에 있는 천산갑들이 수줍음을 굉장히
많이 타는 동물임에도 그에게는 주저 없이 붙는
기이한 모습을 보며 감독은 그와 그녀,
천산갑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찍었던 영화가 영화제에서 상을 타고,
그때 당시에는 영화제에 가지는 못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소년과 소녀였던 그들이
나이가 지긋이 들었던 지금의 순간,
그 영화가 다시 고화질로 복원되어 재상영한다는 소식에
그와 그녀는 과거에도 방문하지 못했던
낭트로 발걸음을 향하게 된다.
낭트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늘 조용히 듣기만 하고 말이 없던 그와
늘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던 그녀는
과거의 일들을 하나씩 풀어가며 추억하고,
찾고자 했던 그녀의 소중한 이를 함께 추적해나간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인 '그'와 '그녀'는
이름도 없이 등장한다.
답답할만치 수많은 고통들을
막연하게 받아들이는 그와 그녀는
다른 이들 앞에서는 솔직할 수 없지만
서로 앞에서는 솔직한 하나의 인간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내어 보여줄 수 있다.
서로의 가까이에서 서로의 고통을 나눠주며
함께 나아가는 길은 서로가 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남성과 여성, 이성 사이의 감정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서로에 대한 호감과 집착, 소유 등
어떤 것이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것이 아닌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굉장히 단편적인 표현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인데,
그와 그녀의 관계는 연인도 가족도 아니면서도
어쩌면 가족보다도 서로를 더 편해하고
자신을 누구보다 더 이해하는 관계로
이 또한 다른 종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늘 외로웠던 그와 그녀,
그들은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었고
지쳐도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그들이
서로 함께 눕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잠에 빠지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안락함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좁다란 그의 집, 무엇 하나 제대로 놓여 있지
않은 그 공간은 그를 집보다 밖으로 길로 내몰곤 한다.
세상이 그를 보는 시선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바르지 않다, 잘못되었다, 이상하다, 변태다 하는
그런 시선들이 가두는 답답함이 마치
쉴 곳 없는 '집'이라는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와 그녀가 낭트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수없이 시간은 과거의 그들에게로 향한다.
힘들고 방황했던 시간, 때로는 행복했던 시간들은
하나하나의 추억이 되어 그들이 걸어갈 길의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었다.
끝내 대단한 '안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만의 작별을 할 수 있었던 그들의 여정이
끝에는 아름다운 마침표가 되기를 바랐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꺼내놓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힘과 위로가 될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꺼냄으로써
소외되고 차별받았던 동지들에게 힘을 주고,
이들이 처한 현실을 대중들에게도
제대로 알리고자 함을 느낄 수 있었다.
천쓰홍의 소설은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각 인물들이 가진 이야기의 깊이가 있어서 좋다.
장이 진행될수록 펼쳐지는 이야기의 깊이가
그가 근본적으로 하고자 한 이야기를
더욱 진하게 알리는 것 같아서 더욱 좋았던 작품이었다.
동성애에 대해서 불편한 시선을 가진 이들에게는
'동성애'라는 어떤 틀에 갇힌 이미지보다는
'한 명의 사람'이야기로 고통을 이겨내가는 과정을
담았다는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은 민음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