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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이끄는 곳으로
백희성 지음 / 북로망스 / 2024년 8월
평점 :

'집'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먹고 자는 등 생활을 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한 개인, 한 집안의 문화와
그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집약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심심찮게
잘 알려진 이들의 '생가터'를 볼 수 있다.
어떤 업적을 남긴 이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한 어떤 의미라고도 할 수 있지만
사실 먼 시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에게
그 '집'이라는 공간이 가진 의미가 얼마나 되기에
실제 지금은 그들이 살지 않는 과거와 비슷하게
그때의 세간살이를 가져다 놓고 전시장처럼 꾸려둔
그 집의 가치가 도대체 무엇일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그런 편견을 가졌던 나에게
어떤 한 가족의 의미와 사랑을 담은 이 작품은
집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깨닫고 느낄 수 있는
계기로 다가왔다.
건축가상을 수상하고
현재도 건축디자이너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백희성 작가의 《빛이 이끄는 곳으로》이다.
프랑스에서 10여 년간 건축가로 활약하며
다양한 건축물을 디자인해온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제와 같은 느낌의 소설인
팩션을 써 내려간다.
이 소설은 기록 노트에 담겨온 건축에 대한 생각과
그의 경험, 배운 모든 것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프랑스 시테섬과 스위스 루체른을 배경으로
아들에 대한 사랑을 자신이 지은 건물에
잔뜩 녹여내고 숨겨놓은 건축가의 흔적을 따라
뤼미에르 클레제라는 인물이 그것을 파헤쳐 가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집의 의미와 사랑을
따스하게 담고 있었다.
건축가인 클레제는 자신만의 공간을 늘 꿈꾸던 와중에
프랑스 시내 한복판인 시테섬에서
말도 안 되는 금액에 올라온
오래된 집의 매물을 보게 되고,
그 집을 살펴보러 갔다가 알게 된
집주인의 비서 이자벨을 통해
집주인인 피터의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왈처요양병원에 초대를 받게 된다.
건축가인 클레제의 시선을 통해 묘사되는
오래된 고택의 모습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과거 수도원이었다는 왈처요양병원의 모습은
굉장히 이국적이면서도 글만으로도 그 느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섬세했는데,
소설 중간중간에 그려진 건물을 표현한 스케치는
더욱 그 상상 속의 건물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오래된 고택을 말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어
집주인인 피터의 초대에 임한 것도 있었는데
막상 요양병원에 찾아갔을 때 피터는 의식이 없어서
며칠간 그가 회복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된다.
잘 알지 못하는 집주인을 만나러 간 상황도 특이했지만,
그것도 외부인의 경우 병원에 있는 노인들에게
안 좋을 수도 있는데 외지인인 그를
기꺼이 이곳에 머물게 한다는 점과
시종일관 미스터리한 표정으로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 원장 크리스 부인에게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클레제는
건축가의 입장에서
이 요양병원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생기는
원초적인 관심을 지울 수가 없다.
집주인인 피터가 제시한 '4월 15일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오래전 피터의 아버지가 지었다는
이 요양병원 건물 구석구석을 살피고,
발견한 여러 힌트들을 바탕으로 추리에 나선다.
숨겨진 공간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이제까지 3명이나 나타났다가
다들 화를 내며 사라졌다는
건축가들과는 다르게
클레제는 자신만의 시선과 감을 가치고
서서히 비밀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찾게 된 피터의 아버지인 프랑스와 왈처씨와
아나톨 가르니아의 이야기가 담긴 일기는
피터씨에게 참을 수 없는 원망을 남기게 하는데,
요양병원에서의 일을 뒤로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는 클레제에게
원장인 크리스 부인이 전한 편지와
두 권의 일기장을 바탕으로 오래된 시테섬의
고택에서 이어지는 비밀을 계속해서 풀어나가고
결국에 피터의 아버지인 왈처가 전하고자 했던
진실에 가닿게 된다.
건축이나 집의 의미에 대해서
저렴하고 빠르게 찍어내던
영혼이 없던 집에 있어서
제대로 된 의미와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다시 원 주인에게 그 모습 그대로 담아
되돌려주는 클레제의 모습은
건축가로서의 사명감을 넘어
한 가정과 한 남자의 사랑에 대한 존경심 같았다.
퍼즐 같았던 건축물의 각 요소들이 맞춰져가며
숨겨져있던 공간이 나타나고
자연과 어우러져 그 진가를 보여주는 모습은
'아! 한번 실제로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읽으면서 내내 이 공간이 실제로 어디일지,
마치 소설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일 것만 같아서
그 알려지지 않은 공간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 커졌다.
그만큼 실감 나게 묘사한 작가만의 필력이
이 작품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준 것 같았고
건축가라는 작가의 직업답게
기초부터 탄탄한 작품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건축 일을 하는 분들은
수시로 스케치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건축학을 전공하던 친구가
언제든 생각나는 것을 스케치로 옮기기 위해서라도
수시로 그리는 과정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얘기를
했을 때에도 건축과 그림의 연결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서 소설 속에 더해진
작가의 스케치를 보며 그 스케치를 바탕으로 완성될
공간이 주는 힘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집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
우리가 집을 통해 그 안에서 가족들과 나누었던
혹은 나누고 싶었던 수많은 마음들이
그 속에 잔뜩 배이고 때가타고 삐거덕거리며
전할 그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제는 '생가터'라든가 '집터'라는 공간을
왜 보여주게 되었는지 그 의미를 다시 알게 되었다.
하나의 집이라는 곳이 가지는 수많은 감정들을
아련히 손끝으로 공간을 스치며 생각해 본다.
백희성이 그린 이 소설이 프랑스와 스위스의
어딘가를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에서 품어진 이야기로 담아주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글은 북로망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