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
무라야마 유카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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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

청소년기는 그런 시기가 아닌가 싶다.

자신에 대한 무한한 탐구와 생각들을 하다 보면

어느새 흐르는 시간만큼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자라나니까 말이다.


이따금씩 흔들리는 그 시기에

"너답지 않게 왜 그래?"라는 말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나다운 게 뭔데?

진짜 내 모습도 모르면서!" 하면서

'나답다'라는 것에 대한 생각에 빠지게 되고 말이다.


아름답다는 말에서 '아름'이라는 것은

나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다운 것이 즉 아름답다는 것인데,

이런 나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고

또 무엇이 나다운지를 깨닫기까지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나 어떤 계기도 계기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자신과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너무나 상반된 두 청춘이 서로의 민낯을 마주하고

스스로를 증오하고 망가뜨리는 대서 벗어나

비로소 나다운 모습을 찾아가는 시간을 담은 작품

《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이다.


어려서부터 서핑을 좋아하며

파도를 타는 그 순간을 좋아하는 미쓰히데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농담도 잘하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너무나 좋아 보이는 무난한 모습이지만

사실은 어린 시절 이혼을 한 부모님,

그 뒤로 폭군 같은 아버지 아래서 자라며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이만큼 커져있는 상태이다.

급기야 아버지는 암 투병 중으로,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일주일에 한 번씩 간호하며

자신에게 유일한 낙이자 의미인 '서핑'만을

생각하는 굉장히 조용한 소년이다.


큼직한 키, 짧은 머리와 시원시원한 눈매.

학교에서 공부든 운동이든 모든 면에서 뛰어나

모범생으로 통하고 있는 후지사와 에리.

에리는 둥글둥글 여성스러워지는

자신의 몸을 보며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얼핏 바른 생활 같은 가족들도,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집을 떠난 큰오빠 때문에

원하지 않던 가업을 이어받으며 함께 살게 된

작은오빠 식구들을 비롯해 3대가 함께 살고 있다.

여자를 보면 마음이 동하지만, 신체적으로는

여성으로써 남자에게 반응을 하는 그녀는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착한 아이'로 행동하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게 된다.


바다가 보이는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서로에게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장마다 이야기의 화자는 미쓰히데와 에리가

번갈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이윽고 둘의 마주함이 생기면서부터

같은 이야기를 두 가지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남들과 다르다'라는 사실에 자신을 극도로 증오하는

에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또 모범생인 척 주변의 시선에 맞춰 살아가는 자신에게

미움을 표현하기 위해 극단의 방법으로 택한 것은

처음 알게 된 남자와 하루를 보내는 것.


집에도 거짓말을 하고 낯선 도시로 떠나

길에서 만난 낯선 샐러리맨과 관계를 맺게 되는 데,

기대하고 생각했던 게 아닌

허무하고 불쾌했던 기분을 느끼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길,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미쓰히데를 만나게 된다.


모범생으로 타인에게 알려진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킬까 봐,

이런저런 둘러댐을 할까 고민하는 에리에게

미쓰히데는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엄마 아빠의 이혼, 그리고 아버지의 투병까지.

남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자연스러운 일도 막상 본인에게는

자연스러울 수 있다며

누구나 당사자밖에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는 게

바로 그런 거일 거라며

자신은 누구에게도 에리의 일을

얘기하지 않을 거라는 미쓰히데.


그 뒤로 모종의 거래를 하게 된 두 사람.

원할 때에 언제든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마음이 아닌 신체만의 교류를 한다는 점.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민낯의 자신을

가깝지 않은, 아니 오히려 가장 멀다고 할 수 있는

가장 먼 접전의 서로에게 보이며

그들은 그들만의 관계를 이어나간다.


에쿠니 가오리, 미야베 미유키와 더불어

일본 3대 여성작가로 물리는

무라야마 유카는 위태하고 불안한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섬세한 자신만의 문체로 담아내며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두 청춘의 관계'를 아름답게 펼쳐냈다.


10년 만에 복간한 이 책은

작품 속에서 미쓰히데와 에리의 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문제적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많은 이들의 열광을 끌어내기도 했다.

과감하고 담대한 표현은 책을 읽는 내내

어쩐지 누가 나를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주위를 살피게 하곤 했는데

처음엔 서로에게 일부러 날선 말을 하고

상처를 주며 긁어대던 두 인물이,

반복되는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또 상대를 품어주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면서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 '정서적 유대감'까지

갖게 된 이들이 비로소 마음까지 주고받으며

새로운 관계로 거듭나는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른 생활을 하는 모범생의 이미지,

서핑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두 사람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틀을

흔들리고 넘어서면서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납득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은

'그래도 한 뼘 나아갔으니 됐다' 라는 생각과 함께

솔직해진 그들의 진심을 응원할 수 있게 되었다.


대단히 복잡한 일도 아닌데

유난히 크고 어렵게 다가오는 시간이 있었다.

매일 마주하는 나인데도,

내가 밉거나 이해할 수 없다가도

가족이나 타인과의 관계 사이에서는

기대에 어긋나기 싫어서 무난한 척

괜찮은 척 무리한 적도 있고 말이다.


마주할 수 없었던 자신과 제대로 설 수 있고

계속 치고 또 치는 파도를 넘어서

그 위에서 파도를 즐기는 모습은

어리기에 무모하게 할 수 있고

또 그때만이 가진 뜨거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책을 덮으며 미쓰히데와 에리의

앞으로 펼쳐질 많은 날들을 가만히 생각했다.

그들은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까?

한결 단단해진 그 마음속에는

그래도 자신을 미워하고 이해하지 못하던 마음이

조금은 말랑해지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여성작가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담대한 묘사에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풍경과 바다의

짭조름한 냄새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던

그런 시간이었다.


"이 글은 다산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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